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얼굴 장기수(長期囚)의 맏형 이인영



이젠, 기다림이 행복입니다
‘봄이 왔습니다…. 무더운 여름이에요…. 코스모스가 피었어요…. 두터운 내복이 그리워요….’
그러던 장기수의 어느 해 겨울, 문득 편지엔 ‘행복’이란 단어가 튀어 나온다. 기다림이 행복이라는 고백인데, 그 변화의 요인이 평범한 한 사람의 관심이었다.
바로 그이. 오랜 세월 부인과 함께 산골짝 청송교도소를 드나든 사람. 김인오 씨(58세)는 평온한 눈빛으로 청량한 이야기를 담담히 풀어 주었다. 부인이 알려지는 걸 한사코 부끄럽게 여겨 현장에서의 만남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대신 그의 겸손한 방문을 선물로 받을 수 있었다.
모두들 꺼리는 범죄자. 20년 장기 복역수의 범죄란 모두 그렇고 그렇다. 사실 꺼려지는 험한 얘기들이다. 그런데 단체 활동도 아니고, 목사, 신부, 스님도 아니고, 한쪽 다리는 지팡이에 의지해야 하는 그가 이웃으로 스스로 다가가 죄인의 형이 되어 주었다.

옥 뜰에 있는 눈사람
연탄 조각으로 가슴에 박은 글귀가 섬뜩합니다.
“나는 걷고 싶다.”
있으면서도 걷지 못하는 우리들의 다리를 깨닫게 하는
그 글귀는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 이마를 때립니다.
- 신영복의 옥중서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 -

걷는다는 사실이 이렇게 뜨겁게 다가올 수가 없었다. 눈사람도, 병마에 다리를 잃은 사람도, 영어의 몸들도, 같은 아픔을 갖고 있다. 그러나 마음은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다. 아니 어찌 보면 더 생동감 있을 수 있다, 그 바람이 하도 절절하여. 단지 속내의 상처가 아물어만 준다면 그들은 걷고 싶은 소망으로 더 건강할 수 있다.

학창 시절
초등학교 5년 때. 아카시아 나무로 엮고 진흙, 석회를 섞어 붙여 대충 만든 성북동 산 판잣집으로 이사갔다. 특수 화학고무를 국산화시켜 국내에 공급하던 아버지 사업이 실패했던 것이다. 보성중학교에 입학할 때도 아버지와는 연락이 끊겼다. 최은희처럼 곱던 어머니는 재산 목록 1호인 미싱을 용감하게 팔았는데 그건 등록금일 뿐이었다.
점심 시간이면 뒤쪽 바위산에 올랐다. 도시락을 싸올 수 없었기에 조용히 산에 올라가 홀로 공부를 했다. 어머니의 얼굴도 떠올랐다. 독립문표 메리야스 보따리 장사를 하며 자식 걱정에 잠겨 있을 어머니. 다리 한쪽이 늘 아픈 맏아들 땜에 가슴 아플 어머니. 배고픔은 이미 산바람에 실려 보내고 공부할 수 있었다.
7살 때 아버진 아교 실험을 집에서 했는데 아들 바지에 걸리는 바람에 쏟아져 심한 화상을 입었다. 그 때 3번이나 숨이 끊어지는 과정을 겪고 살아난 귀한 아들이었지만 어려운 형편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공부 잘하고 기 죽지 않는 씩씩한 학생이었다. 고3 때는 담을 넘어 들어오는 껄렁껄렁한 동급생들을 꿇어앉히고 기합을 주는 바람에 난리가 났다. 결국, 벼르던 그들이 흉기를 들고 빙 둘러서는 위험한 순간을 맞고야 말았다.
“이러지 말자, 내가 다치면 끝이지만 우린 동문인데 훗날 뭐가 남겠냐?”
그 때 유도부 친구들이 쫓아오지 않았다면 한창 혈기의 그들이 무슨 일을 벌였을지 아무도 모른다. 좋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일지라도.

