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편지 못말리는 내 상상력 장영희



나는 좀 이상하다면 이상한 버릇을 갖고 있는데, 가끔 전혀 모르는 사람을 보면서 그 사람의 삶에 대해 나름대로 상상하는 것이다. 가령 운전을 하다가 교통체증이 심해서 한참 서 있거나 음식점에서 누구를 기다리거나 할 때 나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사람이나 가까이 앉아있는 이의 외모나 표정, 행동을 보고 저 사람은 무엇하는 사람일까,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왜 지금 저기에 있을까, 열심히 상상의 날개를 편다. 특히 그 사람이 조금 독특하게 보인다거나 색다른 행동을 할 때면 내 상상력은 더욱더 적극적으로 발동한다.

마치 내가 홈즈 탐정인 양, 작고 의미 없는 듯 보이는 실마리 하나로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유추해 보는 만족감이 꽤 크기 때문이다. 아니면 더욱 기본적으로는 나의 ‘비교본능’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 말고 딴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저 사람이 서 있는 저 자리가 내 자리보다 더 편안하고 나아 보이는 것은 왜일까, 내가 방향 못 잡고 우왕좌왕하고 있는 동안 확신에 차서 당당하게 걷고 있는 저 사람들은 나와 어떻게 다르게 살고 있을까…

오늘은 어머니와 함께 우리 동네에 있는 신교시장에 갔다. 연남동으로 이사온 후 10여 년간 어머니가 단골로 다니시던 신교시장의 땅 주인이 모 재벌에게 땅을 팔아 주상복합을 세운다고 시장상인들을 내몰았고, 상인들 중 형편이 좀 나은 사람들은 옆에 새로 지은 건물로 입주했다. 하지만 갈 데 없는 상인들은 그냥 한데서 장사를 하다가 날씨가 추워지자 하나둘씩 어디론가 떠나고, 지금은 거리 쪽으로 행상인 너댓 명 만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얼마 후면 크리스마스라서 그런지 그들의 옆 건물에는 화려한 트리와 불빛이 반짝이고, 커다란 쇼핑백을 든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어머니가 볼 일을 보시는 동안 나는 그 행상인들 쪽에 정차를 하고 기다렸다. 내 차에서 제일 가까운 행상인은 젊은 청년이었다. 리어카에 머플러와 모자를 쌓아놓고 “당신의 따뜻하고 포근한 겨울을 위하여--한 개 6,000원, 두 개 10,000원”이라는 푯말을 세워놓고 지나가는 행인들과 눈을 마주치기 위해 열심히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또래의 청년들이 따뜻한 대학도서관에서 학기말 시험공부를 하고 있는 동안 왜 저 청년은 저기서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며 머플러를 팔고 있을까. 그런데 그는 오른쪽 손에 신문을 말아 쥐고 있었고, 이따금씩 초조한 표정으로 신문을 펼쳐 읽고 다시 말아 쥐는 것이었다. 나는 즉각적으로 상상의 날개를 폈다.

‘저 청년의 이름은 형민이다. 어렸을 때 고아원에 맡겨졌는데 열세 살 때 도망쳐 나왔다. 나올 때 자기를 형이라고 따르던 다섯 살짜리 꼬마를 함께 데리고 나왔다. 그때부터 그는 온갖 고생을 하며 민우를 돌보았다. 그렇지만 민우는 비행청소년이 되어 지금은 소년원에 있다. 형민은 차라리 민우를 고아원에서 데리고 나오지 말걸, 가끔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런데 오늘 우연히 신문에서 10년 전 행방불명 된 미아를 찾는 광고를 보았는데, 모습이 꼭 어렸을 때 민우 같았다. 그는 빨리 신문을 갖고 민우에게 가서 확인하고 싶었다. 머플러 몇 개라도 더 팔아서 통닭이라도 한 마리 사가고 싶었다….’

상상이 꼬리를 물면서 갑자기 아주 구체적인 현실처럼 느껴졌고, 나는 빨리 형민이가 민우를 면회 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창문을 내리고 청년을 불러 체크무늬 머플러 두 개를 샀다.

청년 옆에는 작고 깡마른 할아버지가 리어카에 아주 조야한 장식품들을 놓고 팔고 있었다. 아무도 할아버지의 물건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 없었고 할아버지도 거의 팔기를 포기한 듯, 점퍼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표정 없는 얼굴로 물끄러미 한군데를 주시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옆 건물의 커다랗고 화려한 장난감 가게 쇼윈도우를 향하고 있었다.

‘저 할아버지는 지금 집에서 할머니와 어린 손자 용호가 기다리고 있다. 8년 전 아들 부부가 교통사고로 죽었지만 갓 난 손자는 기적적으로 살았다. 그렇지만 만 명에 한 명꼴로 걸린다는 퇴행성 근육증으로 학교도 못 가고 하루 종일 방에서 TV만 본다. 정부보조금 월 30만원으로는 살기가 힘들어 할아버지가 장사를 나섰지만 하루에 삼사천원 벌이가 고작이다. 그나마 오늘은 한 개도 팔지 못했다. 용호는 올해 산타할아버지가 꼭 TV 광고에 나오는 ‘디어화이터’리모컨 차를 갖다 주시리라 믿는다. 할아버지는 꼭 그것을 사서 용호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 ‘디어 화이터’ 값은 23,000원인데 지금 할아버지 주머니에는 겨우겨우 모은 15,000원이 있다….’

나는 할아버지가 용호에게 리모컨차를 사 주는데 일조하고 싶었다. 차에서 내려 리어카 위 물건 중에서 제일 비싼 하트 모양으로 된 메모판을 12,000원 주고 샀다. 차로 돌아오는데 건물 뒤쪽 벽에 아주머니들이 셋 앉아 야채를 팔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각기 두부 몇 모, 콩 조금, 그리고 야채 몇 가지를 앞에 놓고 웅숭그리고 앉아 있었는데 오른쪽 가장자리에 옆으로 비스듬히 앉아 있는 아주머니는 꽤 젊어 보였다. 그리고 아기를 안고 있었다. 아기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추울세라 아기를 꼭 보듬어 안고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 아주머니의 옆모습이 눈에 익었다. “이상하다. 분명히 어디서 본 얼굴인데. 어디서 보았을까….”

“아, 맞다.” 곰곰이 생각하다 나는 문득 기억해 냈다. “우리학교 성당 앞에 있는 성모상에서 본 얼굴이다!” 별로 열심한 신자가 못 되니 걸핏하면 주일미사를 빼먹고는 그래도 월요일에 성당 앞을 지날 때면 조금 미안한 생각에 슬쩍 훔쳐보는 바로 그 성모님 얼굴이었다. 내 상상력이 다시 발동했다.

“저 아주머니가 안고 있는 아기는 이제 곧 생일을 맞으시는 아기 예수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 보잘 것 없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오시는 예수님이 형민이, 민우, 용호와 함께 하시기 위해 오셨다….”

이런 상상의 날개를 펴니, 1년 내내 겉으로는 소박하고 착한 척하면서도 실제로는 가당찮은 욕심과 욕망에 시달리고, 힘세고 돈 많은 사람 욕하면서도 부러워하던 내 때묻은 마음까지 정화되는 듯, 나도 새해에는 좀 제대로 잘 살아야지 하는 욕망이 샘솟았다. <아산의 향기> 독자 여러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2006가지 좋은 일이 생기는 행복한 새해 맞이하시고, 새해에는 제가 지금 마음먹은 것처럼 예쁘고 깨끗하게 살아가는지 증인이 되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