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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아산병원 병도 고쳐주고, 집도 수리해주고 이선희

보성의 산들은 낮고 따뜻하고 환하다. 초여름의 기운이 만연해 짙푸른 빛으로 빛나는 녹차 밭의 고장은 다향제에 이어 제4회 보성녹차 국제마라톤대회 개최로 술렁이고 있었다.  마라톤대회를 앞두고 더 심기일전해 봉사의 마음을 다지고자 대야리4구 강산마을에 봉사가기로 했다는 보성아산병원 의료진을 따라 독거노인 최석태 할아버지(84)의 집을 찾는다. 그분 집이 거의 무너질 지경이라 동네 분들의 발의로 예전 마을회관을 새 거처로 마련해드리려 하는데 집수리가 필요하다며 사회복지관에서 도움의 손길을 청해온 것이다.

작년 3월 정읍아산병원에서 이곳으로 부임한 김중렬 원장(52)의 지휘 아래 보성아산병원 봉사팀은 사랑의 지팡이 200개 나눠주기 운동을 비롯해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집수리 활동과 도시락배달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젠 다가서는 병원으로  체질개선이 시급하다는 김 원장은 농촌에 시집온 외국인 신부들을 위한 무료진료, 홈페이지 개설과 함께 인터넷 예약 접수 등 탁월한 서비스 정신을 발휘, 병원에 대한 이미지 개선효과로 줄잡아 연 15억원의 적자를 내던 병원의 적자를 작년엔 3분의 1로 줄여놓았다. 작년에 만성신부전증 치료를 위해 연 인공신장실도 호응이 좋아  20여 명이 치료를 받았다 한다.

화창한 오후 햇빛을 받은 채 나른한 정적이 흐르는 고샅길로 들어서자 새로 이삿짐을 푼 듯 분주하고 어수선한 모습의 하얀 집 한 채가 눈에 띈다. 바깥 수돗가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유리창이며 냉장고를 닦느라 부산하다. 안을 들여다보자 산뜻한 파란 파스텔 톤의 구름벽지로 주방 쪽 도배를 막 끝낸 남정네 몇이 구슬땀을 닦고 있다. “혹시 아산병원 봉사 팀인가요?” 하고 묻자 도배작업을 하느라 풀 묻은 빗자루를 들고 있던 김광영 계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할아버지는 어디 계시냐고 묻자 보성종합사회복지관에서 나왔다는 박미례 사회복지사가 “어~? 방금 전 이장님의 방송을 듣고 무료진료 받으러 가셨는데…” 하고 답한다.

노인 몇 분이 길가 붉은 벽돌집으로 서둘러 들어가는 모습이 포착된다. 새마을회관에서 의료봉사팀들의 무료진료가 시작된 것이다. 의료봉사팀은 뚝딱 진료 준비를 갖추고 할머니들 혈압, 혈당 체크를 한다.

귀가 아파서 벌써 몇 해 전부터 귀를 파지 못했다는 선길임 할머니(81)는 김 원장이 귀에 손을 대자마자 ‘아야야~’ 하며 비명부터 토해낸다. 이곳 마을에는 고령 때문인지 귀가 좋지 않은 할머니들이 많다. 귀의 가려움증을 호소하는 이순임 할머니(83)는 외이도염이 심한 상태로 판별되었다. 한쪽 귀가 들리지 않아 보청기를 맞췄는데 모레 찾으러 간다는 이원임 할머니(81)는 혈압도 꽤 높은 상태다. “선길임, 이순임 할머니 잘 들으세요. 안에서 생긴 병은 금방 안 낫거든요. 꾸준히 치료해야 되니까 나중에 차 보내드릴게요, 병원에 꼭 카드 가지고 오세요.” 원장의 설명을 열심히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할머니들이 꼭 초등학생들 같다.

이곳 마을에서 가장 젊은 축에 든다는 하복수 이장(57)에 따르면 이곳에는 30여 세대 80명이 둥지를 틀고 사는데, 50대 4명, 60대 4명을 빼곤 모두 70~80대 노인들로 평균연령이 무척 높다. 특히 할아버지보다는 할머니들이 훨씬 많다고. 한창 모내기에 바쁜 농번기라 그나마 젊은 축은 무료진료를 해준다는데도 보이지 않고 진료 받으러 온 분들은 거개가 할머니들뿐이다. 진료를 마친 뒤 관절 아픈데 효과가 좋다는 파스 2개씩을 간호사들이 나눠주자 선길임 할머니가 유독 욕심을 부리며 “나는 3개는 줘야하는디~” 하고 말한다.

