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사는 세상 “옷장 좀 열어보세요. 이웃에게 밥을 줄 수 있어요” 박인숙



“장롱 한 번 열어 보실래요? 안 입는 옷과 물건들이 있을 거예요. 3년 동안 안 쓴 것들은 대개 다시 쓰지 않는답니다. 없어도 되는 물건들로 굶는 이웃에게 밥을 줄 수 있어요. 귀한 나눔을 위해 지금 옷장 좀 열어보세요.”

살풋 웃음에 우아한 향취 가득한 고은아 씨가 옷장이며 광을 열어보라고 권한다. 옷과 그릇 신발 가방 소형가전제품 등 쓰지 않는 물건을 보내주면 꼭 필요한 사람에게 아주 저렴한 값에 팔고, 그 수익금으로 굶주린 이웃에게 양식을 줄 수 있다면서. 옷장 깊숙이 박혀 있다 쓰레기통에 들어갈 뻔한 외투 하나가 북한 주민들의 식사가 되고, 아프리카 어린이들이 대를 잇는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학교가 될 수 있다며 눈을 반짝인다.

60~70년대 은막의 최고 스타 고은아 씨(60). ‘갯마을’ ‘과부’ 등 15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여러 차례 인기상은 물론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두 번이나 받은 고은아 씨는 지금도 합동영화사 대표와 서울극장 사장으로 변함없이 영화계를 지킨다. 손자 손녀를 넷이나 둔 ‘영화 비즈니스 그랜드 마더’ 고은아 씨가 영화 못지않게 몸과 마음을 다 바치는 또 다른 일터가 있다. 기증받은 물건을 팔아 굶주린 이웃을 위해 소중히 다시 쓰는 자선가게 ‘행복한 나눔’ 이다.

‘행복한 나눔’은 1989년 설립된 국제구호기구 ‘기아대책’(KFHI : Korea Food for the Hungry International)이 창립 10주년을 기념해 1999년 국내 최초로 선보인 재활용 자선 매장이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 서울 평창동 ‘예능 교회’ 권사인 고은아 씨는 기아대책 이사로 굶주린 이웃의 생존과 자립을 돕고 있다. 또 2003년부터 ‘행복한 나눔’ 대표로 서울 청담점을 비롯해 강릉 군산 대전 부산 일산 등 전국 16개 매장과 첫 해외점인 말레이시아 점 등 17개 가게 운영을 총괄한다. 대부분의 연예인들이 복지단체 홍보대사로 활동하는 것과 달리 의사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운영진이다.

벌써 17년째 기아대책과 인연을 맺고 있는 고은아 씨는 “나눔은 습관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옷을 정리하면서 살 때 값이나 브랜드를 따지면 걷어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작은 힘이 모이면 생각보다 큰 힘이 된다는 것을 한 번만 경험하면 행복한 보람 속에 계속할 수 있다고. 보자기에 쌓여온 옷을 잘 손질해 매장에 진열할 때나, 며칠씩 시간을 내 외국의 기아 현장을 둘러보면서도 보람과 함께 깨달음을 얻곤 한단다.

“부산 피난시절에 초등학교를 다녔어요. 천막 학교에서 나무에 칠판 걸어놓고, 요즘 해외 다큐멘터리 영화에 나오는 식으로 공부했지요. 가마니로 대문을 대신한 오두막집도 주변에 많았어요. 저희 어머니는 밥 지을 때마다 이웃 몫으로 한 줌씩 모은 쌀(성미 誠米)을 챙겨야 교회에 가시곤 했지요. 김치며 고추장 간장 퍼내 어려운 집에 갖다 주시던 모습도 눈에 선해요. 어렸을 때 본 그런 것들이 자연스레 제게도 스며든 것 같아요. 나의 작은 정성이 어려운 이웃에게 큰 도움이 된다면 얼마나 보람된 일이예요? 돈 들여 학원 보낸다고 아이들에게 이런 귀한 가치가 전해지는 건 아닐 겁니다.”

지난 겨울엔 대지진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파키스탄 비시안 난민촌에 갔다. 손이 얼어들어오는 추위 속에서 빵을 구워 아침 7시부터 급식을 시작했다. 곡식가루 반죽해 구웠을 뿐인 빵 한 조각 얻고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는데, 대부분 어린이들이었다. 양말이나 신발도 없이 시린 발을 동동거리며 손가락으로 다섯, 여섯, 식구 수를 가리키는 아이들의 눈망울을 보며 절로 눈물이 났다고 한다.

“천막마다 방문을 했어요. 몇 사람이 있나 세어보니 누워 있는 사람 등 뒤에 한 명, 머리 위에 또 한 명…. 이런 식으로 작은 천막에 11명이 웅크리고 자더군요. 재난 지역을 돌아보자니 여기가 사람 살던 곳인가 싶을 만큼 건물들이 다 무너졌는데 아무 일 없었던 듯 멀쩡한 집도 가끔 있어요. 같이 갔던 현지 선교사가 ‘얼마나 튼튼한지는 흔들어보면 안다’고 하더군요. 신앙도 마찬가지라는 걸 절감했습니다.”

