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얼굴 아름답게 굴러가는 희망의 돌, 여운재 이사장 이인영


희망이 되었다
KTX 열차를 처음 타고 취재 여행을 떠났다. 칙칙 폭폭 소리도 없이 기차가 달린다. 하지만 이것도 언젠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때 그리움으로 추억하는 사람들이 생기겠지… 차창 밖을 본다.
높은 철길 덕에 시선이 높아져 파란 하늘과 더 가까워진다. 하늘이 자꾸만 다가온다. 내려다 보면 낮게 깔린 마른밭 하며 지붕이 어쩌다 머리 위를 보여 주고. 조그만 마당이 확 지나가는 것이 아깝기만 하다.
드디어 마중 나온 여운재 이사장(56)을 만난다. 대구 기차역에서.
그는 대화 중 이런 말도 했다.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모임에 나갑니다.”
그가 예사로운 듯하면서도 예사롭지 않다는 걸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인생의 종착역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는 건 알지만… 하면서 그를 본다. 그런데도 그는 너무도 우리다워서 편하다.

얼마나 많은 생의 마을들을 지나왔던가
그 마을들
바람 치는 날의 아이들
달래줄 친구 없으면
스스로 달래어야 하는 절망의 시작을 보았다
그런 것들이 오래오래 지나서 희망이 되었다
-고은 ‘희망에 대하여’ 중에서

“부러운 시간은 짧게, 좋은 시간은 길게, 나쁜 일은 오래 생각하지 않고, 좋은 일은 빨리 결정합니다.”
그의 말에 더 힘이 있고, 신뢰가 생기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초탈하고 깨달아 부러움도 없는 사람이 아니라고, 평범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말투다. 너무 남달라 존경심만 가져야 하는 먼 존재가 아니라 정으로 다가가고 싶은 사람임을 드러내 준다.

사랑 하나가…
1988년 여 이사장은 ‘대구사회복지문제연구소’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의 순수한 열정에 우연히 감동받아 월 5만 원씩을 후원했었다. 의사로서 감동받았다면 당연히 할 만한 액수 아닌가? 하고 일순 안도의 숨을 쉬게 한다.
그러다 자연스레 후원회 이사가 되고, 상임이사도 되고, 하다 보니 대표이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관심이 가게 된 이 연구소 부설 ‘대구자원봉사지원센터’는 당시 운영상 어려움이 많았다. 자신의 소유였던 빌딩을 무상으로 일부 쓰게 하다가, 나중엔 활발한 자원봉사자의 모임을 육성해야겠다는 생각에 전 재산인 대구 달서구의 10억여 원에 달하던 빌딩을 아예 기증했다. 전석복지재단을 설립하고 만 것이다.
하나의 사랑을 주자 두 개의 사랑이 생겼고 또 두 개의 사랑을 주자 세 개의 사랑이 생겨났다는 얘기다. 얼마나 살 맛 나는 이야기인가? 누구나 마음을 잘 먹으면, 시작이 반이라고, 꼭 돈이 아니더라도 그처럼 훌륭한 일을 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주는 사람.
그뿐인가. 개인 소유의 병원인 소망내과의원도 법인의 수익사업체로 변환시켜 그 수익을 각종 지역사회 복지사업에 지원하였다. 한때 영덕아산병원장을 역임하기도 한 그. 그의 병원에선 만성신부전증 환자의 혈액 투석을 일반 병원의 반값 이하로 해주는 등 수많은 일들을 실행하고 있다. 그는 지금 월급을 받아 생활하고 있다.

