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안과 밖 “나도 알코올 중독 환자였습니다” 박인숙



‘가톨릭 알코올 사목센터’의 허 근 신부는 자신이 겪은 고통을 거름삼아 숱한 사람들을 구해내는 가톨릭 성직자다. 술과의 싸움에 져 몸도 마음도 허물어졌던 그는 술 중독에서 벗어나려는 이들에게 행복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고 있다.

서울역 뒤편, 우리나라 최초(1892년)로 지어진 중림동 성당 옆에 가톨릭 알코올 사목센터가 있다. 소장 허 근 신부(54)를 중심으로 상담심리학자, 정신보건사, 의사 등 전문가들이 술 중독자 치유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곳이다.

99년 문 연 이곳에서는 초, 중, 상급 각각 2개월 과정의 교육 및 치유 프로그램을 통해 연평균 2천여 명의 중독자가 술을 끊을 수 있도록 도왔다. 아울러 단주에 성공한 이들의 적응을 돕는 회복자 모임, 중독자 옆에서 고통을 겪어온 가족을 위한 상담과 교육 등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외부 강의와 세미나 등을 포함해 해마다 1만여 명의 알코올 피해자들을 만나온 센터는 창립 6주년을 기념해 지난 가을 ‘중독학 전문학교’를 열었다. 술은 물론 도박과 마약까지 폭을 넓힌 ‘중독 치료사’를 길러냄으로써 보다 많은 이들이 중독에서 해방되게 하기 위해서다.

맹장염 고치듯 수술해서 나을 수 있다면 오죽 좋을까. 온갖 수단과 핑계를 동원해 술 마시는 것에만 몰두하고, 안 마신다고 하면서도 몇날 며칠씩 빠져들 만큼 술 조절 능력을 상실한 상태가 알코올 중독이다. 가족이나 직장도 뒷전이 되다보니 배우자는 물론 자녀까지 가족관계는 파괴되고, 몸은 만신창이가 되고, 경제적 무능력에 빠져 끝내 모든 것이 황폐화 되고 만다. 본인은 물론 가족과 사회에까지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원인임에도 의학적 질병으로는 인정되지 않고, 소수 의료기관의 전문의와 몇몇 단주모임에서만 문제를 다룰 뿐 전문 인력과 기관은 매우 부족한 형편이다.

“일단 중독이 되면 지능과 정서, 의지는 바닥에 떨어지고 영혼마저 병들고 맙니다. 후회와 죄책감으로 다시는 안 마시겠다고 수없이 다짐해도 어리석은 악순환만 계속되지요. 저 역시 그랬습니다. 그건 중독자의 인격이 타락했거나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중독 자체가 계속해서 술을 찾도록 만들기 때문이에요. 알코올 중독은 신체적, 정신적, 영적 문제가 얽힌 총체적 질병입니다. 적절하고 올바른 치료를 받아야 건강한 삶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숱한 문제를 계속 일으키면서도 중독자들은 대개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먼저 중독의 단계를 파악하고 진단에 따라 치유 프로그램을 시작한다. 알코올 의존에는 상담치료에서부터 약물치료 가족치료 심리치료 사회기술훈련 행동치료 등 여러 가지 방법이 동원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이 문제를 인정하면서 희망을 갖는 것, 다음이 가족들의 꾸준한 지원이라고 허 근 신부는 말한다.

‘나는 알코올 중독자’

까까머리 소년, 중학생 때부터 14년이나 신학교 담장 속에 갇혀 사느라 술과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던 그가 알코올 중독의 덫을 만난 것은 해병대 군종신부로 발령받은 서른 살 때다. 젊은 체력에 와일드한 해병대 특성은 앉은 자리에서 소주 8병 맥주 24병을 거뜬히 마셔대는 술꾼으로 만들었다. 제대 후 10여 년 간 성당 주임신부를 하면서도 혼자 있어 적적한 저녁시간을 신자들과 어울리며 술자리에서 보냈다.

횟수가 잦아지면서 점점 상태가 나빠졌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욕이며 싸움을 하고, 다음날에는 기억을 못하고…. 수치심을 달래려고 다시 술에 젖어들기를 거듭하면서 아침에 깨어나지 못해 미사를 집전하지 못하기도 했다. “신부는 미사를 집전하면서 신자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입니다. 그걸 제대로 하지 못하니 이름만 신부였죠. 신자들과 많은 문제가 생겼고, 사제 생활마저 위기를 맞았지만 가까운 사람들이 술 끊으라고 할 때마다 분노하며 내가 중독자라는 사실을 부인했지요.”

어느 날 밤에는 술자리를 끝내고 지하도에 들어갔다가 성당 쪽 출구를 찾지 못해 아침 해가 뜰 때까지 헤맸다. 사제관인줄 알았는데 남의 집 대문 앞에서 자고 있을 때의 참담함이란. 그렇게 술은 성스러운 직분을 수행하는 성직자를 엉망으로 만들었고, 결국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술 중독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그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나는 알코올 중독자’라는 책에 발가벗은 듯한 고백과 함께 자세히 풀어놓은 허 근 신부. 스스로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깨닫게 해준 중독에 오히려 감사하면서 신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섰고, 알코올 중독 환자를 되살리는 새로운 소명을 살면서 기쁨과 슬픔 쌍두마차가 이끄는 희비쌍곡선을 그려나가고 있다.

“알코올 중독이 더 무서운 건 공동의존증(Co-dependency) 때문입니다. 중독자가 있으면 가족들도 그에 버금가는 정신적, 신체적 타격을 입지요. 중독이 질병이란 점을 모르고 씨름하다가 문제를 더 키우는 일이 많아요.”

일류 대학을 나와 대기업에 다니던 한 남성이 술에 빠지면서 식구들에게 폭언을 일삼으며 잠을 못 자게 했다. 시달리던 아들이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등 문제가 생기자 어머니가 찾아왔고, 가족치료 모임에 참석하면서 남편도 단주모임에 나왔다. 현재 그 남성은 직장에 다니면서 아들을 유학 보낼 만큼 잘 회복됐다. 반면 문제가 심각하기에 별거하라고 충고했던 한 주부가 결국 남편을 살해하고 말았다는 것을 법원 연락을 통해 알게 된 적도 있다. 한 여성 화가는 다섯 번째 치유모임에 나오는 날 위독하다는 전갈을 보냈다고 한다. 신부인만큼 영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몸이 이미 다 망가진 상태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안타까워한다.

“너무 늦기 전에 절망 대신 희망을 찾아나서야 합니다. 이곳에 오는 분들을 사랑으로 대하며 몸과 마음은 물론 영혼을 구하고자 힘쓰고 있습니다. 한 영혼을 일으키면 딸린 가족이 정상으로 되살아나고, 그만큼 사회가 건강해 지니까요.”

매일 중독자와 가족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분기별 피정도 갖는 센터에서는 매달 셋째주 금요일 저녁 7시 일반인을 위한 공개특강도 한다. 울고 웃고, 후회하고 깨우치기도 하면서 술 중독에서 벗어나고자 희망을 다져나가는 모임에서 참석자들은 한 마음으로 기도한다.

‘저희 모두에게/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은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평온함을 허락하시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과감하게 변화시킬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시고// 이를 올바로 식별하는/ 지혜를 주소서.’

* 가톨릭 알코올 사목센터
   (02) 364-1811~2
   http://www.sulsul.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