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얼굴 강원도 인제 월학초등학교 고상순 교장 이인영


숲속도서실에서
숲속도서실에 앉았다. 한여름 시원한 숲속 바람이 제일 먼저 맞는다. 휘이익 한 줄기 바람이 불면 나뭇잎 몇 개가 내려오며 머리를 스치고 인사를 한다.
‘ 그래, 안녕! ~’
이곳에 앉아 동무랑 나란히 책을 읽고,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보내고 또 읽고, 유럽의 배 창고에 갇히기도 하고, 낮이지만 별도 만날 아이들. 테이블 위로 얼룩 얼룩 작은 햇빛이 그림을 그리고, 또 한 차례 바람 불면 햇빛 그림이 흔들리고. 어디서 올라왔는지 개미 한 마리, 햇빛과 그림자의 경계선에서 시선을 뺏을 수도 있다. 개미제국에 가볼까 하다 책 세상에 빠진 애는 목이 아파오고, 긴 의자에 눕기라도 하면 하늘 가까이 젤 높은 곳에 있는 나뭇잎과 만날 수도 있다. 파란 하늘에 떨어진 하나의 성스런 나뭇잎. 땅도 하늘도 참으로 가깝다.
고상순(59세) 교장은 이런 아이들 곁에서 빙그레 웃고 있다. 태백산맥 줄기 금강산 가는 길목. 대암산, 송학산을 비롯, 여러 산들이 빙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운 강원도 산골 월학초등학교에서.

짜릿짜릿한 기쁨도
아찔아찔한 환희도 다 사라졌다.
이 때문에 나는 실심 않으리, 슬퍼 않으리, 불평 않으리.
다른 은총이 뒤따라 왔다. 내가 믿기에 그것은
내가 잃어버린 것에 충분한 보상이었다.
나는 분별없던 어린 시절과는 달리:
이제 자연을 보는 법을 배웠기에,
인생의 고요하고 슬픈 음악을 듣고.
- 워즈워드의 시 ‘그 시절은 지났다 ’

책 보는 아이들
바로 그 시절. 아름다운 한 선생님이 어린이들에게 세상 보는 법을 가르쳤다.
“자연을 볼 땐 나만의 자연 보는 법이 있단다. 사람의 눈을 볼 땐 이 가슴의 눈으로 봐야 해.”
‘안녕하세요?’ 하는 인사가 주는 메아리 기쁨. 이쯤은 버얼써 터득했을지 모를 아이들. 그 아이들은 대도시로 나가지 않은 부모 덕에 행운아가 되었다.
전교생 41명. 4개반. 선생님 6분. 맑은 하늘 덕에 선이 선명한 산이며, 지붕이며, 나뭇 잎사귀. 그것도 모자라 눈만 들어 보면 천지에서 보이는 상상의 나라. 전국에서 한 학생당 보유 도서수가 최고인 200권이다. 전체 8,000여 권.
이 책들이 아이들에게 손짓을 한다. 숲속도서실, 마당도서실, 버스도서실, 버스정류장 도서실에서…. 날씨 좋은 여름에는 숲속도서실에서, 비가 오거나 날씨가 좀 쌀쌀하다 싶으면 100만 원 주고 사와 개조한 헌혈차 버스도서실에서, 빨개진 볼로 무슨 작당을 하는 동지마냥…, 겨울엔 학교 도서실에서, 멍석 위인듯 뒹굴뒹굴거리며 보고 싶으면 마당도서실에서… 아이들은 책을 본다, 버스를 기다리다가도.
작년 졸업생 두 명. 아동문학가 겸 시인인 교장 선생님은 그애들을 위해 고민했다. 축구를 가르치긴 어렵겠지만 책은 어느 누구보다도 가깝게 여겨 평생의 재산이 되게 하자. 그림으로 상을 탄 미술 전공 선생님, 예쁜 누나나 언니 같은 처녀 선생님들에게 둘러싸여 가정교사 수준으로 교육을 받는 월학초등학교생들. 프로젝션 TV와 엔코더 등 교자재는 물론 컴퓨터도 서울 어느 학교 못지 않게 구비되어 있다.

