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겨운 이야기 한국과 일본을 이은 2002년 문화 대사 이선희


‘아산의 향기’가 처음으로 만난 이선희 선배는 어려서부터 심장이 약했습니다. 그러나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물 다섯에 대학에 들어가 서른 다섯에 일본 유학길에 오른, 말 그대로 파란만장한 인생역전을 보여준 사람입니다.
1984년 숭의여대에서 응용미술을 공부한 그는 부친상 등 삶의 뿌리가 드러나는 어려움 속에서도 도일(渡日), 3가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1년만에 일본어검정 1급을 따고 일본 사람들도 들어가기 어렵다는 일본 문화복장전문학교 스타일리스트과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어딜 가나 학교가 늦은 탓에 ‘왕언니’로서 동생들을 챙기느라 학생회 부회장까지 맡아 종횡무진 활약했다고 합니다.
아직 한국에 스타일리스트라는 개념이 약했던 1996년, 스타일리스트로 활동하다가 일본계 무역회사를 거쳐 다시 도일, 유한회사 ‘낙원’의 홍보 담당자로 일했는데, 그는 그 1년을 40여 년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으로 꼽습니다.

담당 의사도 독한 여자라고 인정한 3년, 들고간 약 보따리를 그대로 들고 귀국한 유학생활을 마치고 1996년 3월 돌아왔다. 그러나 곧 한국은 IMF의 한파 속에…. 나는 다시 일본으로 떠났다. 생각한 만큼 자리를 못 잡으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각오로. 그러나 내 손으로 시작했던 사업도 접고, 반복되는 입원과 퇴원…. 많은 고민 끝에 어느 정도 기반을 잡은 후 다시 시작하자는 결론을 내리고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여기가 내 인생, 아니 재일 한국인들의 역사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하게 만들어 준 곳이다. 우리 회사는 동경 번화가 신주꾸에 ‘대사관’이라는 대형 한국 식당을 경영했는데 주차장이 넓었다. 그 주차장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 한국인 일본인들이 한데 모여 월드컵 경기를 관전하고 응원한 것이 공영 NHK를 비롯 일본 매스컴에서 큰 뉴스거리가 되었다. 공식적인 주일대사관보다 신주꾸의 대사관이 더 유명해져 오히려 대일 외교를 공고히했다고 할 정도였다. 나는 그 곳의 홍보를 맡아 경기 때마다 직원들과 같이 스티커며 태극기 등 응원소품을 만들고 관전 준비를 하느라 정말 정신 없이 바빴지만 나름대로 한국의 국위를 선양한다는 자부심이 있어서 힘들어도 힘든 줄 몰랐다.
월드컵 이후에도 모처럼의 기회를 잘 활용하여 한일 문화교류를 위한 이벤트를 계속 추진하자는 뜻에서, 유학생 주재원 등으로 구성된 재일한국인연합회와 매달 한차례씩 한국 문화를 일본에 소개하는 이벤트를 진행하였다. 덕분에 NHK 아침뉴스 <오하요 닛뽄>을 비롯 다시 매스컴 세례를 받아 우리 사장님 말씀대로 2002년은 ‘이선희의 해’라고 할 정도로 연일 몰려드는 취재 열기에 정신없는 한해를 보냈다. 재작년만 해도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을 지경이었는데 어쩜 이렇게 위치가 바뀌어졌을까, 누가 이런 일이 나에게 생기리라 상상이나 했을까 하고 문득 문득 내 자신이 놀랄 정도였다.
가끔 힘들어하는 후배들에게 나는 말하고 싶다. 나를 보고 용기를 내라고. 나이도 많고 몸도 약한 악조건에서도 여태까지 잘 버텨온 나를 보고 용기를 가지라고. 그리고 자신에게 만족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가장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