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서정 가을의 색을 찾아서 김용택



이 글을 쓰는 지금 하늘은 눈이 시리게 푸르다 못해 조금만 오래 쳐다보고 있으면 어지럽다. 하늘이 이렇게 끝없이 깊고 맑은 날 그 하늘 아래 사는 나는 때로 까닭 없이 설레고 허전해 두 손이 맞잡아진다. 무엇인가 잃어버린 것 같고 무슨 일인가 빼먹은 것만 같은데 내가 사는 이 산중은 지금 눈길 가는 곳마다 꽃이요 단풍이다. 저것들이, 저 들꽃과 저 만산에 단풍들이 나를, 가만히 있는 나를 이리 흔들어 너도 단풍 들어라 보챈다.

이 가을에 어찌 저 들에 핀 들꽃들과 저 산에 단풍만 고우랴. 단풍은 이 땅의 농부들이 땀 흘려 가꾼 곡식들로부터 온다. 산골짜기 작은 논다랑이 논두렁 가에 구절초 꽃 피면 산그늘 덥힌 벼들은 가슴이 서늘하도록 샛노랗게 물이 들고 노랗게 물드는 콩밭에 수수들이 붉게 물들며 고개를 수그린다. 우리들에게 이 땅의 잘 익어가는 작은 골짜기에 논이 없고 저 너른 들의 황금벌판이 없다면 가을은 가을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저 만산의 붉은 단풍들이 그 무슨 소용이 되겠는가. 가을은, 단풍은 그렇게 곡식들로부터 시작이 된다.

제일 처음 단풍 물이 드는 나무는 어느 날 아침 느닷없이 뻘겋게 나타나 나 여기 있었소, 하며 소리치는 뿔 나무이다. 저 혼자 낮술에 벌겋게 취한 뿔나무가 산에 나타나면 뒤이어 서서히 산이 물들어가고, 마을 뒤 안에 붉은 감잎이 지면 감이 단풍이 되어 매달리고 마을 앞 아름드리 느티나무는 황금색으로 물들어 세상의 아침을 깜짝 놀라게 한다. 마을마다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어 노랗게 일어서서 지는 햇살을 받아 앞산 뒷산과 단풍 다리를 놓아 만산에 가지가지 색색이 단풍물이 들면 산에 강 언덕에 억새꽃과 갈대꽃이 흰 손을 쫙 펴고, 풀이란 풀과 나무란 나무들도 최선을 다해 꽃을 피우고 씨가 익는다.

하루가 다르게 물들며 변해가는 산의 모습을 보며, 창밖 오동나무 잎 부딪치는 소리를 듣는 이 가을에 외롭지 않고 쓸쓸하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으랴. 달 뜬 가을밤에 밖에 나가 텅 비어 넓은 하늘에 뜬 달을 올려다보며 인생을 되돌아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 바람이 불고 마른 감잎이 마당에 뒹구는 소리에 잠자리를 뒤척이지 않을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으랴. 그렇게 뒤척이며 지샌 아침 서리는 하얗게 내려 있고, 산은 어제보다 더욱 붉고, 곱다. 가을은, 가을은 그렇게 깊어가면서 사람들과 함께 세상을 붉게 물들이는 것이다.

사람들이 불 같이 활활 타오르는 단풍을 보러 단풍 구경을 간다. 내 맘도 저렇게 훨훨 무엇엔가 태워보고 싶어서 단풍 물든 산을 찾는다. 그러나 아무리 곱고 예쁜 꽃도 아무리 불 같이 타는 고운 단풍도 임이 없다면 사랑하는 그이가 없다면 그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저 해지는 서산마루 지는 햇살을 받아 하얗게 나부끼는 억새를 따라 갈, 길이 없다면 억새와 단풍이, 저 아름답고 고운 골짜기가 다 무슨 소용이리오. 사람들아, 이 빛 좋고 단풍 고운 가을, 쓸쓸한 사람은 더욱 쓸쓸할 것이요 그리워 애가 타는 사람은 그리움에 더욱 사무칠 일이다. 목메이게 사랑을 찾는 사람은 저 붉게 물든 단풍나무 아래에서 사랑을 얻을 것이요.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이 더욱 깊어질 것이다. 그러나 떠난 사랑에 우는 사람아 한번 떠난 사랑은 이 가을, 다시 오지 않으리! 그러고 저러고 이러고 간에 왼 산에 단풍이랑게, 단풍이여, 전라도 말로 단풍이랑게. 워매 어쩐대야 저 단풍, 참말로 혼자는 못 견디겠는디. 아으, 미치겄네 저 단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