산골 소년
고상순 교장은 영월에서 자란 산골 소년. 얼마나 어려웠는지 고 교장은 초등학교 때 상도 많이 탔건만 중학교 가는 건 꿈도 못 꾸었다. 그러나 아버님은 그 어려움 속에서도 거지에게 약속을 하시던 분이다.
“이따 밤 자정 지나서 와~” 이유는 간단했다. 식구들 먹고 살기도 힘든 판에 거지에게 줄 양식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지만 쫄쫄 굶는 걸 뻔히 아는 아버지가 할 수밖에 없던 말이다.
어머니 눈을 피해 양식거리를 조금이라도 울타리 너머 넘겨주는 시각이 자정 넘어서이다. 오죽하면 아버님 돌아가셨을 땐 깡패 두목인 줄 알았을까! 육 남매 자식도 풀칠하기 힘들었지만 아버진 그렇게 하셨다.
수학여행 때도 초등학생인 그는 부모님께 수학여행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가슴만 아프실 일이란 걸 알기에 반장이지만 어린 마음에도 그 얘긴 접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한 술 더 뜨셨다. 그를 보내겠다는 사실을 수학여행 가기 전날까지 비밀로 해 달라고 선생님께 부탁하셨다. 아들이 알면 어떻게 해서든지 안 간다고 할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곧바로 인쇄소에 들어가 2년간 심부름을 했다. 인쇄 기술을 터득한 것도 무지 고마운데 그곳 어른들이 돈을 걷었다. 중학교에 가라고.
“난 아까 그거 실컷 먹었다. 싫어해….” 거짓말 안 하시던 어머니의 말씀이라 곧이곧대로 믿고 말았던 시절. 그 어려운 시절에 서점에서 사다 주신 ‘흥부 놀부’란 책이 얼마나 큰 선물이었는지!


별이 되고픈 아이들을 위하여
어려울수록, 아니 그곳이 어디일지라도, 아이들에게도, 군인들에게도, 이웃 주민에게도 책 읽는 습관을 들여주고 싶은 소망이 솟아 올랐다. 고 교장은 어머니가 얼마나 중요한지 안다. 이 나라는 그녀들 손에 달렸다. 어머니부터 교육하고 싶은 소망을 어찌하지 못하는 그.
학생, 선생님, 학부모가 모두 일주일에 한 권 이상의 책을 읽는 ‘1인 1주 1권’ 독서 운동을 펼치고, 2주에 한번 소식지를 만든다. 그 소식지를 모아 며칠 전 3집째인 ‘별이 되고픈 아이들을 위하여’를 내었다. 훌륭한 자녀교육 지침서이다.
‘자녀로부터 배우며 가르치는 부모가 되려면’, ‘매를 들 때는’, ‘도산 안창호’, ‘브라질 어린이의 독립 정신’, ‘링컨과 스탠톤’, ‘록펠러 가의 자녀 교육’….
정말 그가 얼마나 어린이를 사랑하는지 알 수가 있다. 골라서 골라서 꼭 읽었으면, 알았으면 좋겠는 내용을 구해온다. 언젠가 고 교장은 온 세상 장애인을 위하여 ‘우린 외롭지 않아요’란 동시집도 냈다. 책 뒤쪽엔 점자 페이지를 넣어서.
“아이들 곁에 아이어른으로 남아 있고 싶어요” 하는 고상순 교장. 왜 4개월 근무한 여선생님이 다시 이 학교로 오겠다며 울고 떠났는지 알 것 같다.
춘천교대 학보사 출신으로 한국방송통신대에서 초등교육과, 행정학과, 농학과를 다 졸업하고 특수교육도 10년 한 고 교장은 자신이 가장 잘 지도할 수 있는 길을 언제나 찾아나섰다.
‘도전 독서 골든벨’ 제도는 아이들에게 호기심을 주었다. 선정 도서를 20권 만들어 일정 기간 가장 많이 읽은 어린이에게는 특별한 상도 준다. 시작이 무엇이든 아이들은 상 탈 욕심에 읽다가 어느새 책이 주는 세상에 푹 절어버린다. 이 세상에 사탕보다도 더 달콤한 게 머리 속에 있다는 걸 알아채 버리는, 달 뜨는 동네 월학초등학교 어린이들.
그가 언젠가 한국교육자 대상을 탄 건 지극히 당연하다. 육지 속의 섬 같은 통곡초등학교에서도, 30여 년 세월의 다른 여러 학교에서도 그의 행로는 책을 향해 열정으로 열려 있었다.

하늘을 벗삼아
저녁 무렵 학교 뒷마당 관사 앞쪽에서 매운탕 파티가 벌어졌다. 학부모회장으로 보이는 어머니가 뭔가 들고 가며 인사를 하더니 마을 앞에 흐르는 사천강 맑은 물에서 잡았는지 뚝딱, 매운탕을 끓였다.
선생님들과, 동료 같은 부인 김경자 씨(전 장애인학교 교사)랑 모두 둘러앉아 하늘을 벗삼아 맛있는 밥을 먹었다. 마당엔 풍산개와 잡종개가 뛰고 그가 심은 토종꽃 백일홍, 채송화, 백합, 나팔꽃, 패랭이꽃 등 2,000종의 꽃들이 필 듯 말 듯 고개를 움찍거리고 있었다. 한쪽엔 그가 깎아 만들고 있는 그를 닮은 장승들이 소나무에서 변신을 꾀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인사가 입에 붙은 아이들은 그 자리엔 보이지 않았는데, 아마 어느 도서실 책꽂이가 붙어 있는 곳에 앉아 세상을 따로 즐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맑은 하늘 아래 어른은 강물 고기를 벗삼고, 아이는 어느 길 모퉁이에서 만난 소녀랑 손을 잡았을지도….

글쓴이 이인영은 아산재단 편집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