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상상 자랑스런 나의, 태극기야 휘날려라 조영남


나는 십여 년 전부터 ‘화수(畵手)’라는 소리를 들어왔다. 가수이면서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부모의 유전자를 물려받아서인지 초등학교 시절부터 음악과 그림 그리기를 둘 다 좋아했다. 그 기질은 고교 시절까지 이어져 음악부장과 미술부장을 동시에 했을 정도다. 그러나 가수가 먼저 되었기에 화가가 된다는 생각은 할 수가 없었고 해본 적도 없다.
소위 미술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은 1990년 나의 그림을 본 유명한 조각가인 심재현 선생님 같은 전문가들이 인정을 해주면서이다. 그후 나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미술계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건 화투를 그렸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알려진 가수라는 덕을 전혀 안 봤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왜 화투를 그리는데?” 사람들은 물어왔다.
“사람들이 그리지 않는 것을 그려야 한다는 창의적인 중압감 때문이지.” 나는 말하곤 했다.
음악의 경우는 지금이라도 내가 파바로티나 도밍고처럼 노래하면 세계적인 성악가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나 미술의 경우 피카소나 반 고흐처럼 똑같이 그림 그리면 미친 놈이라는 소리밖에 못 듣는 것이 미술의 특이한 구조다. 즉, 미술은 100% 독창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럼 뭘 그리면 남들과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연구하다가 나는 화투장에 동양화적 그림의 소재가 있음을 알고 ‘아, 이걸 그리면 독창적 그림이 되겠구나’ 마음먹고 그리기 시작했던 거다.
벌써 20여 년 전 일이다. 그 시절에 화투를 그렸으니 “네 그림 좋은데 어떻게 집 벽에 걸 수 있냐?”며 수없이 괄시받기도 했다. 요즘은 웬만큼 돈을 주고도 못 사는 형편이 되었지만.
바둑도 그렇다. 폴 끌레가 말한 ‘점·선·면’, 몬드리안이 말한 ‘단순미’의 아름다움이 바둑판 자체에 있다는 걸 알고 그걸 그리기 시작했다. 또 바둑알 형태의 바구니를 보고 그걸 뒤집어 초가집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화투를 그리면서도 유학 당시 미국 집 벽에 붙여놓기 위해 태극기를 그리고 싶었다. 남한 국기를 그려야 했는데 우리 민족에게는 두 가지의 국기가 있다는 사실에 매우 서글픔을 느꼈다. 태극기를 독창적으로 그렸지만 그 시절 우리나라는 미술에 대한 이해가 없어 태극기를 자유롭게 그리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 그래서 오랜 세월 발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단기 4335년, 서기 2002년 한국에서 월드컵이 열리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태극기를 자유롭게 그릴 수 있고 사용할 수 있는 공식적인 인지가 생겨났다. 나는 내 사고의 승리라고 생각했다.
이 태극기에는, 자랑이 아니라 내가 태어나고 내가 자라나고 내 부모가 살았고 내 아들, 딸이 살아가고 있는 이 땅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무한한 애정이 담겨 있다. 운 좋게 오는 5월과 6월 두 달 간 과천 제비올 미술관에서 태극기 전시회를 개최하게 된다. 그간 그려온 100여 점이 전시될 예정이다.
태극기. 세계 80여 개 국기 중에서 조형이 가장 복잡하고 까탈스럽고 색감에서 유치무쌍하다고 느껴, 이 태극기(남한 국기) 조형화에 성공하면 나의 미술 역량이 여실히 증명될 거라고 믿었기에 여태껏 끙끙대며 매달려 온 것이 사실이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 조영남은 가수이자 화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