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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하루 그대가 되어 희망을 심는 대학생들의 열정 이인영

“He is reading a book~~! ” 교실 밖으로 쩌렁쩌렁한 선생님의 목소리가 새어나온다. 모두가 여름방학에 들어간 7월 28일 저녁의 인천 중구 성미가엘복지관 지하 2층 공부방. 노란 티를 입은 인하대학교 고분자신소재공학과 2년 안종우 선생님이 땀을 뻘뻘 흘리며 열을 내고 있다. 옆방에서도 공부가 한창이다. 바로 전, 6시 25분에 시작된 1부 수업에선 같은 과 2년 이수진 선생님이 유리수를 가르치고 문제집을 푸느라 칠판을 펜으로 두드렸다.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은 것이다. 중학생들도 진지하게 수업을 듣는다. 지난주엔 선생님들과 여름 캠프도 갔다 온지라 친근감도 충만돼 있어서일까.

인하대학교의 공부방 봉사동아리 ‘아해누리’는 저소득층 청소년들의 긍정적 자아 형성을 돕기 위해 방과 후에 영어와 수학 등을 가르치고 있다. 중학생들이 초등학생이나 고등학생 보다 더 방치되어 있어 중학생을 보살핀다. 얼핏 봐선 학생인지 선생님인지 헷갈릴 만큼 앳된 모습의 예쁜 선생님들. 그들은 캠프에서 토요일에 돌아왔는데 월요일 수업을 빼먹지 않았다. 캠프도 힘든 일정이다. 사고가 나지 않게 아이들을 보호하느라 한창 젊은 대학생들이 술도 안 하고 밥도 매끼 직접 해먹이며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부모님께 식사준비 도움도 청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아픔을 알고 있어서다. 맞벌이 가정, 한부모 가정, 조손 가정의 청소년들이 대부분인 이곳 아이들의 마음이 어떨 때 몹시 아픈지, 어떤 때 공부하러 오지도 못하는지, 왜 담배 피고 본드 하고 탈선의 길로 빠지기도 하는지에 관해 회의도 하고, 수업일지도 빠짐없이 적으며…. 선배들부터 내려온 세월이 18년이 되었다.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아해누리’는 학습지도를 주로 하며 학교 진도에 맞춰 기초실력 습득을 돕는다. 영화감상, 팝송 부르기, 미술공작 등 창의성을 계발해주는 감성 교육도 월 2회 병행한다. 그 외 운동 등을 하는 대동놀이, 여름 캠프, 가을 소풍 등을 통해 다양한 인성교육을 하고, 또한 멘토- 멘티 관계를 맺을 수 있는 1:1 담임제를 채택해 진로지도는 물론 상담자 역할을 담당한다. 일주일에 한번씩 보호자에게 전화를 해 아이의 공부방 생활에 대해 알려주고 가정에서의 생활을 묻는 등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가정통신문도 수시로 보낸다. 매주 교사회의를 열고, 연말에 1년 활동을 평가받는 총회를 열고 있다.

“1교시는 생일파티로, 케이크와 떡볶이 5인분에 순대 5인분을 사서 아이들과 함께 먹었답니다. 음… 근데 아이들 식성이 장난 아니더군요. ㅎㅎ 거의 못 먹을 지경. 하핫. 애들이 먹는 거만 보고도 배가 불러야 할 판에 애들 거 뺏어먹고 ㅠㅠ.  2교시는 환범샘이 1주일 간 고생해서 준비해온 CD로 금연교육 동영상을 시청했지요. 집중 전혀 안 되는 아이들. 아무래도 다음번엔 의과학부에 의뢰해서 담배로 썩은 폐 덩어리를 지참해 가야겠습니다. 심의에 걸리나요? 항상 시끌시끌하고 말도 엄청! 안 듣고 하지만… 그래도 착한 공부방 아이들입니다.” 한 선생님이 수업일지에 쓴 내용이다.

인하대학교에서 20분 거리에 위치한 이곳 가파른 언덕길의 복지관에 올라와 아이들의 눈빛을 마주하고 서는 대학생들. 영어를 못 해도 학원 갈 엄두를 못 내고, 때론 식사도 거르며, 때론 세상에 대한 불만이 싹터 움츠러든 아이들을 향해 목청을 돋우는 선생님들. 아이들은 복지관에서 급식을 제공해 방과 후 시간을 소중하게 보낼 수 있게 되었지만, 대학생들은 8시 수업이 끝날 때까지 식사도 못한 채 그곳에 변함없이 있다.

