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얼굴 기찻길옆 사랑꽃 가꾸는 역장님 이인영


꿈꾸는 기차역
큰 역이 아니라 그런가 몇몇 사람들이 내리더니 색색의 우산을 펴고 짐을 들고 걸어온다. “이거 노란색은 없어요?” 아이 둘이 궁금증을 못이겨 역장의 깃발을 만진다. “없지….” 웃음 띤 그의 얼굴은 해맑게 펴진다.
최해암 역장(51세). 그를 따라 생전 처음 폐색 상황판이 있는 역사 안 사무실로 들어갔다. 안에서 거꾸로 뻥 뚫린 매표소 창을 통해 얼굴들을 바라보니 재미있다. 덥수룩한 농촌 아저씨는 심드렁하게, 할머니는 맘이 급한 듯, 멋쟁이 아가씨는 당찬 표정을 하고 있다. 입장이 바뀌니까 모든 게 달라 보인다. 그들은 다들 어디로 왜 가는 걸까?
표 파는 사람은 무심한 듯하지만 사는 사람은 표를 받으며 떠남을 약속받는다. 혹시 할머니는 딸의 해산 소식을 들은 건 아닐까?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가난한 인간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그대로 떠나야 하는 생명
너는 그대로 있어라
우리가 가고 내가 가고 사랑이 사라질지라도
너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어라
때 오면 너도 또한 이 세상에 사랑을 남기고 가거라
견디기 어려운 외로움과 숨가뿐 밤과 사랑을 남기고
가난히 자리를 떠나라
-조병화의 ‘사랑의 노숙’ 중에서 -

기차와 소나무
기차역은 항상 제자리에 있다. 믿음의 상징처럼. 희비가 교차하는 그 많은 사연과 역사에 오가는 풍문을 품은 표정으로 오래된 역은 살아 있다.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한 기찻길. 기찻길만 봐도 슬펐던 옛 통학 소녀는 이젠 없다. 대신 고속철도가 자랑스레 노랗게 염색한 머리에 젤을 바르고 짠짠 나타날 것이다. 그 철도도 신세대 통학생을 여전히 대도시로 날라줄 거고.
그 교차점 어디에 최해암 역장이 있어 그 역에게 꿈을 선사했다. 포항, 경주, 대구를 다니는 3칸짜리 동차부터, 새마을호 등 상하 34대 기차가 머무르다 가는 작은 읍의 시골역. 동물농장에, 만남의 장소, 문화공간 갤러리 등을 꾸며 안강 지역 사람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머무를 수 있도록 했다. 만남의 장소 안 사랑방에는 아기 기저귀 가는 침대며 노인들 모임 장소, 맘껏 책을 볼 수 있는 도서대, TV가 비치되어 있고, 역사에는 각 단체에서 기증한 그림이며 시화, 역 직원 가족 사진 전시 등 참으로 남다르게 꾸며져 있다.
또 그는 지금 ‘Say Club’, ‘In Live’, ‘Dio Deo’의 철도 인터넷 음악 방송 DJ에, 시인에, 봉사자다.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 최 역장. 인터뷰 도중 일어나더니 컴퓨터 앞으로 간다.
“오늘은 비가 오네요. 모두 모두 점심 맛있게 드시고…. 보내드리는 곡은 최백호의 영일만 친구입니다….” 이내 플랫폼에는 음악이 울려 퍼진다. 아니 세계 방방 곡곡으로 음악이 배달된다.
어느 날 일본에 사는, 캐나다에 사는 교포들이 우연히 ‘추억의 안강역(부제:기차와 소나무)’ 방송을 듣게 되면 고향 생각에 푹 절어 한국을 달리게 된다. 일영, 송추의 교외선을 달리고 눈이 산하를 덮은 고향 산촌도 달리고…. 그들은 왈칵 향수에 젖어 이어폰도 선물하고 열쇠고리도 선물해 온다. 참으로 멋지지 않은가!

기적 소리와 함께 사랑은 모이고
역무원 사이엔 우편 배달이 필요 없다. 몇시 기차로 보낸다고 하면 기차의 대장 기관사가 직접 편지를 가져와 차창으로 손에 쥐어 준다, 옛 파발꾼처럼. 그러나 보내온 편지 봉투엔 글이 아니라 사랑의 후원금들이 들어 있다. 그날처럼 비오는 날도 또 진눈깨비가 내리는 날도… 기적소리와 함께 사랑이 오는 것이다. 어느 역 직원들이 조금씩 모은 돈, 역장이 개인적으로 보내오는 돈 등…. 그런 일들이 늘상 일어나고 있다. 작은 시골의 그 사랑 많은 기차역에서.
안강역 직원들도 최 역장의 모습에 감동받아 박봉에서 매달 돈을 떼어 돕는다. 이 돈은 최 역장이 회장으로 있는 소년소녀 가장 및 결식 아동을 위한 ‘카루나의 모임’에, ‘독거 노인 돌보기’ 등에 쓰인다. 구조 조정으로 반으로 줄은 인원으로 24시간 맞교대하며 빡빡히 지내는 그 역에서 최 역장은 철야 근무를 해 가면서도 온몸으로 불우한 이웃들을 돌보고 불교 포교도 한다.
역에는 늘 있게 마련인 가출 청소년을 지나치지 않고 돌보는 것도 그의 몫이다. 가출 청소년, 그 슬픈 존재. 이유가 어찌되었든 일탈을 시도한 아이들을 달랜다. 라면도 끓여 먹이고 이틀, 사흘이고 재워 청소도 시켜가며 슬슬 말을 걸어 알아내고, 집으로 모르게 연락한다. 임신을 하고 거지처럼 역 주변을 빙빙 돌던 소녀, ‘물 차는 병’에 걸렸다고 거짓부렁을 하던 그녀는 대구 혜림원으로 보내 순산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그는 아예 10대의 전화를 개설하고 상담을 한다.
얼마 전 해산했던 그 소녀가 숙녀의 모습으로 인사를 왔다.
“술집에 나가는 폼 같다.”
“아무리, 그렇게는 안 살아요.”
제발 열심히 살라고 말하는 그에겐 진짜의 사랑이라는 힘이 들어 있다.

