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과 나 수로에 들어선 ‘거인’ 정범모

비행장엔 나지막하게 구름이 덮여 있었다. 그래도 가자고 아산이 재촉하는 바람에 헬기는 떴다. 서산 농장 구경 가자는 초대를 받고 나는 아산과 동승해서 서산으로 향했다. 앞도 옆도 안 보이는 그야말로 오리무중을 뚫고 가는 헬기는, 내가 헬기를 자주 타보지 못한 탓인지, 어딘지 좀 불안했다. 나는 좌석 팔걸이를 꼭 붙잡은 채 마음을 놓지를 못했다.

그러나 옆 좌석에서 아산은 타자마자 곧 잠이 들었다. 조마조마해 하는 나와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이런 경황에서도 잠들 수 있다니….’ 일이 많은 기업가나 정치가는 밤잠은 적은 대신, 낮에 아무 때나 틈만 있으면 잠을 청할 수 있다고 누군가 말한 것이 생각났다. 나는 잠들어 있는 아산 옆에서, 한국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일 많은 한 기업가의 대범한 모습을 보았다. 그 짧은 그러나 깊은 휴식에서 다음 일과 씨름할 에너지가 충전되는 것일까…. 헬기가 서산 농장에 내리자, 아산은 깊은 잠을 자고 깨어난 아이처럼 발랄해 보였다.

서산 농장은 과연 넓었다. 지평선 보이는 데까지 농장인가 싶었다. 자동차로 그 몇 군데를 돌아보는 도중에 아산은 이 넓은 땅에서 벼농사를 어떻게 짓는지 소상히 설명해 주었다. 볍씨는 비행기로 뿌린다고 했다.

농장을 도는 도중 어느 지점의 수로(水路)에서 인부들 여남은 사람들이 무슨 공사를 하고 있었다. 수로의 물길을 조절하는 장치 어딘가 고장이 난 모양이었다. 꽤 난공사인 모양,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어서 모두들 쩔쩔매고 있었다. 한참 동안 지켜보고 있던 아산이 구두를 벗고 직접 수로에 뛰어 들어갔다. 허리까지 오는 흙탕물이었다. 엎드려 물속에 팔마저 담가 가면서, 인부들을 이러자 저러자고 ‘진두지휘’하는 모습에서 그분 리더십의 표본을 보는 듯했다.

드디어 수로 장치가 제대로 잡힌 모양, 인부들은 허리를 펴고 일어서서 물의 흐름을 흡족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때 허리에 손을 얹고 수고했다고 인부들을 다독거리며 우뚝 서 있는 아산에게서 나는 한 리더십의 거인(巨人)을 보았다. 그분이 경영하는 모든 일에서, 아산은 사람들에게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같이 하는 것’이라는 믿음을 주었으리라.


아산과 나의 연분은 주로 그분이 창설한 ‘한국지역사회학교협의회’에서 맺어졌다. ‘지역사회학교’라는 개념은 학교교육과 그 지역사회가 서로 협조하면서, 한편 지역사회는 학교의 교육효과 향상에 도움을 주고, 또 한편 학교는 지역사회의 여러 현안 문제해결에 이바지한다는 생각이다. 아산이 어디 누구의 도움으로 어떻게 지역사회학교라는 아이디어에 애착을 갖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어떻든 지역사회학교에 대한 그분의 애정과 집착은 유례없이 컸다.

지역사회학교 관련의 여러 모임에서, 한담에서, 그리고 레크리에이션 시간에서, 나는 아산의 인품에 적지 않은 감명을 자주 받곤 했다. 그분의 소탈함과 대범함, 그러면서도 자상함과 정다움과 친근감을 느꼈고, 그리고 은근한 그러나 정곡을 찌르는 사회비판, 긴 미래와 넓은 세계에 대한 관심에 자주 매혹되기도 했다.

아산이 ‘놀기’ 좋아하고 ‘노래’를 즐긴다는 것은 상당히 정평이 나 있었다. ‘놀고 노래하는’ 시간에 그분은 순진무구한 소년 같았다. 좀 서먹서먹한 자리를 금방 허물없는 환락의 시간으로 바꾸어 놓는 ‘실력’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아산과 있으면 자리가 유쾌해진다’는 기대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분과 같이 자리하면 언제나 마음이 편했다.

