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참 평화 ‘스승’과 같은 평화 이현주



국방군의 철통같은 경계로 지켜야 하는 평화라면 그건 진짜 평화가 아니다. 평화유지군(軍)이라는 ‘모순’으로 유지되어야 하는 평화도 참 평화가 아니다. 그런 가짜 평화 또는 임시 평화에도 목마른 게 우리의 딱한 현실이긴 하지만, 그러니까 더욱 참 평화가 아쉽고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거나 위협받지 않는 진짜 평화가 그립다.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마침 거센 바람이 일더니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뱃고물을 베개 삼아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를 깨우며 ‘선생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돌보시지 않습니까?’ 하고 부르짖었다. 예수께서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를 향하여 ‘고요하고 잠잠해져라!’ 하고 호령하시자 바람은 그치고 바다는 아주 잔잔해졌다”(마르코복음 4, 35-39.)

같은 상황인데 스승과 제자들의 태도가 이토록 달랐다. 제자들이 죽게 되었다면서 아우성을 칠 때 스승은 뱃고물을 베고 천하태평으로 잠을 잤다. 예수는 그렇게도 고단했던 것일까? 그래서 배가 풍랑으로 요동치는 것도 모르고 깊은 잠에 취해있었던 것일까? 모를 일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제자들에 의하여 잠에서 깨어난 뒤에도 스승의 태평함이 흔들리지 않았다는 사실, 거센 바람과 사나운 물결이 그를 겁주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스승과 제자들의 이 차이점은 그 뿌리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한 때에 대종사 법성(法聖)에서 배를 타시고 부안(扶安) 봉래정사로 오시는 도중, 뜻밖에 폭풍이 일어나 배가 크게 요동하매, 뱃사람과 승객들이 모두 정신을 잃고 배 안이 크게 소란하거늘, 대종사 태연 정색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아무리 죽을 경우를 당할지라도 정신을 수습하여, 옛날 지은 죄를 뉘우치고 앞날의 선업을 맹세한다면, 천력(天力)을 빌어서 살길이 열리기도 하나니, 여러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라.’ 하시니, 배에 탄 모든 사람이 다 그 위덕에 신뢰하여 마음을 겨우 진정시켰던 바, 조금 후에 점점 바람이 자고 물결이 평온하여지거늘, 사람들이 모두 대종사의 그 태연 부동하신 태도와 자비 윤택하신 성체를 뵈옵고 흠앙함을 마지 아니하니라.”(원불교전서 제12 실시품,1.)

예수의 호령 한 마디가 풍랑을 잔잔케 했듯이 소태산(少太山) 대종사의 ‘태연 부동하신 태도’가 폭풍을 잠재웠다. 생사(生死)의 경계를 벗어나 만물과 더불어 하나로 된 ‘사람’의 힘이 거센 바람과 사나운 물결을 잠들게 한 것이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고 스승과 같이 되기를 목표로 삼아, 배우고 익히는 일에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 자체로 이미 행복한 사람들이다. 상황에 관계없이 평안한 마음을 아직 얻지 못했어도, 괜찮다,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