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상일지 힘차게 세상으로 나아가렴 이경훈



다양한 질환과 위급한 상황들에 분주한 응급실 초저녁…. 한눈에 보기에도 호흡곤란과 정서적 불안정이 심해 보이는 한 환자가 구역 4에 있다. 누굴까? 산소공급을 받고 있고…. 침대에 앉아 헐떡이며, 대상없는 분노와 통증, 공포감이 가득한 커다란 눈으로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다. 현재 밀려 있는 환자들을 순서대로 보자면 앞으로도 3~4시간은 있어야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안되겠군. 7번째로 놓여진 차트를 제일 위로 옮겼다.

18세/남자, X-ray에는 흉수가 양측 폐야를 2/3 이상 채우고 있고, 산소 교환이 이루어져야 할 폐는 물에 차 얼마 남아 있지 않다. 복부 CT 소견은 소장 벽이 두꺼워져 있으며 복강 내 림프절들이 다발성으로 커져 있다. 주로 소장에 침범된 림프종과, 악성(암성) 흉수에 의한 호흡곤란이 의심되는 상태이다.
진단 및 치료 목적으로 흉수천자를 하고, 진통제를 투여하였으나 호흡곤란과 통증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소량의 진정제를 투여해 보니 한동안 편안해지면서 오히려 산소포화도도 올라간다.

밀려 있는 환자들을 보고 새벽에야 퇴근하여 잠이 들었다. 여느 때 같으면 오후 3~4시쯤에나 겨우 일어나, 저녁부터 밤 새워 다시 응급실을 지켜야 하는데…. 불안한 느낌으로 눈을 떠 보니 오전 9시. 갑자기 어제 저녁에 본 환자 생각이 났다. 임상적으로 악성 림프종에 병기 4기는 되어 보이며, 빠르게 진행하는 양상이 위급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항암치료까지는 조직학적 진단, 정확한 병기설정을 위한 각종 검사들, 종양내과로의 입원(당시 종양내과 입원대기는 평균 7일 정도 소요되었다) 등 갈 길이 멀다. 이렇게 하다가는 환자를 놓치겠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뜩 들어 병원으로 달려갔다. 환자를 데리고 병리과에 가서 림프절 세침검사를 하고, 각종 검사들을 예약해 놓은 뒤, 병리과 선생님께 조직 슬라이드를 보여드려 “악성 림프종 가능성이 높겠으나 추가 조직검사를 요한다”는 말까지 듣고 종양내과 서철원 선생님께 찾아갔다.

“응급실에 악성 림프종이 의심되는 환자가 있는데 아직 조직학적 진단은 안 되었지만 세침 검사에서 악성림프종 가능성이 높겠다고 합니다. 빠르게 진행되는 양상이 곧 위급해질 수 있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자 “그럼 중환자실로라도 빨리 입원시켜서 항암치료 준비를 하자”고 적극적으로 말씀하신다. “됐다.”

그렇게 입원을 하여 힘겨운 항암치료를 여러 차례 받으며 어려운 고비들을 잘 넘기고 있는 은택이를 다시 만난 것은 9월 종양내과 근무를 하게 되면서이다. 그 사이 몇 차례 병실을 찾아간 적은 있지만, 응급실에서 내가 처음 보았던 환자를 3개월 뒤 다시 병동 주치의로서 만나게 되는 것은 무척 설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9월은 은택이에게는 상당한 시련의 계절이었는데, 항암 치료의 효과가 극적으로 좋은 상태에서도 3차례 원인 모를 소장 천공이 발생하여 응급수술을 3번이나 받게 된 것이다.

한창 젊음을 누리고 밝게 살아가야 할 나이에, 만 6개월을 병원 침대에 누워 갖은 고통을 겪고 있는 이 아이…. 그러나 항암치료의 성적은 우수하며, 이제 장루 복원수술을 마지막으로 곧 퇴원을 준비하고 있다. 부디 이 고통의 시간들이 인생의 어두운 짐 되지 말고, 오히려 외지고 그늘진 곳까지 껴안을 수 있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날아가는 너의 날개 밑을 받쳐주는 탄탄한 바람이 되기를…. 은택아! 이제 병원을 떠나 힘차게 세상으로 나아가렴.

글쓴이 이경훈·서울아산병원 내과 전공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