누가 ‘좋은 사람’입니까?
범죄자…. 유형이 많겠지만 일찍이 짜라투스트라는 ‘창백한 범죄자는 도덕적 악인이 아니라 병의 퇴적’이라고 표현했는가 하면, 라스콜로니코프는 ‘뛰어난 사람은 범죄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고까지 말하며 죄가 무엇이고 벌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리고 20년의 수형 생활을 한 신영복 교수는 공자를 빌어 얘기하고 있다.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은 어떠합니까?”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면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미워하는 사람은 어떠합니까?”
“그 역시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마을의 선한 사람들이 좋아하고 마을의 불선한 사람들이 미워하는 사람만 같지 못하다.”
타협과 기회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다. 그리고 증오는 ‘있는 모순’을 유화하거나 은폐함이 없기에 피차의 입장과 차이를 선명히 드러내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증오의 안받침이 없는 사랑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증오는 ‘사랑의 방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범죄를 두둔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싸잡아 격리시키는 일은 실로 부당할지 모른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에게 다가온 거친 환경은 더욱 그를 몰아갈 수 있다. 환경을 바꿔 주고, 용서해 주고, 죄인 아닌 인간으로 대해 준다면….

친구들
흉기를 들었던 친구들이 한 달 후 찾아와 사과했다.
“미안해. 근데 우리도 대학 가야 하는데 갈 수 있을까?”
“그럼. 다른 애들 여름 방학이라고 놀 때 그때 잘 보내, 그럼 될 거야.”
그 친구들은 다 좋은 대학에 붙었다. 미국에서 회계사 하는 친구에, 골프장 하는 친구에, 반갑기만 한 좋은 친구들이다.
연대 경영과에 다니며 깡패란 별명까지 얻은 그는 제2 외국어가 중요한 걸 깨닫고 학원으로 쫓아갔다. 그 당시에는 없던 일어 아침반을 만들어 달라고 사정했다. 6명을 모집해야 만든다는 말에 6명을 모아 결국은 아침반이 생겨 학원 갔다가 학교 가는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단순한 것 같은 그 일은 훗날 그를 일본과 무역하는 무역회사에 취업시키고, 1970년대에는 실무자로서 무역협회에서 ‘일본시장 진출 전략’, ‘세일즈맨 기법’ 등을 강의하는 인기 전문 강사로, 1980년도에는 독립해 일본유통주식회사 서울사무소를 오픈하게 만들었다. 돈도 잘 벌렸다.
다리는 늘 아팠다. 구더기가 상처에 참 좋다는 것도 알았다. 썩은 균을 먹어 치우므로. 전신 화상 중에도 오른쪽 다리는 상처가 더 심했는데 평생 다리가 아물지 않아 짧은 바지를 입던 보성중학교에서는 유일하게 긴 바지를 입어야 했다. 어린 날 두 달 병원 입원 중에 6.25가 발발하는 바람에 퇴원해야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중학교 때부터 고 3까지 앉아서 잤기 때문일까?
아니? 앉아서 잤다니? 방 하나에 다섯 식구가 자려니 공간도 부족하고 공부도 해야겠고 해서 앉은뱅이 책상에 다리 펴고 앉아 이불을 등받이로 해놓고 공부하다가 그냥 잤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앉아서 입적한다는 말, 앉아서 구도한다는 건 알지만 어린 소년이 구부리고 잤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멍멍해 온다, 점심도 굶고… 다리도 아픈데….
“왜 이제 왔니? 당장 자르지 않으면 6개월이 될지….” 의사 친구가 물었다.
