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회아산상수상 월드비전 한국 박인숙



사랑이 필요한 곳으로 달려가는 월드비전

지구촌이 연말 분위기에 들떠 있던 2004년 12월 26일, 인도네시아와 태국 인도 스리랑카 등 서남아시아 해안지대로 어마어마한 해일이 몰아 닥쳤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가족은 물론 집과 논밭 등 생계의 기반을 한 순간에 잃고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월드비전은 그 곳으로 달려갔다. 먼저 깨끗한 물과 비상식량을 전하는 한편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고, 임시숙소도 마련해 최소한의 생존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왔다. 급한 불을 끈 다음에는 수도와 도로복구, 어린이 쉼터, 뗏목배와 대형선박 지원 등을 통해 주민들이 다시 생업에 나설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무서운 쓰나미’의 기억은 점차 엷어져 가지만 현지 구호사업은 앞으로도 3~5년을 내다보며 계속 이어지는 중이다. 대규모 자연재해와 전쟁 등으로 생명에 위협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즉각적인 구호 서비스를 제공해 위기 극복을 돕고, 상황이 진정되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다각적인 복구와 개발사업을 진행하는 ‘사랑의 구호센터’가 바로 월드비전이다.

얼마 전 서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에서 서울 여의도 월드비전 한국 사무실로 반가운 소식이 전해져 왔다. 정부군과 혁명군이 내전을 치르는 가운데 어린 소년들에게까지 총칼을 내줘 무법이 판을 쳤던 시에라리온. 2002년 월드비전 한국팀이 현지를 찾았을 때 눈물조차 마른 무표정한 얼굴로 상처투성이 삶을 보여줬던 레베카가, 자신의 신발 가게 앞에서 환히 웃는 사진과 함께 “텃밭도 마련해 잘 지내고 있다”는 전갈을 보낸 것이다.

열세 살 때 엄마 아빠의 목이 잘려나가는 것을 목격하고, 반군에게 윤간을 당한 뒤 반군 대장의 다섯 번째 아내가 돼야 했던 레베카. 5년 뒤 이번엔 정부군에 몸을 빼앗겨 열여덟 나이에 두 아이를 낳은 채 희망 없이 살던 그녀가 환히 웃을 수 있게 된 것은 ‘마담 김 프로젝트’ 덕분이다. 91년부터 월드비전 한국 친선대사로 아낌없는 사랑을 전하고 있는 탤런트 김혜자 씨가 내놓은 기금을 바탕으로 내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엄청난 육체·정신적 상처를 입은 청소년들에게 재활과 직업교육을 진행하는 마담 김 프로젝트. 재봉틀 기술이나 장사에 필요한 기초교육을 한 다음 종자돈을 대주는 이 프로젝트 덕분에 많은 ‘레베카’들이 새 삶을 살고 있다. 끊임없는 종족분쟁과 내전 등 불안한 정치상황, 가뭄과 에이즈로 숱한 목숨들이 속절없이 스러져가는 아프리카 곳곳에서도 월드비전은 귀한 생명을 보호하며 자립을 돕고 있다.

이 겨울, 월드비전이 가장 바쁘게 움직이는 곳은 파키스탄이다. 지난 10월 엄청난 지진이 아파트를 통째로 무너뜨리고 산마을을 폐허로 만든 직후 현금 10만 달러를 보내 식량과 깔개 등 긴급 구호세트를 전했다. 곧이어 안양 샘병원의 양 ·한방 의사 3명과 간호사 등 의료진을 파견해 다친 사람들을 돌봤다. 특히 세계 곳곳 구호팀이 경쟁하듯 활동하는 대도시를 피해 외진 산악지역을 찾아다니며 꺼져가는 목숨을 살려내느라 힘을 쏟았다. 지금 월드비전은 매서운 겨울 추위를 거의 맨손으로 이겨내야 하는 지진피해 주민들에게 담요와 점퍼 등 월동 장비를 전하느라 여념이 없다.

한국에서 탄생한 월드비전

꼭 56년 전, 한반도에서도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났었다. 미국 침례교회의 부흥설교자 밥 피어스 목사는 1950년 3월 한국을 방문해 통역을 맡아준 한경직 목사와 함께 서울을 비롯해 부산과 대구 등지에서 대규모 선교집회를 갖고 귀국했다. 몇 달 뒤 한국에서 ‘6.25 동란’이 일어났고, 포탄과 총성 속에 피난민 행렬이 이어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피어스 목사는 한경직 목사와 연락을 취하며 9월 22일 오레곤주 포틀랜드시에 ‘월드비전’이란 이름의 단체를 등록했다. 그리고 10월에 다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 비행기는 서울을 오가는 마지막 민간기였다.

