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는 행복 쓸쓸한 노년의 어머니 外 장삼동 外


쓸쓸한 노년의 어머니

나이를 먹으면 서럽다고 했던가. 생각도 흐려지고 판단도 불분명하며 거동조차도 불편해지지 않는가. 며칠 전 80을 넘기고 홀로 사시는 고향의 어머니를 찾아 뵈었다.
내 나이도 이제 50을 바라보고 있지만 부모 앞에는 여전히 자식일 수밖에 없고, 늙은 부모는 자식만 찾아오면 표정이 밝아지면서 좋아하신다. 피붙이니 어쩌겠는가.
어머니의 건강이 최근 들어 눈에 띄게 저하되고 있음을 느낀다. 움직이는데 숨이 차고 소화 기능도 떨어져 트림을 자주 하며 귀도 점차 멀어 큰 소리로 말하지 않으면 제대로 듣지 못하신다. 볼수록 안타깝고 처절한 느낌만 든다. 그래도 자식이라고 식사를 챙겨 주시려 하니 비록 아침을 먹지 않았지만 어떻게 차려 달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직접 모시고 살지 못해 늘 안타깝게 느끼면서 어머니의 신변을 걱정만 할 뿐 별로 도와 드리는 것이 없다. 그나마 매일 아침 전화로 안부를 묻는 것이 생활화되어 위안으로 삼는데, 어머니로서는 자주 찾아 오지 않으니 말씀은 안 하셔도 얼마나 원망하고 섭섭해 하셨을까.

어려운 시절에 17세에 시집 와서 자녀를 6명이나 낳아 힘들게 키우셨으니 어머니의 인생의 역경과 고난은 말하지 않아도 선하다. 시골 농사를 지으면서 죽도록 고생하면서도 아버지로부터 일일이 생활비를 눈치보며 타 쓰시고, 그나마 맛있는 음식은 당신보다는 자식들 먼저 챙겨 주시고, 혹시 자식들이 기가 죽을까봐 남 하는 것만큼은 해 주려고 노력하신 분이다. 지금도 누나들이 남들처럼 잘 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늘 걱정하시니, 한평생 걱정만 하다가 돌아가시지나 않을까 싶다.

그래도 내가 왔다고 반찬 한 가지라도 더 놓기 위해 음식을 장만하는 모습을 보면 눈물이 핑 돈다. 도시 생활은 한사코 싫다며, 움직이는 한은 시골 본가에서 살겠다고 하시니 쉽게 도시에 모셔올 수도 없다. 도시 생활 자체가 굉장히 갑갑하게 느껴진다고 한다. 말벗이 있나, 너른 공간이 있나, 소일거리가 있나, 아무 할 일이 없어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으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몸이 너무 불편해 나들이도 자유스럽지 못하다. 허리가 굽어 제대로 펴지 못하고 나들이할 때는 지팡이나 뒤에서 미는 구루마를 이용하신다. 조금만 가면 숨이 차서 한참 동안 쉬었다가 다시 움직이는 것이다. 이처럼 거동이 불편해도 자식이 오면 신바람이 나서 활보하려 들고, 찬거리라도 하나 더 얹으려고 애쓰시니, 부모의 자식에 대한 애정과 사랑은 끝이 없나 보다.

그런데 나는 부모님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 아직은 쓸 만한 내 육신을 드리지도 못하고, 자식 문제로 늘 고민하는 마음을 풀어 드리지도 못하며, 같이 모시고 살지도 못하지 않는가 말이다. 고작 안부 전화나 하고 명절이나 생신 때 찾아 뵈오며 같이 모시고 살지도 못하지 않는가. 그렇다고 용돈도 넉넉히 드리지 못하며 고민거리를 해결해 드릴 수도 없다.

정말 부모의 은혜는 바다같이 넓고 산같이 높지만 우리 자식들은 과연 그 천분의 일이라도 갚는지 반문하고 싶다. 아무리 자식은 내리사랑이라지만 요즘 우리들은 어른들께 너무 소홀하고 효도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말만 ‘경로우대’니 ‘노인 공경’이니 하면서도 실제로 그분들께 돌아가는 것은 별로 없지 아니한가.

나이를 먹는 것도 서러운데 한평생 자식 뒷바라지 하시고, 지금도 잘 살아 가는지 걱정하고 계시니 정말 제대로 된 부모 역할하기는 대단히 어려움을 실감나게 한다. 나는 과연 우리 부모님의 몇 분의 일이라도 했는지 자괴심에 빠진다.

외롭고 쓸쓸하지 않도록 더욱 자주 찾아뵙고, 어깨와 팔다리라도 주물러 드리며, 약이라도 빠뜨리지 않고 사 드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부산으로 무거운 발길을 옮겼다.

글쓴이 장삼동은 부산광역시 사하구 신평동에 살고 있다.

새 아파트 청소를 마치고 돌아오며

신혼 초 그이가 고향과 먼 강원도 벽지에 공무원으로 발령이 나 방 한 칸에 월 500원에 사글세를 얻어 신문지로 벽지를 바르고 사과상자로 부엌을 개조하여 신혼 살림을 행복하게 차렸었다.

청주로 이사를 와서는 아이들 많다고 셋방 얻기가 어려워 적금 부은 20만원을 찾고, 은행 융자를 최대로 받아 골목 안 담도 없는 ‘반나체의 집’을 오기로 샀다.

바로 나온다던 은행 융자가 몇 달간 늦어져 복덕방에서 사채를 얻어 7부 이자를 내니, 그이 월급 가지고는 이자도 모자랐다. 방 한 개는 전세를 빼어 이자를 줄이고, 작은 방 한 개는 중풍으로 고생하시는 시어머님이 쓰시고, 큰방 한 개를 베니어판으로 막아 방 3개를 만들었다. 1호실은 우리 식구가 쓰고, 나머지 한 칸은 시누이, 다른 한 칸은 시동생이 사용하였지만 셋방 사는 것보다는 마음이 편했다.

은행에 원리금을 갚고 나면 아예 생활비가 없었다. 내가 가계를 지킨다고 일자리를 알아보니 용역회사의 변소 청소였다. 첫날 화장실에 들어가니 헛구역질이 나 견딜 수가 없었다. 화장실 청소 일거리가 없으면 다시 지하실에서 자루 만드는 일, 냅킨 만드는 일, 공장에서 막일까지 해 가며 계획보다 빨리 은행 빚을 갚을 수 있었다. 다시 집을 산 것같이 기뻤다.

20년간을 내 집에서 네 아이를 모두 대학에 졸업시켜 가며 열심히 살았다. 그러다가 집이 너무 낡아 터 값만 싸게 쳐 아파트 한 채 값도 못되게 집을 팔고, 변두리 28평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이 곳에서는 아파트 창문을 열어놓으면 종달새 울음소리가 들리고, 잠자리가 방안으로 날아 들어오고, 저녁이면 논에서 개구리 울음소리에 밤잠을 설치기도 하였다.

다시 공장에도 나가고 남의 아기를 돌봐 주며 비과세 저축만 꼬박꼬박 하여 10년만에 마침내 48평 새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입주시 아파트를 청소하는 데 30만원이 든다고 하여 남편과 막내 세 식구가 밤늦게까지 청소를 했다. 땀이 비오듯 쏟아지고 허리가 끊어지는 고생이었지만, 아파트 열쇠를 쥐고 지친 걸음으로 돌아오다 본 밤하늘에는 별이 총총하고 행복이 가득하기만 했다.

글쓴이 오세영은 청주시 흥덕구 복대1동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