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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가 산책 무형문화재 악기장 임선빈 씨 유은선

설날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던 정월 초순. 경기도 무형문화재 악기장(북메우기) 제30호 기능보유자 임선빈 명인의 작업실을 찾았다. 장엄한 소리를 만들어내는 북. 그 북이 탄생하는 공방은 명인의 작업실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소탈한 모습이었다.

“저는 욕심 없이 살려고 합니다. 밥 세 끼 먹고 살면 되지…. 사람은 어떻게 사는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다보니 가끔 돈도 못 벌고 지내온 시간이 한스러울 때도 있기는 하지만, 앞으로도 북장이로 살아 온 인생을 후회하진 않을 겁니다.”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아서 다리를 절고, 평생 북을 두드리며 사느라 귀가 안 들리는 그는 다소 큰 목소리로 지나온 시간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지독히도 가난했던 가족은 그가 11살 때 뿔뿔이 흩어졌다. 이후 살기 위해 구걸을 하며 이곳저곳을 떠돌던 중 우연히 스승 고(故) 황용옥 명인을 만나면서 ‘북 밥’을 먹게 됐다.

초등학교 중퇴가 학력의 전부인 그였지만, 타고난 명석함과 눈썰미, 손재주는 스승을 감복시키기에 충분했고, “너는 북 만드는 걸 배워야 평생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으면서 오로지 북 만들기에만 전념하였다. 멋진 북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만이 살 길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눈 뜨면 공장, 해 지면 또 공장. 그렇게 세상과는 담 쌓고 오로지 북만 만들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북에 관해선 동서남북을 다 배울 수 있었지요.”

그런데 그의 실력이 빠르게 늘수록, 북을 만드는 다른 이들의 시기가 높아졌다. 스승은 좋은 재료를 구하기 위해서 한 번 집을 나서면 보름씩 비우곤 하였는데, 그럴 때면 스승은 어린 그에게 공장의 운영을 맡겼고 그를 향한 시기는 이때 더욱 고조되었다.

“욕도 먹고, 매도 맞고, 막걸리 받아다주면서 살았습니다. 북 만드는 것뿐 아니라 가시덩굴에서 헤쳐 나올 수 있는 인내력도 그때 배운 셈이지요. 그런데 그걸 스승님이 돌아가신 후에나 깨달았으니….”

그가 열여덟 살 되던 해, 스승이 타계했다. 일하던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의 몫으로 스승의 북을 가지고 공장을 떠났다. 가족 없이 혈혈단신으로 스승의 그늘에서만 살았던 그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좌절의 시간이었다. 결국 그는 머리 깎고 절에 들어가겠다며 대구 팔공산에 있는 파계사를 찾았다. 그런데 그곳에서
또 한 번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됐다.

“한 쪽 다리를 질질 끌고 파계사로 올라가는데, 입구에 딱하니 용이 보이더라고요. 그 용이 ‘너는 여기 올 놈이 아니다’라고 호통을 치는 겁니다.”

다음 날, 용 그림 한 장을 가지고 하산한 그는 단청으로 유명한 김종문(두 번째 스승)의 집에 찾아갔다. 1970년대 초반에는 주로 꽃이나 단청들을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단청을 배운 그는 북에 소리만큼이나 위엄 있는 용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새로운 스승을 찾아 나섰고, 세 번째 만난 스승은 소리북을 잘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고(故) 박일호 명인이다.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깨닫는 그였으니, 스승과의 작업은 수월했다.

“소리 북 만드는 것이 보기엔 간단하고 단순해 보이지만 가장 어려운 작업이에요. 창(唱) 하는 사람의 소리를 잡아줘야 하거든요. 북소리가 크면 소리를 못 잡으니, 너무 세도 안 되고….”

엄숙하고도 황홀한 순간
그렇게 북 만들기에 심취해서 살던 중에도 세월은 흘렸고, 그도 운명 같은 천생배필을 만나게 된다.

“26년 전, 주머니에 돈 10원 하나 없이 결혼했어요. 집사람도 보청기를 끼는데, 수준에 맞게 살면 되고, 북 만들어서 여자 하나 못 먹여 살리겠나 싶었습니다. 당시가 마침 국회의원 선거철이어서 운 좋게 합동결혼식을 했죠. 손님 접대할 음식도 없고…. 아내에게 참 미안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약속한 것이 팔순 잔치 때 다시 결혼하자는 것이었지요. 꼭 지킬 겁니다.”

