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를 찾아서 다시 그리는 생명의 설계도 공남윤



무게 300그램, 길이 12센티미터, 폭 9센티미터. 딱 어른 주먹 크기만 한 심장의 프로필이다. 크지도 않은 이 장기는 우리 몸 속 장기 중 최고로 ‘드라마틱’하다. 삶과 죽음은 바로 심장에서 길이 갈리질 않던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갑자기 세상을 떠난 친구 때문에 의사가 되기로 마음을 정한 아이가 있었다. 난생 처음 죽음을 목도하고 충격에 휩싸여 눈물을 터트렸던 어린 휴머니스트는 오늘날 우리나라 심장수술 분야의 최고 명의로 유명해졌다. 바로 서울아산병원 흉부외과의 송명근 교수다.

그와 환자들은 늘 촌음을 다투는 응급상황에서 만난다. 그래서 그의 삶은, 벼랑 끝에 내몰린 심장을 다시 삶의 범주 안으로 편입시키는 일의 연속이었다. 그의 손에서 생명의 설계도는 다시 그려진다.

“죽음의 문턱에 선 환자들을 새로운 삶의 길로 안내하는 기쁨이 모든 스트레스를 잊게 합니다. 환자 때문에 밤을 꼬박 새도 하나도 힘들지 않습니다. 건강한 삶을 찾아줄 수 있다면 세상에 그보다 더 값진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국 최초로 심장 이식 수술 성공

‘최고’라는 자리는 피나는 노력을 한 사람에게 돌아간다. 자신의 일에 독하게 ‘올인’한 사람만이 반열에 오를 수 있다. 인턴시절 그는, 자신의 팔뚝에 수없이 바늘을 꽂으며 정맥주사를 놓는 연습을 했으며 미국 유학시절에는 밤마다 베개, 이불, 쿠션, 소파 등 가르고 꿰맬 수 있는 것은 모두 갖다놓고 밤새 봉합연습을 했다. 언어의 장벽과 맞서 싸우며 하루 두세 시간 눈 붙이고 소의 심장을 사다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봉합연습을 하기도 했다. 또 미국의 의사들이 양손을 자유자재로 쓰는 것을 보고 밥도 왼손으로 먹고 단추도 왼손으로 끼우며, 왼손 단련훈련도 강도 높게 했다.

유학을 결심했을 당시 자신의 계획을 밝히자 주변 사람들은 ‘왜 사서 고생을 하려고 하느냐’고 말했다. 인턴·레지던트 과정을 마치고 난 그는 실력을 인정받아 흉부외과 전문의로서 탄탄대로가 눈앞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안주하지 않았다. 선진 의학을 경험하고 돌아와서 우리 의학계에 도움이 되는 인물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청년 송명근’이 마음속에 품었던 꿈은 현실로 구현되었다. 그 숱한 밤샘과 노력의 시간들이 실력으로 쌓여져서인지 그의 이력을 열거하다보면 ‘한국 최초’라는 말이 자주 들어간다.

1992년 11월 11일은 그의 인생이나 우리나라 의료사에 길이 기억될 날이다. 다름 아닌 우리나라 최초로 심장이식수술이 성공한 날인 까닭이다. 그가 심장이식수술에 성공함으로 해서 사람들은 심장병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병든 심장을 건강한 심장으로 갈아 끼우는 영화 같은 일이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났기 때문이다.

최초 심장이식수술에 성공한 의사라는 타이틀 외에도 그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많다. 초저체온 대동맥수술과 체외인공심장을 이용한 심장이식수술 등 앞선 심장수술법을 성공시켜 이름을 널리 알렸으며, 2003년에는 판막을 대체하지 않아도 심장에서 피의 역류를 막는 심장판막병 수술법으로 대동맥 판막 폐쇄증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세웠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외과 한덕종 교수와 함께 말기 심부전과 신부전으로 심장과 신장 기능이 거의 멈춘 환자에게 뇌사자의 심장과 신장을 동시에 이식하는 데 성공했다. 심장과 신장을 동시에 이식하는 이 고난도 장기이식 수술 역시 국내 최초의 사례다.

“우리나라의 심장병 치료는 세계적 수준입니다. 나아져야 할 것은 심장병에 대한 일반인들의 생각이지요. 정말 중요한 것은 심장 근육이 죽기 전에 병원을 찾는 것입니다. 한창 일할 나이에 스트레스나 흡연, 잘못된 식습관 때문에 심장병을 얻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수술 성공률 99%라는 기록은 송 교수의 완벽주의가 빚어낸 열매다. 그는 ‘완벽하지 않으면 시작조차 않는다’는 신념으로 평생을 살아왔다. 환자를 대할 때는 봄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유순하고 포근한 얼굴이지만 수술실에만 들어서면 후배들의 작은 실수도 지나쳐버리지 않는 엄격하고 깐깐한 ‘호랑이 선생님’이 된다. 사람의 생명 앞에서는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의사이기 때문이다.

“의사는 환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말에서는 환자 한사람 한사람에게 정성을 쏟아온 세월이 느껴진다. 그에게 치료를 받고 생명의 설계도를 다시 받게 된 환자들 모두가 그의 가슴속에 남아있다고. 뇌사상태의 남자의 심장을 받아 국내 최초 심장이식 수술 성공자로 새 삶을 살게 된 여자환자에서부터, 대동맥 판막이 망가져 죽음의 문턱까지 경험했다가 새롭게 개발한 수술법으로 살아나 건강한 아이까지 출산한 새댁 등 그에게는 모든 환자가 하나같이 소중하다.

“생명과 직결되는 일이다 보니 흉부외과보다 덜 힘든 전공을 택하는 후배들이 많지요. 알고 보면 이보다 더 매력적이고 보람 있는 분야를 찾기도 힘든데 말예요. 쓰리 디(3D)까지는 아니고 ‘디피컬트(difficult)’하고 ‘다이내믹(dynamic)’해서 투 디(2D) 정도 되는 분야라고 봐요. 소신 있는 후배들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다시 뛰는 심장을 보는 짜릿한 기쁨

서울아산병원 개원 멤버이기도 한 그는 세계 속에 우뚝 설 수 있는 아산병원이 되길 희망하고 있다. 평생을 쉼 없이 자신의 경쟁력을 키워온 그는 지난 2002년 7월에 문을 연 아산인재개발아카데미 소장을 맡아 경쟁력 있는 인재를 만드는 데에도 힘써왔다. 아버지를 롤 모델로 삼은 아들과 딸까지 의대에 진학해, 아버지처럼 바늘 하나로 세상을 꿸 꿈을 키워가고 있기도 하다.

“의사들이 자신의 건강은 잘 돌보지 않는 경향이 있지요. 바빠서도 그렇고요. 저는 시간이 날 때마다 등산을 하고 걷는 것이 유일한 건강관리법이에요. 술은 어떠한 경우에도 두 세 잔으로 끝내는 것이 원칙이고요.”

사람들이 자신을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 ‘명의’를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첫째로 완벽함에 끊임없이 접근해 가는 사람이며 둘째로, 환자의 생명이나 고통을 자신 혹은 가족의 생명이나 고통으로 생각하는 것이고 셋째로 환자를 치료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고 실력을 쌓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다. 오늘도 그 세 가지 명의의 요건을 바탕으로 사람들에게 따뜻한 숨을 불어놓는 송 교수의 하루는, 건강한 심장의 박동만큼이나 정확히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