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넘고 물 건너 산을 닮은 어진 사람들, 마음도 웃고 몸도 웃고 박현숙



17년 동안 오지를 돌며 진료봉사를 해온 까닭에 바쁜 산골마을의 속내를 잘 아는 서울아산병원 순회봉사팀은 도착하자마자 숨 돌릴 틈도 없이 움직였다. 진료실, 투약·검사실, 초음파실을 뚝딱 차렸다.

푸른 에너지를 뿜어내는 근육질 젊음이 충만한 산들이 해발 500m 산간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그 산자락에 깃들어 사는 이들은 거개가 백발성성한 노인들이다. 경북 문경시 산북면 가좌리. 산골 노인들의 평화로운 표정에서 인자요산(仁者樂山)을 떠올린다. 세월 따라 하얗게 빛바랬지만 산처럼 깊고 고요하며 어진 얼굴이다.

고도가 높고 일교차가 큰 산간마을에서는 예로부터 사과가 잘 됐다. 싹을 틔우고 푸르게 자라고 알차게 열매 맺고 모두 버리고 겨울을 나면 다시금 싹을 틔우는 사과나무의 나이테는 농부의 이마에도 아로새겨졌다. 43가구에 80명 남짓이 주민의 전부이니 홀로 사는 노인도 많다. 한 마을이라도 골짜기를 넘어야 이웃을 만날 수 있는 집이 허다한데, 산막이라 불리는 마을 변두리에는 세 가구에 세 명의 노인만이 고적하게 살아가고 있다.

산골마을에 반가운 손님 오던 날

골골이 둥지 틀고 서로 벗하며 살아온 이웃들이 이른 아침부터 삼삼오오 마을 초입에 자리한 마을회관으로 모였다. 유난스레 지저귀는 제비들도 오늘이 특별한 날임을 알아차린 듯하다.

“서울 큰 병원서 무료진료를 나와 준다니 참 고마운 일이야. 내 이 허리 병이 고질인데 의사 선생님한테 오늘 속 시원하게 물어봐야겠어.” 마을 토박이 진웅 할아버지(65)는 오늘도 새벽 5시에 일어나 사과나무 즐비한 산자락을 휘뚜루 둘러보고 바삐 마을회관으로 내려왔다. ‘하늘 농사가 반농사’라는 사과농사이지만 사과나무를 건사하려면 농부의 손이 녹아나야 한다. 특히나 땡볕 아래서 일일이 꽃이며 열매를 솎아주는 이즈음은 밥 때를 거를 정도로 바쁘다.

17년 동안 오지를 돌며 진료봉사를 해온 까닭에 바쁜 산골마을의 속내를 잘 아는 서울아산병원 순회봉사팀은 도착하자마자 숨 돌릴 틈도 없이 움직였다. 진료실, 투약·검사실, 초음파실을 뚝딱 차렸다. 다만 비포장에 높은 산길이라 X레이 촬영, 심전도 검사 등의 장비를 갖춘 차량은 마을회관까지 오지 못하고 마을 입구에 자리했다. 아산병원 외과전문의 김형태 교수를 비롯한 방사선 전문의 조경식 교수, 이순선 간호사와 오현진 간호사, 임상병리사, 방사선사는 이미 텔레비전을 통해 익숙한 얼굴들이다.

흰 가운을 입은 의료진들 사이에서 반가운 얼굴들이 인사를 한다. 개그맨 김제동 씨와 이윤석 씨, 가수 김흥국 씨다. 김점님 할머니(64)는 텔레비전으로만 보던 이들을 직접 만났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가보다. “세상에, 이렇게 만날 수 있을 줄 몰랐네! 아이고 이렇게 가까이 보니 너무 이쁩니더!”하며 아들 같고 손자 같은 이들의 손을 하염없이 쓰다듬는다. 이렇게 반가운 얼굴들이 있으니 기다림이 지루하지 않다. 옛날 만담꾼처럼 박장대소하게 만드는 세 연예인들의 재치는 노인들을 사로잡았다. 조용하던 산골마을은 금세 잔치집처럼 흥이 났다.

내 몸의 병에서 인생을 배운다

혈압과 피검사를 하고 초음파 검사를 마친 뒤 CT를 찍으러 마을회관을 나온 김각규 할아버지(85)는 입이 귀에 걸렸다. “의사 선상님들이 아주 그만이야. 참 자상하게 일러주네. 내 허리, 다리를 어떻게 간수해야 하는지 알았어”라고 흐뭇해하신다. 당신의 의무기록 차트를 품에 안고 마을 입구의 병원차량으로 향하는 할아버지 발걸음에 힘이 실린다.

