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세상은 가까운 것과 먼 것으로 이루어졌다 ? 이택광


기억 끄집어내기
원근법이란 말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미술시간 정도면 들어볼 수 있는 말이기도 하지요. 어떻게 보면 이 원근법은 멀고 가까운 사물을 그림 속에 담아내는 기술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 원근법은 보기와 달리 아주 깊은 철학적 의미를 간직하고 있답니다. 지금부터 내가 할 이야기는 바로 이 원근법에 담겨 있는 철학적 지혜에 관한 것입니다.
아마 기억을 더듬어 본다면, 미술 교과서에서 익숙하게 보았던 한 풍경화가 떠오를 것입니다. 좁다란 길 양편으로 키다리 가로수들이 쭉 뻗어 있는 그림 말입니다. 그때 미술 선생님이 말씀하시던 것들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소실점이라는 말이 기억날 것 같습니다. 원근법에 맞추어 그려진 풍경화는 소실점을 어떻게 정해놓느냐에 따라서 같은 풍경을 전혀 다르게 보이도록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마 미술 선생님은 어떻게 소실점을 설정해서 풍경화를 그려야 하는지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셨을 것입니다.
유럽 여행을 가서 관광 삼아 큰 저택들의 정원을 한번 구경해본 분들이라면, 각종 나무들과 화초들로 잘 짜여진 그 정원들이 서로 엇비슷한 꼴을 하고 있다는 것을 금방 눈치챌 수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 이런 정원들은 저택을 중심으로 뻗어나간 대로 양편으로 여러 작은 건축물들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서양사람들이 이렇게 정원을 디자인한 까닭은 앞서 우리가 미술시간에 배웠던 그 원근법의 원리에 따라서 풍경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서양사람들은 정원도 자연을 가공해놓은 예술품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정원사들이 큰 전정가위로 나무들을 가지런하게 다듬어놓는 까닭도 여기에 있답니다. 울퉁불퉁한 자연의 모습을 깎고 다듬어서 아름답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서구 문화의 비밀
이렇게 원근법의 원리는 단순하게 미술 작품뿐만이 아니라 서구 문화의 일상 생활을 이루는 아주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이 원근법의 원리를 잘 이해하면, 서구 문화에 내장된 많은 비밀들이 풀릴 수 있다는 것이지요. 원근법의 원리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많았지만, 기실 이런 비판 또한 원근법 자체의 부정으로 나아가지는 못했습니다. 이런 사실은 지구를 떠나서 살 수 없는 한, 여전히 우리는 원근법의 원리를 통해서 세상을 이해할 것이라는 점을 암시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원근법의 원리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절대적 소실점을 기준으로 해서 나머지를 상대화시켜 버리는 원리가 바로 원근법의 원리입니다. 다소 어려운 정의입니다만, 한번 쉽게 생각을 해봅시다.
누군가 높다란 인생의 목적을 정해놓은 사람이라면, 이 목적을 달성하는 지점을 기준으로 해서 해야 할 일들의 순서와 경중을 정할 것입니다. 이 목적에 비추어서 어떤 일은 빨리 해야 할 것이고, 또 어떤 일은 나중에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일이 중요하고 어떤 일이 덜 중요한 일인가 하는 판단도 이 목적에 맞추어서 하지 않을까 합니다. 말하자면, 이 목적이야말로 원근법의 소실점과 같은 것입니다. 소실점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 점은 우리 인생의 목적처럼 상상된 그 무엇일 뿐이죠. 그러나 우리는 이 소실점을 기준으로 해서 다른 사물에 대해 판단을 할 수가 있는 셈입니다.
원근법의 특징을 잘 드러내주고 있는 ‘와또의 원경(The Perspective, 오른쪽 그림)’이란 그림을 보시면 이 원리의 핵심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와또의 그림은 멀리 보이는 그리스 신전 모양의 건물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는 사람들과 풍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전 모양의 건물을 소실점으로 해서 차별화되어 있는 대상들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이 그림이 묘사하고 있는 각 대상들의 차이는 소실점을 기준으로 해서 성립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 자세히 말해 보자면, 이 그림에 묘사되어 있는 인물들이나 풍경의 사물은 소실점을 기준으로 해서 가까운 것과 먼 것으로 구분된다는 뜻입니다.

더 들여다보기
상당히 흥미롭게도, 만약 이런 소실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떤 것이 멀리 있는 사물이고 어떤 것이 가까이 있는 사물인지 구분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한마디로 판단 기준이란 것이 존재할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현대 문화의 상당부분이 이런 원근법 원리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많은 미학자들이 언급하듯이, 재현의 문제에 대한 근대적 해결 방법이 바로 원근법이었습니다. 재현이란 말은 인간의 의식 밖에 있는 사물을 인간의 의식이 그대로 베껴 냄으로써 그 사물을 알아볼 수 있다는 믿음을 지칭합니다. 현대 문화를 둘러싸고 있는 미학 논쟁들은 이런 재현의 문제에 대한 논란 자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원근법이란 간단히 말해서 3차원 공간을 평면에 재현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한번 세계 지도를 상상해 보면 이 원리를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동그란 지구를 평면에 옮기기 위해 지도는 척도를 사용합니다. 이처럼 원근법은 재현 대상의 리얼리티를 숫자로 계산해서 비례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런 원근법을 우리는 근대 과학의 원리가 세속화되어 나타난 서양 문화의 구조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원근법은 세상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근대 서구인들의 세계관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서구의 철학자 아도르노는 이런 서구 예술의 특징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 예술을 ‘합리성의 산물’로 보기도 했답니다. 물론 이런 견해에 대한 반론도 많습니다만, 굳이 이에 대한 복잡한 이야기를 끄집어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이쯤에서 줄이는 게 좋겠습니다.
다만, 여기에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할 것은 근대 서구에서 예술이 다분히 인간 이성 활동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일 것입니다. 예술이 감성의 산물이라고 알고 계신 분들에게는 좀 충격적인 사실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깨달음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지혜는 원근법이라는 과학적 사유를 통해 현대 문명이 비로소 가능했다는 것이겠지요.

글쓴이 이택광은 문화평론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