“야, 기분이 어떠냐?” 다시 물었다.
“니가 자르면 자르지….”
매일 아프던 다리, 평생 붕대 감고 지내던 다리가 못참겠다고 자살 테러 선언이라도 하고 나선 것일까? 과거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45세 때 일이다. 살아만 달라고 눈물 흘리던 아내가 눈에 밟히고 살아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문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
담배꽁초 버리면 못참아 쫓아가 시정하는 정의로운 것만으론 부족했다. 뭔가 더 적극적인 것, 더 사랑하기를 해야만 했다. 성북동 산에서 명륜동 산을 뛰어서 넘어가면 40분 걸리던 명륜동 교회.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엄마 따라 새벽 4시면 기도 가던 그가 아니었는가.
결국 그 날들 이후 용감한 시민상도 받고, 작은 실천이 실린 기사도 일간신문에 났다. 그 신문 쪼가리 하나가 교도소 면회소 휴지통에 버려졌고, 한 수인이 그걸 굳이굳이 꺼내서 봤다. ‘더불어 사는 사회’라구? 웃기고 있네. 그래도 이 남자가 어떤 사람일까? 아무도 찾지 않는 내게도 관심을 가져 줄까? 편지 한번 보내 볼까? 참, 참, 함, 함, 해 볼까? 말까? 심심한데 해 봐?
하는 것과 생각하는 건 그리 큰 차이인가? 한 수인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김인오 씨는 아내와 함께 산골 오지를 꾸역꾸역 찾아갔다. 그리고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설날이, 추석이 점이 되고 선이 되어 길어져 갔다.
장기수 K씨가 출소했다. 잘못된 첫 단추는 계모의 반지를 갖고 나가는 걸로 소년원에 가게 된 단순한 일이었건만, 30세에 들어가 50세가 되어, 김인오 씨 부부와 만난 지는 13년 만에 눈부시게 넓은 다른 색의 하늘을 만난 것이다.
문밖에서 기다린 사람은 이미 떠나간 아내도, 일가 친척붙이도 아니고 김인오 씨 내외였다. 그리움의 대상, 겨울이면 내복을 넣어주고, 명절이면 찾아와 주던 형님과 형수. ‘밑 빠진 독에 물붓기였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아낌없이 쏟아준 고귀한 사랑’이라고 속얘기 하게 한 그들이 그 하늘 아래 웃고 있었다.
수인은 자신을 ‘밑 빠진 독’이라고 고백했지만, 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 교도소 안에서 열심히 공부할 것을 독려했다. 열심히 신앙 생활 하고, 원예사 자격증을 따도록 하고, 일어도 공부하고 대입검정시험도 보게 했다. 물론 1급 모범수도 되었다. 그리고 밖에서는 그가 나오면 일부 맡기려고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놓았다. 물류 창고에서 일하고 월급이 통장에 들어갔던 날, 캐나다 가자고 여권 만들어 놓으라고 한 날은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이 그대로 자신의 기쁨도 되어 주었다.

“많은 사람 못해요. 한 사람 보살폈어요.” 말하는 김인오 씨.
그건 아니다. 반지하에 살던 뇌성마비 앉은뱅이 머리핀 장수도 도와준 걸 아는데….

천사들
남편의 얘기가 짧게 끝나길 고대하던 부인 이순애 씨가 차 안에서 그를 맞으며 눈을 흘겼다. 그녀의 서글한 눈은 단호하게 빛나고 있었다.
첫 미팅 파트너로 판잣집 신혼 살림 형편에 어린 시동생까지 키운 아름다운 그녀도 속없이 감추지 않고 내보이는 남편이 이날만큼은 미운 거다. 이미 살아만 달라고 펑펑 흘리던 눈물을 다 쏟아내고 되찾은 남편. 건강한 이들도 살기 힘든 세상에 남의 다리가 되어 주는 그 남편의 엔젤인 그녀가 말이다.
차는 떠나갔는데 김동환의 ‘아무도 모르라고’ 노래가 무심히 들려왔다.
‘떡갈나무 숲속에 졸졸졸 흐르는 아무도 모르는 샘물이길래~’
그녀가 성악을 전공했다지, 아마.

글쓴이 이인영은 아산재단 편집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