“보성은 초고령 농촌군에 속하는 지역이라 관절염 등 노인성 질환을 앓는 환자들이 참 많지요. 현장에 와서 보면 해줘야할 게 정말 많아서 안타깝습니다. 병원을 자기 스스로 찾기 어려운 환자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1주일마다 돌아가며 각 마을에 차를 보내 무료진료를 받으러 오시게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료를 끝낸 김 원장과 의료진들은 고마워서 커피라도 대접하겠다는 아주머니들의 호의를 바쁘신 데 얼른 일보시라는 말로 사양하고 집수리 현장을 둘러보기 위해 밖으로 나선다.

할아버지 집에 들어서자 주방에 이어 시꺼멓던 방 안의 벽까지 윤동근 계장과 김건향 간호사의 땀방울과 함께 도배가 거의 마무리되고 있다. 이제 김일운 사원이 들고 온 장판을 깔고 깨끗이 닦아낸 유리창을 끼우고 냉장고를 주방에 다시 들여놓으면 오늘의 봉사는 끝이다. 무료진료에서 받아온 파스를 손에 든 채 도배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최석태 할아버지는 장판까지 새로 깐 방안에 한발을 들여놓으며 기분이 좋으신지 싱글벙글 웃음이 멈추지 않는다. “어이구~ 새집 되았네그랴~.” 하지만 김 원장은 어쩐지 마뜩치 않은 모양, 마지막 잔소리가 이어진다. “안은 괜찮은데 밖의 벽은 아직도 헌집이네… 이왕 하는 김에 밖의 벽하고 문도 페인트칠 좀 하지 그랬나. 어이~ 방 안엔 전깃줄 때문에 창문이 닫히지 않잖아. 바람 들어올라….”

“어유 괜찮여라, 여름이라 그쯤 틈새는 아무 문제없당께” 나무라는 소리에 어쩔 줄 몰라 하던 할아버지는 전에 살던 산 밑 집에서 가져올 물건을 챙겨오겠다며 길을 나선다. 할아버지를 따라 옛집을 가본다. 비가 오면 집안에 흙이 쏟아져 내리고 마당에 물이 흥건히 괴곤 했다는 옛집에서 30년을 산 할아버지. 5년 전 작고한 할머니의 흔적을 갈무리하듯 집안을 둘러보던 할아버지는 물건을 다 꺼내고 나서도 왠지 아쉬운 듯 집을 떠나지 못한다. 문짝이 떨어져나간 부엌문을 다른 나무를 덧대 꼼꼼히 다독이신다.

보성마라톤대회가 열리는 날. 대부분이 보성공설운동장 체육관에서 시작, 미력을 지나 반환점을 돌아오는 5km 코스에 도전할 예정이다. 아산병원에서는 혹시 사고가 나거나 응급처치가 필요한 때를 대비, 풀코스에 따라갈 앰뷸런스를 지원한다.

직원들은 풀코스를 완주하는 저력을 가진 아산병원의 간판 마라토너 오동원 진단검사과 기사장이 오늘이 근무일이라 오지 못했다며 아쉬워한다. 화순 고인돌 마라톤대회에 참석하고 이번이 2번째 참석이라는 총무과 양동택 씨는 작년 스포츠동아리를 창단하고부터 마라톤, 등산, 낚시, 축구, 족구 등의 소모임 활동들이 많아졌다며 이들 모임이 부서간의 화합과 소통에 큰몫을 하고 있다며 웃음짓는다.

동네 곳곳에 차 향기처럼 스며들어 낮은 봉사를 펼치고 마라톤대회 등 구민행사에 일원으로 참여하며 어느덧 보성주민으로 살아가는 아산병원 사람들. 그들의 환한 미소를 뒤로 하고 돌아서는 길. 따끈한 차 한 잔을 기분 좋게 들이마신 뒤, 또 녹차탕에 몸을 담그고 나온 뒤 맛보게 되는 가뿐함이랄까, 그 미소에 기분이 좋아지고 덩달아 몸이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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