부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또 아들을 위해 하루도 쉬지 않고 북을 만들었다. 가죽을 다루는 일은 시간과의 싸움이라 한 번 작품을 시작하면 가죽 옆에서만 꼬박 있어야 한다고. 특히 사찰에 주로 사용되는 법고를 만들 경우, 먼저 머리를 깎고 관음보살을 찾고, 아침저녁 목욕재계를 하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한다. “욕심을 버리고 자만심을 버려라. 그래야 맑고 깨끗한 소리가 나온다.”던 스승의 말씀을 떠올리면서.

북이 완성될 즈음, 조용한 저녁시간에 북의 생명인 소리 잡는 일을 한다. 귀가 아닌 손으로. 보청기도 빼고 오로지 손끝을 통해서 가슴으로 전해오는 소리를 들으며 북소리를 잡는데, 그는 그 순간이 가장 엄숙하면서도 황홀한 시간이라고 한다. 가슴 벅찬 이 순간 때문에 그가 북 만들기를 놓지 못하는 게 아닐까 싶다.

아들에게 전승시키고픈 꿈
손이 부르트고, 청력이 나빠지고, 지독한 가죽냄새와 싸우다 후각을 잃었다. 하지만 스승으로부터 배운 그대로를 전해야 한다는 정신과 올 곧은 전통을 잇겠다는 일념이 있었기에 그의 ‘북장이’ 생활은 가능했다.

“예전엔 제가 지나가면 동네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면서 ‘저기 북장이 지나간다’고 말할 정도로 이 직업(북 만드는 일)이 천시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세상 좋아져서 무형문화재가 되었으니 여한이 없어요. 점차 북 만드는 사람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죽으면 다 끝나는 거지요. 숭례문 복원? 아무 의미 없는 일입니다. 옛것이 사라졌는데, 모방해서 새로 만든들, 그것이 진짭니까? 북도 북을 만드는 사람도 마찬가집니다. 죽는 날까지 북장이로서 떳떳하게,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고 싶은데, 배우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걱정입니다. 아들 녀석을 설득시켜서라도 북 만드는 법은 물려 줄 생각이고, 저 같은 장애인들에게 가르쳐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시간이 좀 더 걸릴 뿐 그들이 새로운 희망이 될 수도 있거든요.”

자신은 먹고 살기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길이지만, 자신과 같은 장애인들에게 기회를 주고 사명감과 자부심을 주고 싶다는 그에게서 북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느껴진다. 한때 도마 위에 올려졌던 문화재 전승 과정은 서로 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서 시끄러워진 것이지만, 북 만드는 기능을 배우려는 사람은 없는 현실. 수공으로 만드는 ‘진짜 북’이 아닌 공장에서 기계로 찍어 대량생산되는 ‘제품’, 그리고 한 술 더 떠서 중국에서 수입해 오는 북이 있는 게 현실이다. 혼이 들어있어야 하는 북이 이제 상품으로서의 가치로 이야기 되는 게 안타까워서라도, 디자인을 전공하는 아들에게 반드시 전승시키고 싶다.

그는 요즘 평일에는 북을 만드는 다른 공방에 출근하고 주말을 이용해서 작품을 만든다. 경기도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서 받는 지원금은 월 80만원. 일 년에 두 번 작품 전시회를 해야 하는데, 지원금으로는 생활비는커녕 작품 재료비도 안 되기에 다른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게다가 힘겹게 작품을 만들어서 전시회를 하고 나면 이후에 보관할 장소가 없어 북을 폐기처분해야 한다.

북은 우리에겐 너무도 친숙한 악기이다. 아니, 어쩌면 악기 이상의 의미인지 모른다. 조선시대에는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왕이 직접 해결하기 위해 설치한 신문고(申聞鼓)가 있었고, 나라와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며 비극의 종말을 맞은 호동 왕자의 자명고(自鳴鼓)도 있었다. 어디 이뿐인가? 1980년대 민주화항쟁의 자리에 늘 굳건하게 우리를 지켜주던 풍물북, 수많은 군중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강하게 어필해주던 시위현장의 북. 우리네 삶 속에는 소리와 모습은 달라도 늘 곁에서 묵묵히 우리를 대변하던 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퓨전이라는 미명하에 점차 진정한 북소리가 사라지고 있다. 북의 두드림은 의식을 갖춰놓고 이뤄져야 한다. 선율은 없지만 북은 우리음악의 척추와 같은 악기이기 때문이다.

※ 임선빈(1951년생)은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30호 악기장(북메우기) 기능보유자로 현재 안양시 석수동에서 공방을 운영하고 있다. 안양시청에 있는 대고와 1998년 제주 전국체전 기념행사에 사용하고 제주시에 기증 된 용고(울림판 지름 : 223㎝, 움통 길이 : 248㎝의 동양 최대 크기)를 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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