“약속을 지킵니다”
‘아이들 세상’이라는 뜻의 ‘아해누리’는 1990년 7월 17일 창립되었다. 당시 섭리수녀원의 수녀 한 분이 어려운 아이들 공부를 도와줄 자원봉사자를 모집한 게 그 시작이다. 처음엔 숙명여대, 가톨릭대 등 여러 대학 연합체 형태로 시작을 했지만 서울 소재 대학은 너무 멀어 못하게 되고, 1991년부터는 아예 인하대학교 동아리가 맡아오게 된 것이다. 만석동은 ‘괭이부리말 아이들’에도 소개된 가난한 노동자들이 주로 사는 지역으로, 처음엔 동사무소에서 빌려준 노인정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8년 후엔 재개발로 인해 수녀원에서 전세내준 송월동 빌라에서, 또 IMF 외환 위기 때는 더 어려워져 미가엘복지관에 부탁해 장소를 제공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정교사 30여 명이 17명의 중학생들을 가르친다. 동아리에 입회하면 수업 참관을 4번 하고 연구수업을 1회 해야 정교사가 될 수 있다. 선생님들은 “투철한 봉사정신은 필요 없다.”고 얘기하면서도 동시에 이렇게 얘기한다. “아이들과의 약속이다. 우리의 책임감이다.” 라고.

그들에겐 무엇보다 아이들이 우선한다. 이수진 신임회장은 올 초 친구에게 “그만두라.”고 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하지만 그 친구는 별로 열심이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어보였다. 섭섭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 말을 택했다. 어려운 처지의 아이들과의 일이 결코 대충일 수 없는 대학생들의 다부진 의욕이요, 희망을 주고픈 그들만의 꿈이 각자의 가슴에 스며있기 때문이다. 

선배인 이현진(37) 초기 회장은 당시 회원이 10명뿐이라 거의 매일 나왔다. 언젠가 그 지역을 걷다가 저녁 늦도록 밖에 있는 아이를 보고 “밥 먹었니? ” 하고 물은 적이 있다. 고개를 저으며 “화투를 쳐서…”라고 말하던 아이를 생생히 기억하는 그다. 참 답답한 현실들이 그곳에선 흔한 일상처럼 펼쳐지기도 했다. 그는 그 삶에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 동네는 그래도 정이 흘렀다. 그런 삶에 빠져들었는지 환경공학과를 졸업했지만 대학원은 사회복지학으로 전공을 바꿔버렸다. 지금 그는 지역자활센터의 복지사로 근무하고 있다. 그가 가르치던 아이들은 이제 30세 전후로 장성해 회사원, 경찰, 사회복지사, 유치원 교사 등 다양한 직업을 갖고 열심히 살고 있다. 취직했다며 술도 사고 스승의 날에 만나 회포를 풀기도 한다.

“선생님 어디 간다고요? 내일도 와요? ” 여학생은 쉴 새 없이 한쪽 복도에서 질문하고, 남학생은 싱글벙글 미소지며 얘기도 잘해준다. “저 선생님들 진짜 좋아요. 재밌게 말로 풀어줘요. 부담이 될 정도로 너무 잘해 주셔서 죄송하죠.” 아이는 감사한 마음을 죄송하다고 표현했다. 선생님도 마찬가지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해결이 힘들고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느낄 때 미안해요.” 어린 선생님들은 기획은 잘돼도 예산이 없어 힘들고(그들은 회비를 내고 복지관의 보조도 받는다), 자신의 맘도 몰라주고 호응이 없을 때 ‘무슨 보탬이 되나? ’ 하고 힘들어 하지만 금방 언제 그랬냐 싶게 맘을 돌린다.

“아이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게 기쁘고 성적이 쑥 오를 때 뿌듯하지만 ‘문제아’ 같던 아이가 ‘저에게 희망을 주신 선생님’하고 말해줄 때 더 보람차다.”고 한다. 그들도 함께 아이들을 보며 희망을 배운다.

어느 틈인가 어스름한 저녁이 몰려오고 있었다. 복지관 지하 창밖을 보니 다닥다닥 붙은 담 사이 좁은 골목길을 끼고 있는 작은 집 옥상엔 이불 빨래가 걷혀지길 기다리고 있다. ‘짙은 어둠이 와야 걷혀지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공연히 들며 걷어주고 싶다. 복지관 마당의 누렁이 두 마리는 어미와 새끼인지 같은 밥그릇에 머리를 맞대고 밥을 먹고 있다. 저녁을 나누는 게 참 다정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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