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과 나 늘 최선을 다 하는 사람의 미소 유경환



뜻밖의 제안

어느 날 신문사 사설회의를 마치려는 시간에 수위가 올라왔다. 누가 면회를 왔단다. 다른 날 같으면 전화로 알렸을 일인데 이상했다. 따라 내려가 보니 수위는 검은색 차를 가리켰다. 다가가 보니 뒷자리에 정주영 회장이 앉아 있었다.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타라’는 청이다.

그런데 차는 뜻밖에도 김포공항으로 달렸다. 차안엔 간식까지 준비돼 있었다. 헬리콥터가 대기하고 있었다. 또 타라고 하여서 탔다. 서산농장,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또 짓고 있던 현대전자…. 이런 식으로 현대그룹 시설들을 차례로 들렀다. 착륙지마다 직원이 바꿔 신을 구두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내 지까다비 가져와…. 발이 부어서….” 지까다비란 일본말이다. 헝겊신이다(필자는 초등학교 시절에 일본교육을 받아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시설 현장에 내려 걸어가면서 보고받고 지시하고 그리고 떠났다. 그 날 오후 늦게 신문사로 날 데려다 주면서 정 회장은 비로소 ‘할 말’에 대해 짧게 입을 열었다.

“오늘 들러본 시설에서 내 몫으로 나오는 배당이 ○○인데, 이제부터는 이 돈을 몽땅 이 나라 문화사업에 쓰기로 작정하였으니 나와 함께 손잡고 일해 봅시다.”

필자는 그때 조선일보사에 있었다. 1990년 늦봄이던가. 중국 시찰을 가자는 제안이 왔다. 조선일보 월급을 받고 있으면서 어떻게 장기 시찰에 낄 수 있느냐고 필자는 도리질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번엔 정 회장이 직접 헬리콥터 국내 여행을 시켜주었다. 신문사 후문 근처 차 안에서의 정 회장 제안에 무척 당황했다. 대답 대신 정 회장을 바로 바라보자 ‘며칠 생각한 뒤에 해도 된다’고 했었다.

‘지역사회교육’에서의 대면

정 회장을 필자가 처음 만난 것은 이런 일 보다 훨씬 앞선, ‘지역사회교육협의회’ 프로그램에서였다. 이 프로그램은 광화문빌딩에서 열렸다. 당시 우리나라 교육학·사회학 전공의 교수들이 이론을 소개한 평생교육(life-long education)의 한 가지로, 사회교육 범주에서 상당히 앞선 자발적 시민사회운동이었다.

이 모임에 나가게 된 것은 하와이대학교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나눔과 사회환원’에 대한 사설이나 칼럼을 자주 썼기 때문이다. 가정교육·학교교육·사회교육의 3가지 범주 가운데 사회교육이 가장 뒤진 상태였는데 놀랍게도 정 회장이 앞장서고 있었다. 하와이대학교에서 낯을 익힌 교수들과 그리고 필자가 개인적으로 알던 인사들(이화여대 사범대 백학장이나 이대부속고 교장들)이 이 프로그램을 이끌고 있어서 필자는 매우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어떤 날엔 모임이 끝난 뒤 정 회장이 필자를 삼청동 영빈관으로 데리고 갔다. 회의 때 자주 나오는 용어인 쉐어(나눔)라든가 톨러렌스(관용)라든가 하는 영어 스펠링이 무엇인지도 물었다. 배우고자 하는, 알고자 하는, 뒤지지 않으려고 하는 그 열의에 속으로 놀라며 감탄하곤 하였다. 그 때 (1970~80년대) ‘우리 사회에 자발적 시민운동이 자원봉사 형식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어야 제대로 사회를 바꿔가는(innovation) 방법이 나올 수 있다’고 정 회장은 어느 학자 못지않게 나눔의 몫을 강조하였다. 정 회장은 이 프로그램을 주도하면서 그 어떤 정부 보다 먼저 사회복지개념을(이론만이 아닌 실천개념으로) 이 땅에 퍼뜨린 향도 역할을 했다고 필자는 본다.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이라는 말을 귀기울여가며 새겨듣고 1970년대에 벌써 지역사회교육협의회 1년 예산을 5억 원씩 편성하도록 지시하는 것을 가까이에서 필자가 보았으므로 여기 증언하는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정 회장의 그 때의 그런 생각과 그런 노력들이 ‘아산 복지’의 하부구조를 이루는 기본사상이 되지 않았나 싶다. 그 당시 ‘현대’에 앞서가는 대기업이 있었는지 수치(數値)로는 알 수 없으되 그러나 나눔의 철학을 이야기 하는 그룹의 총수는 정 회장뿐이었다.

A4 이면지로 계획서 쓰라

필자가 집필하고 있던 ‘조선일보 70년사(史)’가 3년 만인 1990년 봄에 마침내 3권으로 출간되었다. 신문사는 필자에게 위로금을 주면서 제주섬엘 다녀오라고 하였다. 필자는 사사 편찬실장의 직책을 마쳤으므로 홀가분한 걸음으로 제주행 대신 정 회장을 만났다.

“미루었던 대답을 하러 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22년 간 몸담았던 조선일보를 떠나 이른바 ‘현대맨’으로 변신했다.

“내일부터 지체 없이 출근하여 서둘러야 되겠어!” 놀라운 것은, 그 순간부터 필자에 대한 정 회장의 말투가 바뀐 사실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첫 명령(?)이 ‘이면지를 쓰라’는 것이었다. A4 용지의 뒷면을 활용하라는 지시였다. 정 회장의 이런 현장 지시는 끝까지 변함이 없었다.