사모곡
경북 경주 외동면의 산골 ‘일국댁’. 그의 어머니는 밤새 삼, 물레를 잣았었다. 그는 3년 전 여읜 어머니(김봉학 님) 생각에 지금도 눈시울을 적신다.
‘이 가슴 찢어내어 올올이 한을 뽑아 실을 삶아서 어머니 옷을 짓는다 해도 모자라는 그리움’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남자는 부모를 여의면 불효에 피눈물을 흘린다더니 그가 그런 모양이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다. 얼마나 대단한 어머니인가.
남편이 육이오 때 전사하는 바람에 유복자로 태어난 최 역장을 잘 키우기 위해 온갖 고생 마다않은 어머니. 논 몇 마지기, 봄에 풀 뿌리, 찔레 순 뜯어 먹기, 베 팔러 시오리 가기, 용마름 올리기도 어머니 몫이었지만 아들이 없는 작은집 할머니를 시어머니로 모시고 평생을 수발 들지 않았던가. 어려운 형편에도 잘 곳 없는 사람은 재워 주고 입었던 옷 벗어 주던 어머니와 할머니. 어머니는 학창 시절 최 역장이 공부한답시고 졸면 깨라고 나무란 적이 없다. 그저 물레 소리 크게 들리라고 빨리 잣았고, 할머니께는 조석으로 따뜻한 밥을 해 드렸다.
한번은 어머니에게서 빨리 올라오라고 연락이 왔다. 그가 부산역에 근무할 당시다. 그는 영문도 모르고 집에 와서는 닷새만에 전격 결혼하였다. 병원에서 가망 없다던 할머니께 좋다는 약초란 약초는 다 캐서 드렸건만 차도가 없자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셨다. 점집에서 큰 잔치를 해야 한다며, 아니면 그 어른이 돌아가 잔치하게 된다는 말에 어머니는 그 귀한 아들에게 부탁했다. 한번만 희생해 달라고… 큰 잔치가 혼인잔치가 되도록.
다행히 아내와는 잘 맞아 아들 하나, 딸 둘 낳고 그는 행복하게 살고 있다. 사실 옛 시절엔 얼굴도 모른 채 시집, 장가 가지 않았던가.
다른 무엇보다 어머니와 아들의 효행심은 타고났나 보다. 어머니는 이웃 사랑, 동네 사랑도 효성에 못지않았다. 대한어머니회 외동면 초대 회장도 하고, 새마을 여성 지도자가 되어 마을에 유명한 말도 남겼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고. 전기도 끌어들이고, 마을 길 넓히는 데도 앞장섰던 어머니. 경주 유림에서는 충, 효, 열을 다한 모친이 귀감이 된다며 비석을 세우고자 하고 있다.

멋쟁이 역장님
옛날 바닷속이었다는 안강(安江)에는 이언적의 옥산서원이 있고, 형산강 줄기를 따라 안강평야에 임해 있는 양동마을(한국 대표적 양반마을)은 경주 손씨와 여강 이씨 양 가문의 집성촌이다. 이 두 가문은 상부상조하면서도 경쟁을 하여 그 틈새의 일반 백성들은 몹시 핍박한 힘든 세월을 지낸 걸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최 역장은 부임하자마자 부드러운 심성을 되찾기 위한 ‘안강사랑 철도사랑’운동을 전개했다. 역에 문화 공간을 마련하고 화장실에도 낙서판을 마련하는 등 주민과 공감하는 역장이 되고자 노력했다.
당시 매표소 구멍이 작은 걸 고치기 위해 창문을 떼고 악수도 포옹도 할 수 있는 매표소를 만들었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한 동네 사람 같은 역무원과 주민의 사이로 발전했다. 지금은 전국 어느 역이나 창문을 개방형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동해 남부선의 그 역에 가면 언제까지인지 모르지만 이런 말들이 오간다.
“항상 맑은 미소로 맞아 주시는 역장님. 몸 건강하시고 수고하십시오. 신청곡은….” “기다리는 시간에 신청곡 잘 들었습니다.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의 역에서 차까지 곁들이니 정말 좋네요….”
“코스모스 님 감사합니다. 신청곡 My Way 들려드리겠습니다.”
‘고체가 아닌 부드러운 내 친구 같은 기차, 그리고 기찻길’이라고 표현하는 최 역장. 1973년 철도청에 들어와 부산역, 모량역, 건천역, 포항 효자역, 울산 호계역을 거친 그. 기찻길 너머 저 산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가슴 적시기도 한 날들. 30년의 세월을 기찻길 밖에서는 어린 이웃들과 함께하며 빨래, 청소,집수리 등을 도와주고 한 가족처럼 지낼 수 있었다.
그건 어려서 가난했기 때문이고, 어머니의 사랑 때문이었다며, 사모곡은 끝날 줄 모르는데….
안강 6시 6분 발 새마을호가 도착했다. 기차로 이젠 내가 출발할 차례다. 멋진 역장의 인사를 받으려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멋지게 출발해야 한다. 따뜻함으로 충만한 미소를 지으며….

글쓴이 이인영은 아산재단 편집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