아산은 달변은 아니었다. 도리어 그분 나름의 눌변이었다. 그러나 그 눌변이 도리어 매력이었다. 기실 아나운서 같은 청산유수의 달변은 웅변이 될 수 없다. 약간은 자연적 눌변이 더 웅변적인 경우가 많다. 어눌함이 도리어 가식 없고 꾸밈도 구김도 없는 진정을 더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아산은 초등학교도 다니지 않았다고 들었다. 도리어 그것이 가식 없고 꾸밈·구김도 없는 그러나 도리어 호소력이 강한 그분의 독특한 웅변 스타일을 낳게 했을까?

나는 몇 번인가 아산의 강연을 들었다. 언제나 독특한 눌변의 웅변이었다. 한국 굴지의 기업가였기 때문에, 그분에게 주어지는 주제는 주로 경제발전에 관한 것이었다. 거의 어느 강연에서나 한국의 70, 80년대 경제발전 제일의 원동력은 50, 60년대의 폐허와 가난 속에서도 한국의 부모들이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판잣집 교실’에서 아들딸을 교육시킨 덕이라고 소리 높였다.

나는 내 전공이 교육학인지라, 자연 아산의 이 교육입국(立國)론에 의기투합할 수밖에 없었다. 교육학자가 교육이 중요하다고 떠드는 것보다는 그분의 그런 이야기가 더 무게와 호소력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도 70, 80년대에 이런 저런 국제학술회의에 가면 ‘한국의 경이적인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 그때마다 나는 그 원동력으로 몇 가지를 들었다. 즉 폐허와 가난 속에서도 꾸준했던 국민의 교육열, 경제발전 집념이 강한 정치 지도자, 기업가 정신이 투철한 기업가들, 각종 실무에 능숙한 테크노크라트 등이다. 나는 언젠가 아산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분도 외국에 나가면 으레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고, 그때마다 거의 똑같은 대답을 말했노라고 했다. 나는 나의 ‘이론’이 아산의 신임을 받는 것 같아서 흐뭇했다. 교육에 관한 그분의 그런 신조가 ‘지역사회학교’에 대한 남다른 관심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만년 노령에 아산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사람들은 그분의 출마에 대해서 왈가왈부 말이 많았다. 나도 긍정적인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몇 년 전 서산 농장에서 주고받은 몇 한담 때문에, 나는 그때 아산이 출마를 결심하게 된 심정을 내 나름으로 충분히 이해하고는 남았다. 한담 중에 아산은 문득 울분을 토했다. “이 나라에선 정치 때문에 기업을 못 해먹겠어. 기업의 손발은 묶어 놓고, 걸핏하면 돈 달라고 손 내밀고…. 다 집어치우고 내가 대통령이나 되어야 숨통이 트일까?…” 그때 아산의 표정은 진지하고 삼엄하기까지 했다. 나는 그분의 이 말을 한국에서 기업가의 고충을 털어놓는 푸념으로만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것이 푸념 이상의 것이었든지, 아니면 그 푸념이 눈덩이처럼 불어서 출마 결심에까지 이르렀는지, 하여튼 나는 그분의 출마를 그분을 위해서도 그리 찬성은 아니었지만,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아산의 ‘노래’ 시간 애창곡의 하나는 ‘가는 세월 그 누구가 잡을 수가 있나요, 흐르는 시냇물을 막을 수가 있나요… ’로 시작하는 곡이었다. 아산 정주영 회장도 가는 세월 속에 흘러가는 시냇물처럼 잡을 수 없이 막을 수 없이 고인이 되셨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추억 속에 정주영 회장은 한국 경제발전의 지주인 동시에 정다운 리더십의 거인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그분은 그렇게 남아 있다. 나는 천성이 그리 거만하지도 않는데, 내가 직접 겪어보고 사귀어본 인물 중에 마음으로부터 감복하고 존경하는 인물이 별로 많지가 않다. 누군들 인품에 결함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래도 인품의 걸출한 측면이 그 용렬한 측면을 다 상쇄하고도 남는 큰 인품을 만나기도 나에겐 그리 쉽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도 아산 정주영 회장은 내 여러 인물들 기억의 평야에서 몇몇 안 되는 우뚝 솟아 있는 높은 봉우리를 이루고 있다.

* 정범모 교수(시카고대 철학박사)는 서울대 교수, 충북대 총장, 한림대 총장을 역임하고 현재 한림대학교 석좌교수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