신순남 할머니(60)는 김형태 교수의 얘기에 연신 고개를 조아린다. “할머니, 세상에는 좋아서 하는 일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좋아하지 않아도 반드시 해야 하는 일들이 있어요. 그렇죠? 할머니께는 물 마시는 일이 그런 거예요. 내가 내 몸을 잘 다스리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이죠. 우리네 인생사에 해야 할 일이 있잖아요.” “예, 압니더, 물. 마셔야지 하면서도 자꾸 잊어버리고….” 몇 차례 신장의 결석을 제거하신 병력이 있는 할머니는 평소 물을 많이 먹어야 하는데도 그게 잘 안되셨던 모양이다. 김 교수의 부드러우나 단호한 한 마디 한 마디에 할머니는 몸 둘 바를 몰라 하신다. 나보다는 자식과 남편을 먼저 챙기는 것이 자연스런 우리 어머니들에게는 물을 챙겨먹는 일조차 우세스럽게 여겨진다는 것을 잘 아는 김형태 교수는 이런 노인들을 볼 때마다 부모님을 뵙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한다.

박순례 할머니(70)도 김형태 교수로부터 들은 말이 가슴에 새겨진 듯하다. 다리에 힘이 없어 바깥출입을 잘 하지 않는다는 할머니 말에 김 교수는 한 마디 한 마디 정성을 다해 당부했다. “할머니, 농기계 쓰지 않고 놔두면 어떻게 돼요? 자꾸 써야 길이 들고 녹이 슬지 않잖아요. 다리도 그래요. 조금씩 걸으세요. 노력하면서 하루하루 나아져야 하는 게 삶이잖아요. 안 그래요?”

잠시 불을 끄고 캄캄한 방에서 의사 선생님이 배에 무언가를 대고 문지른 것 같은데 어느새 뱃속 장기의 사진이 찍혀 나오자 백구성 할아버지(75)는 다시 한번 좋아진 세상을 실감했다. 할아버지에게 조경식 교수의 설명은 그대로 놀라움이었다. “초음파검사로는 손쉽고 빠르게 하복부 검사를 할 수 있습니다. 간, 췌장, 콩팥, 방광, 전립선 등 하복부 장기의 상태를 바로 판독할 수 있죠. 이게 어르신 사진입니다.”

준구야, 사랑해!

마을 사람들의 진료는 늦은 저녁 무렵에야 끝이 났다. 의료진은 주민들의 건강검진 결과를 토대로 회의에 들어갔다. 조속한 수술이나 후속치료가 필요한 사람을 선정하기 위한 회의다. 일곱 살인데도 아직 말을 못하고 자해를 하기도 하며 자폐증세를 보이는 준구를 정밀검진하고 지속적인 치료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그날 밤 순회봉사단은 준구 아빠 변공철 씨(42)에게 이를 알리고 다음 주부터 정밀검진을 시작했다. 서울아산병원에서 열흘정도 이루어진 정밀검사. MRI·CT 검사 같이 뇌의 구조와 기능의 이상 유무를 살피는 검사 등과 함께 다양한 심리검사, 언어검사 등이 이루어졌다. 바쁜 농사철이지만 아빠는 검사기간 내내 아이 곁을 지켰다. 지난 해 아내와 헤어진 뒤 세 아이를 혼자 키워온 변공철 씨는 점촌 시내 복지관 근처에 따로 방을 얻어 준구와 정기적으로 머무르면서 언어·놀이 치료를 받으러 다녔었다고 한다. “애기가 뭐가 문제인지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그저 말문이나 트였으면 하는 심정으로 다녔는데 이런 기회가 생겨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의사선생님이 아이가 한창 말을 배울 시기에 적절한 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 같다고 하셨는데 연년생 동생과 함께 키우느라 준구는 텔레비전이나 비디오를 틀어주고 혼자 놀게 하기가 일쑤였어요.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준구는 병원생활에 적응을 잘 하고 검사도 잘 받았다. 말은 없지만 준구는 공룡과 말, 무엇보다 사람을 좋아하는 따뜻한 심성을 가졌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어 잡고 작은 가슴으로 꼭 안아주기도 한다. 마취 주사를 맞을 때도 담대해서 간호사들을 놀라게 한 준구다.

아산병원 순회봉사팀에서는 각 분야의 정밀검진 결과가 나오는 대로 아산병원 및 지역 복지관과 연계하여 준구에게 적절한 치료를 계속 지원해나가기로 했다.

아산병원 봉사팀과 마을 어르신들, 그리고 자신의 목숨보다 더 준구를 사랑하는 아빠가 준구 곁에 함께 할 것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거름은 여린 싹 준구를 튼실한 나무로 지켜줄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