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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가 산책 '천년한지'를 만들어온 50년 오윤현

짙푸른 잣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비탈. 그 옆에 허름한 건물 몇 채가 드문드문 서 있다. 그 흔한 간판도 없다. 사람이 마중 나오고 나서야 그것이 4대째 전통 한지를 만드는 장지방(張紙房·경기도 가평군 상천리)임을 알 수 있었다. ‘한지·지장(紙匠)·전통’ 따위의 단어가 입속에서 빙빙 맴돌면서 고개가 갸우뚱했다. 경기도 지정 무형문화재의 작업장치고는 너무 허름했기 때문이다. 이같이 어수선한 곳에서 눈 밝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물론, 일본·유럽 예인들을 매료시키는 종이가 만들어진다니 쉽게 믿기지 않았다.

건물 아래쪽 끝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올랐다. 조심스레 다가가보니 외따로 간이 지붕이 있고, 그 아래 커다란 가마솥이 걸린 아궁이가 있다. 한 꺽다리 노인이 그 아궁이에 굵은 삭정이를 밀어 넣고 있다. 지장 장용훈 씨(75)다. 장씨는 구부정한 허리를 펴더니 기다란 나무 주걱으로 펄펄 끓는 가마솥을 휘휘 저었다. “뭘 그렇게 정성껏 젓느냐”고 묻자, 닥나무를 삶는 중이라고 대꾸했다. 닥나무는 한지 만들기에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요소. 펄펄 끓는 솥 안을 보니 미역 줄기 같은 닥나무 껍질이 뒤엉켜 있다.

아궁이에서 30여m 떨어진 종이 뜨는 작업실도 허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장씨가 한쪽 구석에 놓인 가로세로 2 × 2m쯤 되는 스테인리스 지통 옆에 가서 우뚝 섰다. 음양지(陰陽紙)를 만들기 위한 것. 지통 안의 물은 으깬 닥나무와 끈적거리는 닥풀 뿌리 가루를 넣어서인지 쌀뜨물처럼 뿌옇다. 닥풀 뿌리를 물에 불리면 신기하게도 탕수육 소스 같은 점액이 끈적끈적 흘러나오는데, 그것을 일정량 물에 풀어 넣은 것이다. 닥풀 뿌리는 5월 경 씨앗을 뿌린 뒤, 10월20일 경 서리가 내리기 전에 뽑은 것을 최고로 친다. 장씨는 머리가 아파 작업을 오래 못한다며 “음양지 열 장 정도를 만들어보겠다”라고 말한다.

우선, 그는 공중에 걸린 격자문처럼 생긴‘종이뜨기’에 대나무 발을 얹고, 그것을 물속에 찰랑 담갔다. 그리고 그물질하듯 좌우로 대여섯 번 흔들었다. 종이뜨기를 들어올린 뒤 발을 걷어내고, 그것을 옆에 놓인 판자 위에 엎자 물이 뚝뚝 듣는 누렇고 얇은 종이가 펼쳐졌다. 똑같은 작업을 반복했고, 곧이어 또 한 장의 얇은 종이를 그 위에 포갰다. 두 장을 포갰지만 종이는 삼베처럼 얇았다. 이렇게 만든 음양지는 하루 정도 그늘에 말린 뒤 압축기로 꾹 눌러서 물기를 뺀다. 그리고 다시 열에 말리면 누구라도 탐낼 만한 음양지가 된다.

놀라운 사실은 음양지의 무늬와 질이 대나무 발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점이다. 대나무 발이 촘촘하고, 발 무늬가 정교해야 결 고운 종이가 탄생한다. 그래서 장 씨는 발을 전주 최고의 장인에게 주문해서 받아온다. “단단한 대나무로 만든 발이지만, 자주 사용하는 탓에 3년을 못 넘긴다”라고 장씨는 말했다. 한 장의 종이에 그만큼 많은 정성과 손길이 스민다는 말이다.

장씨의 작업하는 뒷모습을 보니 마치 구도자 같다. 잠시도 한눈팔지 않았고, 종이뜨기로 지통 안의 종이를 뜰 때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정했다. 종이를 뜨고 나서 종이뜨기를 잠시 수평 상태로 유지했는데, 그 순간 그의 몸은 마치 열반에 든 듯 고요했다(장씨는 그 순간 종이뜨기에 올라온 젖은 종이의 무게를 가늠한다고 했다). 그 덕인지 그의 종이는 두께가 일정하다. 종이뜨기에 올라오는 종이의 양이 일정하지 않거나, 종이뜨기의 흔들림이 조금이라도 균형을 잃으면 음양지의 두께가 달라진다. 50년을 해온 일이지만, 가끔 두세 가지 두께의 음양지를 만들 정도로 그 일은 까다롭고 정교하다(일반 숙련공들은 보통 5~6가지 두께의 종이를 만든다).

장씨의 종이에는 하자도 거의 없다. 종이 두 장을 붙여 음양지를 만들 때 그 사이로 공기가 들어가면 종이가 퍼져서 티가 난다. 일반 숙련공들은 200장을 뜨면 50장 정도에서 그같은 일이 벌어진다. 그렇지만 장씨의 실패율은 제로에 가깝다. 종이뜨기를 좌우로 흔들 때의 속도와 균형, 발에 붙은 종이를 다른 종이에 붙일 때의 정확성, 종이뜨기에 올라온 종이의 무게 등을 눈과 손끝에 와 닿는 감으로 조정하기 때문이다. 신중히 종이를 뜨고 그것을 얌전히 펼칠 때 그는 무슨 생각을 할까. 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아무 생각 안 한다. 오로지 실수하지 않으려 집중한다.”

