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풍속 되살릴 만한 우리 놀이 이철수



“저리 가! 여긴 내 방이야.”
동생을 문 밖으로 왈칵 밀어내고 방문을 안으로 잠근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다시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린다.
“녀석들아, 형제라고는 달랑 너희 둘인데 어찌 그 모양이고.” 꾸중마저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게 요즘 아이들이다.
이 때쯤이면 손을 호호 불어가며 톱과 망치를 들고 동생과 함께 썰매를 만들었었는데…. 그런 가슴으로 보기에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다. 우리 아이들이 그려내는 그림이 인간미를 듬뿍 풍기며 서정적으로 살아 움직였으면 정말 멋질 텐데.
우리 민족이 그렇게나 즐겨 쓰던 ‘우리’라는 말이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있어 지금 당장 붙들지 않으면 영영 사라질 위기다. 그게 우리의 전래놀이가 잊혀져 가는 시기와 일치한다면 그 문제점이 짐작되고도 남는다.
우리 식구, 우리 집, 우리 마을, 우리나라는 물론 어른들은 자신의 배우자마저도 내 남편이 아닌 우리 남편, 우리 마누라라는 식으로 표현했었다. 이는 우리 놀이를 즐기며 놀던 유년 시절의 또래문화에 젖은 관습 때문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이건 내 거야!’가 더 강하게 작용하면서 더불어 사는 참 맛이 퇴색되기 시작했다. 멋진 세상을 위해 ‘우리’에게 기를 한껏 불어넣자.

누가 사과를 더 예쁘게 깎을까?
누가 사과를 더 예쁘게 깎을까, 대회를 열면? 사과는 물론 연필마저도 못 깎는 아이들에겐 너무 부담스러울 것이다. 편의 위주에 길들여진 아이들과 어른들의 핑계가 아이들의 손에서 칼을 빼앗았다. 유년기 아이들의 손에 쥔 칼이나 가위는 좋은 선생님인데도 말이다. 그것들은 아이들에게 손 기능을 연마하는 욕구를 불어넣고 또 실행케 한다. 조금 귀찮지만, 뺏은 칼을 아이들 손에 되돌려 주는 것이 우리 기성세대의 몫이 아닐까. 이렇게 해서 손끝이 펄펄 되살아 날 때, 바로 우리 민족의 우수성이 세계 속에서 빛을 발할 것이다.

이것이 나를 30년 교직 생활에서 ‘전래놀이쟁이’로 탈바꿈시킨 한 원인이기도 하다. 수공력이 탁월한 ‘우리’들이 서로 어울려 더불어 사는 세상이 바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아주 윤택한 유토피아다.
그래서 권한다. ‘제발 사과를, 연필을 깎게 합시다.’
어떤 학자가 ‘손은 제2의 뇌’라고 했다. 즉 손놀림을 두뇌 발달의 촉진제라 했다. 빼어난 기능의 수공력은 항상 창의력을 동반한다는 건 이미 보편화된 사실이다. 그러나 키보드를 날렵하게 다루는 손놀림은 사고가 없는 정말 기계적인 기능이라 예외가 된다. 한 두 시간을 움직여도 칼로 사과 한 개를 깎는 것만 못하다. 그러면서 아이들을 자꾸만 ‘나 홀로’라는 그늘 속으로 끌어들이기만 한다.
우리놀이는 놀잇감도 스스로 만들고 또 배타적인 외래놀이에 비해 사람을 불러들이는 인간 친화적 놀이다. 그래서 또래를 늘릴수록 재미가 더해지기 마련이다.



나처럼 예쁜 추억을 간직했으면
정년퇴직 10여 년 앞서 교직에서 명예퇴직을 한 나에게 다들 첫마디가 ‘왜?’였다. 그리고 내 대답은 ‘놀고 싶어서’였다.
내 소싯적 추억이 너무 아름다웠다. 그냥 가슴에 묻어두기에는 아까웠다. 우리 아이들에게 나의 이런 감정을 그대로 심어 그 아이들의 멋진 추억에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이라 여겨졌다. ‘정말 멋진 추억을 아이들 가슴에 담아주자’.
‘옛날에…’하고 시작되는 나름대로의 멋진 추억은 현재의 고뿔을 풀어주는 따뜻한 아랫목이 되기도 한다. 우리 아이에게 이 다음에 아랫목이 될 그런 추억은? 한 번쯤 짚어봐야 한다. 여유시간을 음습한 환경 속에서 보내는 것보다 또래들끼리 우리 놀이로 어울려 뒹굴다보면 그게 이담에 멋진 추억이 되는 거다.
우리의 전래놀이는 나에 앞서 우리를 더 소중히 여기게 하며 그래서 더불어 사는 즐거움을 만끽케 하는 매체가 된다.
땀을 훔치며 배를 쥐고 깔깔거리면서 제기를 차는 아이들. 제기 차기는 혼자놀이로도 재미있지만 둘, 셋 또래의 수가 늘수록 그 재미가 배가된다. 그러면서 또래들이 꼭 나만큼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나 혼자 즐기기 위해 심지어는 동생까지도 밀어내야 하는 외래 놀이와는 너무 대조적이다. 또 놀잇감을 돈으로만 구입한다는 개념에서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하며 놀이 그 자체도 물림된 유전인자처럼 몸에 아주 쉽게 익혀진다.