어우러지는 세상
논, 밭으로 뛰어다니며 메뚜기 잡고, 겨울이면 스케이트 타고 저녁 때 바지가 축축해질 때까지 놀았다. 어머닌 옷을 벗기며 귀퉁배기를 쥐어박기도 하셨다.
그런 개구쟁이 기질 때문인지 그의 사고는 훨훨 날아다니고 창조적으로 열려 있음을 느끼게 된다.
장애인 스포츠가 불모지였던 1994년 당시 그는 휠체어 테니스단을 창단했다. 몇 년 뒤엔 ‘제1회 코리아컵 국제 휠체어 테니스 대회’를 개최해 5개국의 참가를 끌어냈고, 1996년에는 휠체어 농구단도 발족시켜 몇 년 뒤 전국 8개 팀이 참가한 ‘제1회 대구컵 전국 휠체어 농구 대회’를 개최했다.
제1회 대구컵 전국 휠체어 농구 대회. 꽉 찬 8,000석 규모의 대구 실내체육관. 열기 또한 대단하고 발랄한 학생들의 젊은 기운으로 넘실댔다. 오프닝을 하며 의장대, 군악대, 치어리더까지 너무도 훌륭한 자리였다. 흔히 휠체어 농구 대회에는 관중이 너무 없다. 풀 죽은 농구 대회를 그는 도저히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과기처 장관이며 휠체어협회 이사장이던 강창희 씨에게 사전에 부탁을 한 건 너무도 잘 한 일이었다. 팀에는 숙박비를 제공하고, 교육청엔 자원봉사자 학생을 요구했다. 장관이 오자 시장도 왔으며 관중은 늘어났던 것이다.
장애인 선수들은 넘어져도 아픈 줄을 모르고 열성을 다했다. 그런 관심과 환호에 흥분해서 볼을 못 넣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경기 후 여학생, 남학생들은 우루루 몰려가서 사인을 요구했다. 너무도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한 여학생이 일기에 썼다. ‘장애인을 새롭게 봤다. 넘어지면 바로 일어서고… 도와줄 대상이 아니고 자기 일 꾸려갈 수 있는 힘 있는 사람이다.’
부모님이 우연히 보고 너무 감사하다며 편지를 보내왔다.
어우러지는 세상. 그가 했듯이 그는 안다. 한 사람의 변화가 열 사람, 스무 사람, 만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걸.
지금도 대구의 유일한 휠체어 농구 실업팀을 그는 운영하고 있다.



메아리
그뿐이랴. 장애·비장애인이 함께 노래하는 ‘사랑의 메아리 합창단’은 집에 있는 장애인들을 끌어내기 위한 사회재활프로그램으로 개발된 것이다. 1990년 창단된 이래 몇 년 뒤부턴 매년 정기 연주회를 가졌다. 아름다운 음악으로 사랑을 나누는 합창단. 일본 공연을 할 수 있었던 건 여 이사장이 그들에게 무심코 했던 말을 지키고자 애썼기 때문이다.
“다음엔 물 건너가서 공연하게 해 줄게.”
늘 마음에 있던 어느 날 영남일보 사장과의 자리에서 공수표를 남발했다고 하소연했다. 사장은 잊지 않고 연말에 고맙게도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보내왔다. 어려웠지만 일본 후쿠오카 장애인협회장의 마음을 끌어오고 결국 후쿠오카 시의원 8명이 대구에 오게 되었다. 후쿠오카 시에서 연주회를 가지고, 또 대구에서도 초청 교환 공연을 하는 등 민간복지 해외 교류의 물꼬를 트기도 했다. 지금은 중국, 동티모르와도 교류와 봉사를 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은 각 영역의 사업으로 확대되어 갔다. 그 결과 전석복지재단은 종합사회복지관 2곳, 노인복지관 1곳, 어린이집 2곳, 공부방 4곳, 장애인체육시설 1곳, 자원봉사센터 3곳 등 모두 20여 곳의 사회복지기관을 위탁 운영하게 되었다.
이밖에도 10여 년간 재가장애인 교육을 위한 ‘사랑의 토요학교’, 발달장애 및 정서장애 치료를 위한 ‘아동치료교육센터’를 운영한다.
최근에는 재단 설립 12주년을 맞아 ‘전석재단과 함께하는 얌모얌모 콘서트’를 마련해, 어린이와 할머니가 함께 웃으며 즐기는 기회를 가졌다. 클래식 틀을 깨 아이들이 떠들어도 화내지 않은 음악회를 모처럼 노약자, 장애인을 포함한 대구 시민과 나누는 등 문화복지활동에도 앞장서는 것이다.



기적을 보다
전석(轉石)의 뜻은 ‘구르는 돌’이다. 물 속에서 돌이 잘 굴러가야 물줄기를 바꾸는 위치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막혀 있고, 고여 있는 물줄기를 좋은 방향으로 확 터 주는 역할을 그가 묵묵히 스스로 해내고 있다.
그는 재단을 보며 기적을 보았다고 말했다. 봉사정신이 투철했던 사람도 아닌 자신이 조금씩 하면서 해 나갈 수 있었던 작은 일들이 기적이었다고. 군림해야 즐거운 줄 알았는데 내놓고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들어 나가자 삶이 더 풍성해졌다고.

올라오는 길. KTX의 밤 창문이 거울처럼 모습을 환히 그려주고, 그의 말이 보였다. “선과 악의 중간이 제일 안 좋다고 생각합니다. 나쁜 일을 하면 후회하고 선을 실천할 수 있지만 중간에서 마음만 무지 선하게 갖고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면 더 나쁜 거 아닙니까?”

글쓴이 이인영.아산재단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