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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편지 부끄러운 어른의 고백 함인희

몸 갈피갈피 스며드는 봄바람을 맞으면서도 가슴 가득 따스함이 밀려옴은 지난 해 연말 아산사회복지재단에서 만났던 ‘장한 꿈나무’들 덕분이다. 예기치 않았던 만남은 아산재단에서 주관하는 장학사업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그 날은 마침 ‘시설’에서 성장하여 대학에 입학한 1학년생을 대상으로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 전액을 지원해주는 장학생 선발이 진행되었다. 

경기도 일원에서부터 경남 창원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지의 보호시설에서 자란 19, 20살 대학생 31명이 지원을 했는데, 녀석들이 시설로 들어가게 된 사연을 듣고 보니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의 과정이 그대로 한 편의 드라마요 한 권의 소설이었다.

부모 이혼 직후 아빠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엄마는 재혼을 하여 친할머니께 잠시 의탁했다 보호시설에 맡겨진 친구, 아빠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초등학교 시절 가출한 이후 지금은 부모 얼굴조차 기억에 가물가물한 친구,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입양되었다 양부모의 불행으로 파양(破養)된 이후 오갈 데 없어 시설에 들어온 친구, 16살에 미혼모가 된 엄마가 딸 둘을 모두 시설에 맡겨 자매가 함께 시설에서 성장한 친구, 심지어 부모 얼굴은 물론이요 언제 태어났는지조차 알 길이 없어 시설 원장님께서 이름도 지어주시고 생일도 마련해주시어 ‘일가창립(一家創立)’에 이른 친구 등, 이들이 그 날의 주인공이었다.
기막힌 사연들을 하나하나 들으면서 이 친구들 얼굴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나, 혹 질문을 잘못하여 녀석들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는 건 아닐까 막막했던 것도 잠시,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들의 얼굴에서 남달리 아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음을 읽어내는 건 불가능했다. 오히려 불행의 덫을 헤쳐 나온 만큼 자신감이 넘쳤고 당당했으며, 자신을 마다않고 거두어준 시설의 원장님과 사회복지사 및 자원봉사자들께 감사하는 만큼 삶을 향한 열정과 진지함이 보기 좋게 묻어나왔다.

덕분에 면접을 진행해 가는 동안 못난 어른으로서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꼈고, 자신의 불행을 승화시킨 대견한 젊은이들이 있기에 우린 희망을 간직해도 좋으리란 위로를 받았다. 이혼율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결국 우리 자녀들이 무책임한 이혼의 최대 희생자가 되어버린 현실 앞에선 절로 반성의 마음이 일었다.

어린 시절엔 자신을 버린 부모를 원망도 해보고 반항도 해보았지만,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거나 더욱 딱한 상황에 놓인 선배, 동료, 후배들을 만나게 되면서 자신의 상황을 객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는 녀석, 친구들에게 별 거리낌 없이 자신이 시설에서 자랐음을 말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한 자신감을 갖춘 녀석, 남의 집 앞에 버려진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돌아오면서 아기의 심장박동을 들으며 ‘내가 네 아픔을 감싸주리라’ 다짐했다는 녀석, 대학에선 아동복지를 전공하여 자신과 같은 아픔을 겪는 아이들을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다는 성숙함을 간직한 녀석, 자신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 초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을 닮고자 각고의 노력 끝에 서울교대에 합격한 녀석. 이들을 향해 미안함 가득한 어른이 해줄 수 있는 이야기라곤 “여러분 정말 훌륭합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꼭 희망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뿐이었다.    

면접을 끝낸 후 아산재단 실장님으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인 즉, 예전 시설에선 실업계 고등학교까지 진학시키는 것으로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했으나 최근 들어 시설 출신으로 대학에 진학하는 율이 상승 추세에 있다고 한다. 시설에서 누군가 대학생이 되면 훌륭한 역할 모델이 되어 주위에 두루 좋은 자극제가 되기에, 자칫 비행이나 범죄에 빠져들기 쉬운 이들에게 교육기회를 제공해주는 건 사회적 차원에서도 최선의 방안이란 의견을 덧붙이셨다.

“지원자 모두에게 아산재단에서 장학금을 지급해주셨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희망을 전하고 보니, 무책임한 어른들을 한없이 부끄럽게 했던 녀석들을 10년 후 다시 만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었음 좋겠다는 바람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나의 책임을 넘어선 불행이 대(代)를 이어 세습되지 않도록 희망의 불씨를 피운 녀석들이, 자신의 몫을 다하는 당당한 사회인으로서 진정 꿈을 이룰 수 있는 ‘애프터서비스’(?) 또한 아산재단에서 살뜰히 챙겨주길 당부 드리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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