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광의 문화이야기 동양은 신비스럽지 않다 - 오리엔탈리즘(2) 이택광


저번 시간에 살펴본 오리엔탈리즘에 대해 계속 이어서 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지금 미국의 콜롬비아 대학에서 교수로 있는 영문학 비평가인데, 나름대로 생의 곡절이 많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는 1935년 영국의 식민지였던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는데, 1947년 이스라엘의 건국과 더불어 정든 땅을 등지게 됩니다.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사이드는 급우들로부터 팔레스타인 난민이라고 조롱을 받습니다. 결국 이런 멸시와 차별을 피해 사이드가 도달한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조국 팔레스타인을 이스라엘에게 넘겨버린 미국이었습니다. 사이드의 문제의식은 바로 이런 자신의 체험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이드는 서양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동양에 대한 적대감과 차별의식을 통해 형성된 것임을 여러 서양의 문학 작품을 토대로 분석합니다. 이른바 ‘동양주의’라는 것을 서양이 날조해 내어서 동양을 ‘타자(Other)’로 만들어 버리게 되는데, 이 과정이야말로 정확히 서양이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할 ‘언어’를 발견한 지점이라는 것이지요.
약간 복잡한 듯하지만, 쉽게 다시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보통 사람은 어린 시절에 나와 남에 대한 구분을 할 수가 없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유아가 나에 대한 인식을 획득하는 과정이 어머니와 같은 다른 사람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밝혀놓고 있습니다.
나에 대한 인식을 얻어간다는 것이 바로 자아를 정립해 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유아는 어머니나 다른 사람의 모습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해 나가는 것이지요. 당연히, 이런 과정에서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유사성(Resemblance)’입니다. 그냥 이 유사성이란 말을 쉽게 이해하자면 ‘닮은 꼴’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비단 이렇게 ‘닮은 꼴’을 통해 ‘다른 꼴’을 인식하는 행위는 개별적 자아의 형성 과정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라는 프랑스 철학자는 이런 ‘닮은 꼴’을 통한 ‘다른 꼴’의 인식 행위가 16세기 서양의 주요한 지식 생산의 방식이었다고 주장했으니까요. 이런 인식 행위에 사용되었던 세 가지 유사성의 종류를 푸코는 ‘관습(Convenientia)’, ‘반영(Aemulatio)’, ‘유비(Analogy)’로 꼽고 있습니다.

각각 나름대로 역사적 맥락을 가지고 있는 이런 세 가지 유사성들의 쓰임새를 일일이 따지는 것은 별반 흥미가 없을 것 같아서 이쯤에서 끝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주목해야 할 것은 당시 서양이 유사성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던 그 행위 방법은 비단 서양에만 국한되어 있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때는 서양이나 동양이나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에서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원근법’이란 것이 ‘발명’되고 ‘풍경’이라는 개념이 출현하면서 서양사람들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 변화는 결국 세계를 수치로 계량화해서 이해하는 방식의 출현을 의미합니다. 바야흐로 근대라는 것이 서양의 지배적 문화양식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동양은 물론 이런 근본적 세계 인식의 변화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왜 이런 동서양의 차이가 발생했던 것인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따져왔지만, 아직 아무도 정확한 결론은 얻지 못했답니다. 우리의 경우도 서양인이 아닌 까닭에 이런 유사성의 범주로 세계를 인식하는 잔재가 아직 남아 있는 편이지요. 대표적인 예가 손금으로 사람의 운명을 알아본다든지, 아니면 지세를 읽어서 명당을 찾는 풍수 같은 것이 이런 식의 인식방법에 속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의 우리가 서양 사람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요. 비록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도 역시 서양의 근대적 기준들을 충실히 따르도록 ‘계몽’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의 인식 방법이 변화한 것에 불과한 근대성의 출현을 서양은 절대적 가치로 신봉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겠죠. 특히 실증주의적 과학에 대한 서양 사람들의 믿음은 기존의 종교적 가치를 능가하는 것이었다고 할 만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서양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른 동양인들을 열등하고 진화가 덜 된 인종으로 간주했던 것이지요. 문화적으로 이런 서양 사람들의 태도는 동양에 대한 적대화나 신비화로 나타납니다.

<인디아나 존스>라는 영화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무거운 칼을 들고 마구 휘둘러대며 고함을 질러대는 아랍인을 단 한 방의 권총으로 죽여 버리는 존스는 바로 이런 서양사람의 진화론적 태도를 잘 보여주는 것이겠지요. 이런 영화에서 동양 사람들은 아둔하면서 게으르고, 사리사욕만을 탐하는 심성이 악한 족속들로 묘사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모든 서양 문화가 동양을 이렇게만 묘사하는 것은 아니지요. ‘리틀 붓다’라는 영화에서 잘 드러나듯이, 동양은 적절하게 신비스러운 곳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동양을 신비한 곳으로 그려 내었던 서양의 대표적인 미학 사상은 낭만주의와 상징주의 같은 모더니즘이었습니다.
사이드가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은 이처럼 서양의 관점에서 동양을 적대화하거나 신비화하는 이데올로기를 말합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은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한창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고 있는 이라크 전쟁을 한번 봅시다. 이라크를 묘사하는 미국의 수사학들만을 놓고 본다면, 악랄한 독재자 사담 후세인 밑에 있는 이라크는 지옥입니다. 아무리 이런 비판들이 후세인 개인의 악행을 강조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미국이 사용하는 이분법적 수사학, 말하자면 서방세계는 민주주의 국가, 이라크와 같은 동방 세계는 독재 국가라는 전제는, 이라크와 같은 독재 국가에 사는 아랍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민주주의조차 쟁취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암시하는 것입니다.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하는 사이드는 이런 서양 사람들의 인식 체계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랍니다.

글쓴이 이택광은 문화평론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