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하루 그대가 되어 가난한 마을의 억새풀 제자 이인영



미진학 청소년과 만학도를 가르치는 상일봉사학교는 자양동에 자리 잡고 있다. 1977년 야산을 임대해 비닐 교실을 짓고 개교했으며 1년에 여섯 번이나 철거를 당하곤 했다. 초등학교 교사로 50년의 교직생활을 하는 동안 정규 수업과 야학 봉사를 동시에 해온 정용성 교장(72). 당시에 정 교장은 상일봉사학교를 부수면 또 지어가면서 공부하고픈 학생들을 가르쳤다. 불량청소년은 물론이고 지역주민이며 동시에 학부모인 이들이 야학의 학생들이었다. 공부 외에도 무료로 예식장, 도서관, 유치원, 이동농촌학교를 운영했다. 밤낮으로 가르치며 자신의 가족은 전세에서 월세로, 결국은 비닐 교실 옆에 방을 만들어 기거하게 했다. 학교장 정년 퇴직금과 융자금으로 현재의 자양동 건물에 오기까지 선생님 가족도 함께 고생해 왔다.

지금까지 검정고시에 합격한 학생은 3,000여 명에 이른다. 세 차례나 자살을 시도했던 제자는 최단기로 검정고시에 합격해 풍요롭게 살고 있으며, 오늘도 학생이 되고 싶은 할머니부터 가출소년에 이르기까지 전국에서 배우고자 하는 소외된 이들의 문의가 오고 있다.

한글, 컴퓨터, 검정고시 교육 외에도 인성교육이 매일 펼쳐지는 곳. 정 교장이 누런 갱지를 들고 여름에 진행될 ‘2006년도 신나는 주말학교’에 대하여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 한쪽에 아그리파, 줄리앙 등의 조각상들이 교실을 장식하며 그곳이 다양하게 가르치는 곳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의 손이 얼핏 눈에 들어온다. 상처투성이의 손. 가난한 마을로만 찾아가던 선생님에겐 제자들이 더 많은 요구를 해왔나 보다. ‘분필만으론 저희들을 사랑할 수 없어요’ 라고.

90년대 중반, 정 교장은 전남 영광의 고향집을 수리해 방 6개를 만들고 문제청소년들에게 기회를 주는 ‘신나는 주말학교’를 열기로 했다. 방황하는 문제아들도 반드시 선도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그는 바로 정신력이 문제임을 직시했다. 해병대보다 더한 인성교육, 극기교육을 시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첫해인 1997년 여름방학에는 문제아와 모범생을 섞어 28명을 데리고 시골집으로 내려갔다. 새벽 6시부터 밤 10시까지의 강훈련. 새벽엔 모시밭, 왕골밭, 삼베밭 등을 정해놓고 8Km를 함께 행군했다. 다음 명심보감과 일반 공부를 하고, 하루에 책 한 권을 꼭 읽고 독후감을 쓰게 했다. 조별로 돌아가며 주 2회 밥과 반찬도 직접 만들게 하고 해당 조가 밥을 안 지으면 그 조는 그날 굶겼다. 오후 봉사활동 시간엔 노인집 논의 피 등 잡풀을 뽑고 손수레로 모아 캠프파이어 때 태우게 했으며 양을 달아 조별로 점수도 매겼다. 독후감 못쓴 아이들은 12시에라도 쓰고 자게 했다. 아이들이 공부만 잘하는 콩나물이 되기보다 역경을 극복하는 억새풀이 되기를 바랐다.

맏이인 그는 중학교 시절부터 신문배달을 했다. 8명의 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다. 비가 몹시 오던 어느 날, 부잣집 대문 앞에서 뺨을 맞고 돌계단을 데굴데굴 굴러 떨어졌다. 신문이 젖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날 ‘나는 저런 사람이 되면 안 된다. 사범대학을 나와 불쌍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다음날부터 창호지에 들깨 기름을 발라 그 속에 신문을 넣고 배달을 계속했다. 그리고 두어 달 대금은 절대 받지 않았다. 자존심은 회복되었고 열심히 노력해 훗날 수석으로 사범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꿈에 부풀었던 첫 발령지 전남 군남초등학교. 맡은 반 3학년 아이 32명중 단 몇 명만 글을 읽을 줄 알았다. 학부모회의를 처음 소집하였으나 2명 만 참석했다. 당시 최고 인기음식이었던 자장면을 학부모에게 대접하자 학부모들이 ‘거꾸로 된 일’이라고, 어찌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식사대접을 받느냐며 한 달 후에는 거의 전원 참석했다. 사랑방 교실의 필요성을 학부모에게 먼저 이해시키고 접는 칠판을 들고 마을별로 다니며 사랑방에서 과외지도를 했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사랑방을 전전하는 선생님은 아침부터 밤까지 배움을 주기 위해 잠을 줄였다.

행적이 조금씩 알려져 서울로 발령을 받았다. 서울에서도 철거민촌 상계초등학교를 지원했다. 학급을 맡으면 학급운영회를 만들어 부모의 관심을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을 했다. 교장선생님이 운동회 폐회식 때 말했다. “정용성 선생님이 2년간 병아리를 혼신의 노력으로 키워 그 판매 수익금으로 오늘 이 운동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운동장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는 늘 어려움이 많은 학교를 희망했다.

하일동의 서울 구천초등학교에 근무할 때다. 그는 몹시 안타까웠다. 서울인데도 중학 진학률이 73% 밖에 안 되다니. ‘어떻게 하면 전원을 중학교에 입학시킬 수 있을까?’ 고민했다. 중학교에 보내려면 진학금이 필요했다. 매일 퇴근 후 묘포장을 운영하는 학부모를 만나 기술 지도를 받고 학교 실습지에 회양목, 사철, 오미자 등 50만주를 삽목 했다. 출근 전 새벽과 퇴근 후 한 두 시간씩 400m가 떨어진 냇가에서 묘포장에 쓰일 모래를 혼자서 수레에 실어 날랐다. 이를 본 하굣길 어린이들, 교인들, 나중엔 예비군 중대가 도왔으며, 동네 청년, 학부모들도 일요일을 마다않고 도왔다. 회양목 꺾꽂이 30만주를 할 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다. 회양목은 2년 후 다른 학교로 팔려나가 그 해 맡은 반 학생들 72명 전원이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회양목 선생, 병아리선생, 올빼미 선생, 영화감독 등 많은 별명을 훈장처럼 달다 보니 손의 지문도 없어지고 망치와 톱이 준 영광의 상처가 함께 남았다.

‘신나는 학교’를 고향 집에서 열 때도, 상일봉사학교 창고를 지을 때도 전기톱에 다쳐 손가락을 봉합해야만 했다.

70세가 넘은 정용성 교장선생님이 부인과 함께 동네 놀이터 벤치에 앉았다. 신혼부터 월급은 어려운 학생 차지로 처음엔 이혼까지 하려 했던 부인은 나중엔 화장품 행상을 했다. 남편의 뜻을 좇아 고아의 숙식비를 제공하고 무료 예식장 비용을 대기 위해서. “항상 고맙지요”라고 말하는 정 교장 곁에서 부인은 꼭 닮은 모습으로 화답의 미소를 지었다.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은 낮은 곳에서 원을 그리고 한없이 넓어져 갔다. 그 중심점에 머물며 힘을 준 아내와 더불어.

* 상일봉사학교 (02) 486-4434 www.sangil.c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