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란 어떻게 해서든 행복하여라 고정욱

해피엔드
“작품이 어떻게 끝나는 게 해피엔드죠?”
이번 학기의 소설창작론 시간에 제가 가르치는 대학생들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조를 짜서 릴레이 소설을 열심히 쓰고 있는 학생들 사이에서 그 결말이 어떻게 날지에 대해 토론이 벌어진 거였습니다.
과연 어떻게 소설이 끝나야 해피엔드일까요? 그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가와 마찬가지 질문입니다. 옛이야기에서는 평생 배필을 만나 잘 먹고 잘 살면 해피엔드가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정답이 아닌 것 같아서인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는데 한 학생이 말문을 열었습니다.
“갈등이 잘 풀리면 행복한 결말 아닐까요?”
그 학생은 제법 문제의 핵심을 꿰뚫고 있었습니다. 세상과의 갈등, 사람과 사람의 갈등, 이런 모든 갈등이 없어지고 해소되면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이렇다 할 갈등 없이 불행한 사람들은 왜일까요? 잘 사는 선진국에서 자살률이 높은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요?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무는 걸 보니 인간이 행복해지기는 참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있어야 할 배우자’와 ‘있는 배우자’
흔히 문학에서는 갈등의 발생 원인을 ‘있어야 할 것’과 ‘있는 것’ 사이의 간격이라고 말들을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생각하는 이상과 현실이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나에게 ‘있어야 할 배우자’는 능력 있고, 돈 잘 벌고, 잘 생기고, 집에 오면 자상하고, 부엌일에 요리도 잘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눈을 돌려 ‘있는 배우자’를 보면 무능하고, 돈 못 벌고, 키 작고 못생긴데다, 텔레비전이나 보고, 부엌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런 남편을 가만 둘 여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사건건 잔소리를 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있어야 할 배우자’에 ‘있는 배우자’를 맞추려 애쓰겠지요. 그러니 큰 소리가 나고 다툼이 일어나고 불행이 잉태될 수밖에요.
행복은 ‘있어야 할 것’과 ‘있는 것’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는 것입니다.

행복해지는 두 가지 방법
배우자가 마음에 안 드는 내가 행복해지고 싶다면 그 방법은 단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있는 것을 있어야 할 것에 끌어다 맞추는 것입니다. 배우자를 능력 있게 만들고, 돈 잘 벌게 만들고, 잘 생기게 만들고, 자상하면서 요리도 잘 하는 사람으로 만들면 됩니다.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가 왜 해피엔드인가 하면 말괄량이를 내가 원하는 요조숙녀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전혀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각고의 노력이 있기만 하다면….

그러나 이 방법이 어렵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 하나의 방법이 남았으니까요. 그것은 바로 ‘있어야 할 것’을 ‘있는 것’에 맞추는 겁니다. 다른 말로 눈 높이를 낮춘다고도 합니다. 내가 바라는 배우자의 기준을 그저 식구들 밥 굶기지 않게 적당히 돈 벌어 오고, 부엌일은 고사하고 집에 꼬박꼬박 잘 들어오며 건강해서 가정을 잘 지키는 남편으로 낮춘다면 지금의 남편도 제법 쓸 만하게 보일 겁니다. 그러면 굳이 텔레비전 보다가 소파에서 코고는 남편이라고 해서 눈총을 쏠 필요는 없습니다. 두 방법 모두 말이 쉽지, 실천은 무척 어려운 것입니다. 행복이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것이라면 누구나 행복할 테니까요.

의무가 있다
그러나 어렵다고 해서 행복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해선 안 됩니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보면 죽은 엄마는 아이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깁니다.
“내 아들 딸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해서든 행복해라. 인간은 누구나 최선을 다해 행복해야 할 의무가 있단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겐 행복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장이라도 원하는 것을 위해 가일층 노력 분발하든지, 눈 높이를 낮춰 현실을 따뜻한 눈으로 다시 바라보든지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앞의 제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면 됩니다.
“노력을 하든, 눈 높이를 낮추든 둘 중에 하나를 해서 갈등을 없애야 합니다.”

글쓴이 고정욱·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