그의 손에는 무비 카메라가 들려 있었고, 전선 곳곳을 누비며 끔찍한 전쟁 속에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의 참상을 기록영화로 찍었다. 그리고 미국 전역의 교회를 돌며 신자들에게 사랑을 호소했다. 하늘같은 남편과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을 잃고 통곡하는 여인들, 차가운 길거리를 떠돌며 구걸로 연명하다 병들고 숨지는 어린이를 보며 사람들은 지갑을 열어 돈을 모아줬다. 불쌍한 그 사람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며 돌봐주라고.

수많은 영상집회를 인도하는 그에게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매거진’은 한국전 종군기자 자격을 주었다. 돈이 모아지면 한국에 와서 건네고, 또 기록영화를 찍는 가운데 51년 부산에 고아와 미망인들을 위한 (다비다 모자원)이 세워졌다. 나무 벽에 천막지붕을 얹은 이 모자원은 월드비전이 최초로 지원한 복지시설이다. 53년 5월 서울 서대문 아시아연합신학대학원에서 월드비전 한국사무실 ‘선명회’가 문을 열었다.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주 몬로비아에 본부를 두고 전 세계 100여 개 나라에서 긴급구호 및 개발사업을 펼치며 세계 최대의 기독교 NGO로 활약하고 있는 월드비전은 이렇게 한국에서 탄생했다.



고아들을 위해 육아원과 영아원·모자원·맹아원·농아원 등의 시설을 지어 의식주 지원에 힘쓰던 선명회는 차츰 교육과 의료로 영역을 넓혀갔다. 54년 대구에 아동진료소를 열었고, 59년부터는 서울 남대문로에 특수 피부진료소를 마련해 한센병 환자 치료에도 나섰다. 고아원에 있는 어린이들 가운데 노래에 소질이 있는 학생들로 60년 창단된 ‘선명회 어린이합창단’은 78년 영국 BBC 방송주최 세계합창경연대회 최우수상 수상,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주인공 줄리 앤드류스와 공연 등 눈부신 활동을 펼쳤다. 선명회 명칭이 월드비전으로 공식 변경된 98년 이후 ‘월드비전 어린이합창단’으로 이름을 바꾼 합창단은 지금도 국내는 물론 세계무대에서 한국을 빛내고 있다.

도움 받기에서 도움 주기, 40년 만의 전환

세계 각국에서 모아 보내준 성금으로 월드비전 한국은 70~80년대 강원도 화전민과 전라남도 어촌 등지에서 주민중심의 지역사회 개발사업을 펼치며 자립적인 빈곤퇴치에 힘썼다. 아울러 도시 영세민을 위해 경기도 성남 등 여러 곳에 복지관을 세워 교육과 문화혜택도 넓혔다. 1991년, 월드비전 역사에 큰 획이 그어졌다. 40여 년간 외국의 도움을 받던 수혜국 한국이 지구촌 곳곳에 도움을 주는 후원국으로 대대적 전환을 감행한 것이다.

후원사업을 위해 월드비전 한국은 노랑색 저금통에 동전을 모아 전하는 ‘사랑의 빵’을 시작으로 이웃의 배고픔을 내 몸의 고통으로 느껴보는 ‘기아체험 24시간’ 등 다채로운 모금활동을 벌였다. 어려울 때 고맙게 받은 도움을 잊지 않는 한국인들은 이웃을 위한 사랑의 나눔에 뜨거운 호응을 보냈다. 정기 후원자만 10만여 명, 2004년에만도 425억 7천여 만 원 규모의 사업이 진행됐다. 북한을 포함한 세계 각국의 구호·지원사업은 물론 국내에서 11개 복지관을 운영하고, 영아원과 장애학교 등 71개 복지시설을 지원하며 ‘도시락 나눔의 집’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공부방’ 등 갖가지 사업을 펼친다.

작은 정성으로 큰 사랑의 물결을 이루는 기부문화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면서 나, 우리 가족을 넘어 이웃과 함께 하는 복스러운 삶에 앞장서는 월드비전 한국에 아산상이 주어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저희 월드비전이 고귀한 아산상을 수상하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이 영광은 함께 해주신 후원자 여러분들이 계셨기에 가능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의 가난한 이웃뿐 아니라 세계의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생명 사랑과 나눔의 실천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번에 받는 소중한 상금은 방글라데시 쿨라의 거리 아동들을 위한 쉼터제공과 교육에 쓰도록 하겠습니다.”
월드비전 한국 박종삼 회장의 수상소감처럼, 따뜻한 사랑을 보태준 후원자 모두가 아산상을 받는 것이기에 그 기쁨은 더욱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