아이를 아이스럽게 하는 놀이들
요즘 아이들의 물리적, 인적 스트레스는 어른을 능가한다. 발원지가 한두 곳이 아닌 진동이 아이들을 마구 뒤흔들어 성격 형성에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한다. 아이들은 ‘아이스러운’ 사고 속에서 ‘아이스럽게’ 자라게 해야 한다. 어른들은 이런 분위기의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
칼과 가위를 쥔 손에 수수깡을 나눠주며 그 아이의 세계를 엿보자. 수수깡은 아이들이 아이들의 세상을 만드는 데 매우 좋은 건축자재요, 다양하고 재밌는 물건들의 재료가 된다.
‘수수깡 안경’ 속에 그려지는 세상은 어느 사람의 눈에도 그저 아홉 살스럽기만하다. 그 속에서 잠자리, 나비처럼 날다가도 퍼뜩 야생마가 되어 넓은 초원을 달리기도 하는 게 우리 아이들이다. 엄마와 아이가, 아빠와 아이가 함께 쓴 수수깡 안경. 혹은 형제가, 자매가 함께 쓴 수수깡 안경. 서로 마주보는 상상만 해도 수수깡 안경테처럼 둥근 웃음이 절로 벙글어진다.
둥근 즐거움으로는 ‘도랑테’도 빼놓을 수 없다. 도랑테는 굴렁쇠보다 훨씬 이전의 말이다. 우리 생활용품 중에는 작은 나무 조각들을 하나하나 맞대고 이것들이 흩어지지 않게 꽁꽁 테를 둘러 죈 것들이 많다. 옛날의 생활용기들은 대부분이 이런 형태였다. 이것을 벗겨내 돌리며 놀았는데 돌아가는 테라는 의미로 이를 도랑테라 했다. 테는 정말 ‘나’를 ‘우리’이게 하는 매체다. 도랑테를 굴리며 뜀박질 하는 아이, 왜 꼭 옛 기억 속에만 가두어두려 하는가. 마음만 먹으면 오늘 우리 아이들에게도 도랑테를 굴리게 할 수 있다.



온 식구가 제기를 차자
제기는 행운이다. 김유신의 누이인 문희가 왕비가 된 인연도 제기 때문이었다. 온 식구가 제기로 행운을 얻자. 직접 만들어 아이들의 수공력을 늘리고 식구들이 함께 즐기면서 건강을 챙기자. 하얀 실내화를 신고 식구 모두가 우선 거실에서 기본을 배우고 그리고는 밖으로 진출하자.
제기 만들기는, 공구점이나 철물점에서 동전 크기의 와셔를 우선 구한다. 자주 다니는 카 센터에 부탁을 해도 된다. 문방구점에서 얇은 종이(미농지)를 구입해 쉽게(5분 이내) 만들 수 있다. 미농지는 가위 없이 손으로 찢어 갈기를 만들지만 한지인 경우는 가위질로 갈기를 만든다.
혼자서 목표를 정하고 차는 놀이도 좋지만 식구대로 게임을 즐기면 아이들이 더 좋아한다. 그게 또래들끼리라면 바로 금상첨화다.
엄마가 20~30개 정도 찰 수 있는 능력이 되었을 때 뱃살을 만져보면 정말 놀랄 거다. 아이들은 몸의 균형이 알맞게 잡히며 순발력이 발달하면서 동작이 엄청 민첩해진다. 갖가지 색깔의 종이를 이용해 예쁜 제기 만들기 대회도 하고 그러면서 이웃에 선물까지 한다면 그 효과가 배가 될 것이다. 진정 권하고 싶어서, 나는 체험 교육의 필수 놀이로 꼭 제기를 챙긴다. 다들 좋은 행운이 깃들게 염원하며.

골목에서 자치기를 하며 운동장에서 고생받기 놀이를 하는 아이들로 세상이 시끌벅적 하면 그게 바로 사람 사는 세상의 기본이 되며 서광이 될 것이다. 올바른 2세 교육이 우리의 국력을 신장시키는 시금석이 된다. 국민 모두가 우리 놀이에 더한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애절한 바람이다.

경남 함양 안의 중학교에서 과학교사로 30년 가까이 재직해 온 이철수 님은 명예퇴직 후 '다송헌(多松軒)'이라는 전래놀이를 공방에 짓고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놀이 백가지'란 책을 썼으며 전래놀이를 재현하는 일에 힘쓰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