수액제(링거) 공장 준공식 참석차 평양에도 다녀왔다. 북한에서는 수술환자 등 병원 치료과정에 꼭 필요한 수액제를 병원 등 각 시설에서 재래식 방법으로 만들어 쓰는 형편이다. 북한 당국이 평양시 통일거리에 지은 건물에 기아대책이 국제적 우수의약품 제조기준에 따라 최초의 현대적 수액제조 설비를 지원함으로써 연간 약 500만 병을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이 완공됐다. 500만 병이면 북한 주민 한 사람이 1년에 한 병씩 사용한다고 할 때, 평양과 평안남도 주민 전체가 쓸 수 있는 양이라고 한다.

“큰 건물들이 줄지어 선 대로변을 마대자루 등짐 지고 바삐 걷던 사람들, 해가 저물자 온통 깜깜해진 거리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평양 주민들을 보며 정말 가슴이 아팠어요. 파키스탄에서도 연결되던 휴대폰이 그 곳에서는 막혔지요. 평양에 특별한 나들이를 다녀오면서 우리들의 일상이 얼마나 번잡스러운지도 되새기게 됐습니다.”

가난과 굶주림이 끝나는 날까지 이웃을 섬긴다
‘기아대책’은 1971년 미국의 래리 워드 박사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 창설한 국제구호기구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스웨덴 미국 캐나다 등 12개 나라가 아프리카의 우간다와 에티오피아, 우즈베키스탄과 몽골, 남미의 니카라과와 온두라스 등 도움이 필요한 63개국의 현황을 알리면서 식량과 함께 사랑을 전하고 있다.

전쟁과 지진 같은 대규모 재난이 일어났을 때 현장에 급히 달려가 부상자를 치료하고 음식을 공급하면서 귀한 목숨의 희생을 막는 긴급구호는 기본 활동이다. 유엔경제사회이사회(UNESCO)에 협의 지위자격으로 등록된 기아대책이 보다 주력하는 것은 각종 개발사업을 통해 주민들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자립 여건을 마련하는 데 있다.

먼저, 허기에 지쳐 아무 의욕도 없는 이들을 위해서는 무료급식을 한다. 가뭄 지역에서는 우물과 펌프 설치는 물론 소규모 댐 같은 수자원 관리를 통해 물 공급과 기본적 위생을 관리한다. 잘 먹지 못해 지능은 물론 신체발육도 더딘 어린이들에게 비타민과 해충약을 먹이면서 각종 예방접종으로 질병 감염을 막고, 가뭄에 잘 견디는 농작물 품종을 개발해 식량 확보에 힘쓴다. 빌린 돈 때문에 평생 고리대금에 시달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소액 대부제도를, 병에 걸려도 치료받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진료소를 운영하는 등 전 세계에서 3,500여 명의 스태프와 봉사자들이 가난과 굶주림이 끝나는 날까지 이웃을 섬기고자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1989년 미국 본부와 파트너십을 맺고 설립된 한국의 기아대책은 6.25 동란 이후 수많은 외국 원조기구들의 도움을 받은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해외를 돕는 나라로 바뀌는, 그동안의 빚을 갚으며 더 살기 좋은 세상을 위해 힘 모으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특히 기증 받은 물건들을 판매해 이웃돕기에 쓰는 행복한 나눔은 개설 첫 해인 1999년 41억 어치의 구호품을 18개 나라에 지원하는 등 지금까지 1,320억여 원을 40여 개 나라에 전했다. 서울 청담점의 경우 1주일 평균 50여 명의 자원봉사자가 물건을 정리하고 팔면서 작은 정성을 큰 도움으로 빚어낸다. 또 매장마다 홀로 계신 어르신, 소년소녀 가장, 홈 스쿨, 주간보호센터 등 이웃 주민을 위한 복지사업을 펼친다.

“젊은 시절 많은 인기를 누렸지만 지금은 하나도 그립지 않아요. 인기란 좋은 것이지만 삶을 힘들게도 하는 유혹스러운 것이죠. 내가 겨우 이런 사람이구나, 알아차리기까지 진통을 거듭하면서 가치관도 많이 변했지요. 파키스탄에서 물 한 컵으로 양치질과 세수를 하자니 더운 물, 찬물 다 나오는 우리 집 화장실이 얼마나 고맙던지요. 조금 불편한 곳에 하루라도 봉사활동 다녀오시면 감사 수치가 팍팍 늘어날 겁니다. 단돈 1,000원이라도 이웃을 위해 지갑을 열면 기쁨이 샘솟습니다. 이웃과 더불어 사는 보람과 행복을 함께 누리자구요.”

빛나는 젊음의 미모는 아니다. 많은 인기 스타들이 세월 속에 잊혀졌듯 이젠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도 쏠리지 않는다. 하지만 주름진 눈가 안경 너머로 연륜과 지혜를 전해주며 여전히 대중과 함께하는 고은아 씨가 새삼 아름답다. 행복한 나눔으로 단장한 소중한 아름다움이다.

* 기아대책 www.kfhi.or.kr * 행복한 나눔 1544-9549 www.kfhi.or.kr/giversm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