종이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니, 무에서 유를 창출하는 작업이나 다름없다. 그는 그 일을 지난 50여 년간 해왔다. 처음 시작한 곳은 그가 태를 묻은 전남 장성. 그곳에서 잔뼈가 굵던 그는 1950년 아버지로부터 종이 만드는 기술을 배운다. 그의 부친 역시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종이 만들기를 배운 터였다. “당시 내 나이 열일곱, 달리 할 일이 없었다. 가업을 전수하는 일이 유일한 생활이었다”라고 장씨는 돌이켰다.

1950~60년대 그와 그의 부친은 전주·임실 등지에 ‘신일한지’라는 상호를 내걸고 종이를 생산했다. 전쟁 후 종이 소비가 늘어난 터라 수익은 쏠쏠했다. 계약 기간 내에 창호지를 다 못 만들 정도로 주문이 쇄도했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신일한지는 내리막길에 들어선다. 소위 양지(洋紙)로 불리는 반질반질한 백지가 대량 생산된 탓이다. 대단위 아파트가 등장하면서 격자문이 사라지자 창호지 소비도 대폭 감소했다. 많은 한지 가게들이 앞 다투어 문을 닫았다.

위기를 느낀 장씨와 그의 부친은 살길을 찾아 나섰다. 방법은 하나, 여느 한지 생산자와는 다른 상품을 내놓는 것이었다. 그들은 ‘고급 음양지’를 선택했다. 1977년, 질 좋은 닥나무가 많기로 유명한 가평군으로 옮긴 것도 그 때문이다. 기온 차가 큰 탓일까. 정말 닥이 틀렸다. “질이 더 부드러웠다”라고 장씨는 말했다. 그해, 가평에는 이미 종이를 생산하는 집이 여럿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지가 점점 사양길에 접어들자 쉽게 닥나무 삶는 일을 중단했다. 

장씨도 기로에 섰다. 일거리 없는 날이 늘어나면서 ‘전업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고민하는 날이 불어났다. 아내 조정자 씨의 기억에 따르면, 끼니를 걱정할 만큼 고단하고 힘겨운 시기였다. 그러나 그는 마치 바람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서는 풀처럼 일어섰다. 그리고 호황 때보다 더 부지런히 일했다. 새벽부터 어두운 밤까지 닥나무를 삶고, 껍질을 벗기고, 그것을 으깨고, 종이뜨기를 좌우로 흔드는 일을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행운이 찾아왔다. 서울 인사동을 찾은 일본인들이 그의 음양지에 홀딱 반한 것이다. ‘지천년 견오백(紙千年 絹五百)’이라고, 일본인들은 그의 종이에서 그 같은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 덕에 그는 일본에서 자기 이름을 앞세운 종이전(展)을 열었고, 이후 판매량이 부쩍 늘었다. 한 일본 사업가는 그에게 아예 일본에 와서 작업하라며 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종이를 뜰 때처럼 결코 한눈팔지 않았다. 대신 1992년 신일한지 상호를 ‘장지방(張紙房)’으로 바꾸었다. 민화가 나정태 선생이 ‘장씨 가족이 종이 만드는 공방’이라는 뜻으로 지어준 이름이었다. 이후 그의 종이는 더 많은 사람에게 회자되었고, 2005년에는 독일· 프랑스 문화계 인사들에게까지 자신의 종이를 선보일 수 있었다.

현재 가업은 두 아들이 잇고 있다. 장남 성우 씨는 15년째 아버지로부터 종이 제조 기술을 배우고 있다. 인사동 쌈지길에는 장씨와 아들들이 만든 한지를 파는 ‘장지방’이 있다. 물론 질 좋은 종이를 얻으려 찾는 사람이 적지 않다.

또 얼마 전, 장씨 부자는 대나무 종이를 재현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는 대나무 종이가 고문서 속에서만 존재했지, 실재하지는 않았다. 비법 전수가 뚝 끊겨 지방(紙房)에서조차 사라버렸던 것(반면, 중국에서는 아직도 대나무 종이가 인기다). 장씨는 옛 문헌을 뒤져 대나무 종이가 우리나라에서도 실재했음을 확인한 뒤, 닥나무 종이 제조법을 이용해 대나무 종이를 만들어보았다. 그러나 섬유질이 덜 분해된 탓일까. 완성된 종이에 잡티가 남아 대나무 종이 실용화는 ‘절반의 성공’에 머물렀다.

장씨는 건강이 회복되면 새로운 전통 종이 재현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요즘 그의 건강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다. 나이도 나이지만, 두어 번 넘어지고 쓰러진 탓에 두통이 심하다. 다행스러운 점은 그래도 그의 손놀림이 예전처럼 섬세하고 정교하다는 점이다. 게다가 부활하려는 의지도 단단하다. 인터뷰를 끝내고 맞잡은 그의 기다란 손가락을 통해 그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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