광화문 현대상선빌딩 9층 그 넓은 방에 책상 하나를 놓고 혼자 기획구상서를 썼다. 정 회장은 앞으로 지을 신문사(문화일보)의 사옥 내부구조에 대한 구상을 그리라고 하면서 이렇게 추가 지시를 했다.

“내가 동양극장을 없앤다고 연극인들이 야단들인데…. 새 사옥 지을 때 그 내부구조 구상에다 그럴듯한 공연장 하나를 넣도록 그려줘. 그리고 또 하나, 회장실, 사장실과 그리고 논설위원실은 같은 층에 모여 있어야 좋을 거야. 내가 알아보니까 조선일보도 그렇더군….”



필자는 정 회장의 지시대로 했다. 윤전기는 지하층에 넣고. 그런데 초대 사장이 된 사람이 사장실과 분리하여 논설위원실을 다른 층으로 옮겼다. 정 회장은 이런 결과에 두 말 하지 않았다. 정 회장은 단 시일 안에 기존 신문사들에서 점 찍어놓은 한 두 사람씩을 뽑아다 ‘문화일보’를 창간하는데, ‘최고’ 만을 데려오는 욕심은 대단하였다. 예를 들자면 창간 준비과정에서 이미 ‘두꺼비’ 안의섭 화백을 스카우트했는데 또 ‘고바우’를 그리는 김성환 화백을 초치했다. (두 화백 사이엔 팽팽한 긴장관계가 생겼다.) “한 신문사에 시사만화가 두 분을 데려오면 어떻게 합니까?” 하였더니 정 회장 대답은 이랬다.

“최고는 다 모아와야 해!”

정 회장의 이런 욕심과 성격과 그리고 소박한 성품에 대해 의아해하면서도 또 감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창간작업이 끝날 즈음 정 회장은 영빈관(삼청동)에서 이렇게 말했다. “새 신문은 달라야 해! 어려운 말로 쓰지 말고 누구나 읽고 가슴 뭉클하도록 창간사를 써야….” 다음 날 사장이 필자에게 창간사를 쓰라고 했다. 그래서 들은 대로 ‘고향에서 남들이 잠자는 동안 새벽에 일어나 매일 한 오큼씩 돌을 골라내고 땅을 일궈 한 뼘씩 밭을 넓혀간 정신으로 신문 또한….’ 이런 파격적 형식으로 창간사를 썼다. 그런데 정작 창간호에 실린 창간사는 달랐다. 서술방식이 기존의 것처럼 엄숙하고 고매한 것이었다. 이 활자화된 창간사를 쓴 사람은 주필직과 사장직을 거쳐 일찍 신문사를 떠나고 말았다.

그냥 얼키설키가 아니야

정 회장은 대화의 상대로, 기업의 경영진이 아닌 교수나 의사나 극작가나 저명인사들과 자주 산 나들이를 즐겼다. 한 번은 오대산에서 오는 길에 양수리 별장에서 또 판을 벌였다. 마석·금곡쯤에서부터 길이 막혀 퍽 지연되었다. 줄줄이 늘어선 차들을 창밖으로 내다보고 있더니 “내게 아들이 하나 더 있으면 양수리에서 워커힐까지 출퇴근용 정기선(뱃길) 운영회사를 차려 줄 텐데….” 하였다. 그 때는 ‘옛날’이었다. 오늘날 마석·금곡지역에 들어선 아파트 단지를 보면, 사업에 대한 선견지명이 대단한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기업(起業) 아이디어는 때때로 좌중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

한 번은 평소 산행(山行)을 할 때 함께하는 인사들과 강화섬 전등사엘 갔었다. 날이 어둑해지자 까치들이 요란하게 드나드는 까치집이 돋보였다. 정 회장은 “까치들이 집을 지을 때 입으로 물어오는, 꺾였거나 잘린 잔가지를 어떻게 하는지 잘 봐둬….”라고 이야기를 꺼냈다. 짧게 줄이면 다음과 같다.

‘폭풍우를 이겨내는 까치집의 안정은 그냥 얼키설키 쌓는 것에서 얻지 못한다. 치밀하게 치밀하게 쌓아야 한다’ 요컨대 구조적 체계화로서 우듬지의 까치집은 버틸 수 있다는 결론이다. 정 회장은 이런 식으로 동행하는 지식인과 교수들을 설득하였다.

필자는 60세가 된 1997년 문화일보를 떠나 정 회장과의 인연도 끊긴다. 나의 모교(연세대)의 신문방송학과에 강사로 가게 되었으므로 ‘현대’와의 인연도 끊어졌다.

가끔 위성이 쏘아주는 TV프로 디스커버리에서 정주영 회장이 ‘현대’를 어떻게 일으켰는가를 보여준다. 보고 또 보아도 계속 보고 싶은 프로이다. 보고 나면 입술이 조금 열리는 듯 하면서 그 틈새로 치아가 살짝 드러나 보이는 엷은 미소의 정주영 회장 표정이 오래 남는다. 그것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의 미소다. 토론을 하거나 식사를 마치고 헤어질 때 정 회장은 늘 이런 표정으로 손을 내밀고 악수를 해주었다. 그래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필자도 정 회장의 그 표정을 떠올리고 마음을 가다듬는다. 정 회장이 필자에게 준 고귀한 선물은 미소이기에 아니, 만 5년 동안 정 회장에게서 배운 것이, 그 미소의 깊은 의미였기에.

* 시인 유경환 선생은 언론학 박사로 사상계 편집부장, 조선일보 논설위원, 문화일보 논설위원실장을 역임하고 현재 한국아동문학교육원 원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