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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담인① 정담회 5기, 이찬섭 남광토건 소장 채승웅

남광토건에 근무하며 울산-포항고속도로 2공구를 담당하고 있는 이찬섭(53) 소장은 영남대 도시공학과를 졸업하고 20여 년간 건설현장에 젊음을 바친 중견 건설인이다. 아산장학생 모임인 정담회에도 열심히 참여해 대학교 3학년 때는 대구•경북지역 회장을 맡았고, 2005년부터 2008년까지는 동문회장을 역임했다.

이찬섭 씨는 1961년 대구에서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집에서는 개구쟁이였지만 학교에서는 조용하고 눈에 잘 띄지 않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성적은 중상위권이었다.

“형들이 다 토목과를 전공했거든요. 그래서 저도 진로를 선택해야 할 시기에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관심을 가지게 됐죠. 그런데 어머니께서 ‘넌 형들과 다른 과를 선택하라’고 하셔서 비슷한 과를 찾다가 1980년 영남대학교 도시공학과에 입학했습니다.”

2학년이던 1981년에는 아산장학생으로 선발됐다.
“1학년 성적이 3등이더라고요. 그런데 1, 2등 한 친구들이 다른 장학금을 선택해서 제가 아산장학금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뒤에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치기 싫어서 열심히 공부했죠. 그래서 1등으로 졸업했습니다. 아산장학금이 저에게 큰 동기를 부여한 셈이죠.”

대학교 재학 시절 그는 동아리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1학년 때는 산악회에서, 2학년 때는 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대구•경북지역 아산장학생 회장으로 선출된 3학년 이후로는 동아리 활동을 접었다.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었는데 회장 일을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성격이 바뀌더라고요.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고, 또 많은 행사를 주최해야 했으니까요. 나중에 되돌아보니 이 시기가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산장학생 활동을 하면서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영남권 학생들이 모여서 정기적으로 개최한 ‘학술발표회’가 가장 인상이 깊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지역별로 장학생 활동이 활성화되어 있었습니다. 때로는 다른 지역 장학생들과 교류하기도 했는데 저희는 부산•경남지역 학생들과 자주 어울렸죠. 특히 그들과 같이 주최한 학술발표회가 가장 큰 행사였습니다. 장학생들의 전공이 각각이다 보니 서로를 이해하고 견문을 넓힐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정담 동문회장 2회 연임

아산장학생이 된 후 그의 인생을 바꾼 사건이 또 하나 있었다.
영남대 약대에 재학 중이던 아산장학생 친구로부터 지금의 아내(이선・3)를 소개받은 것이다. 미래의 아내에게 첫눈에 반한 그는 여러 차례 고백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40개월 동안 학사장교로 근무한 뒤 1987년 현대건설에 입사했다. 현대건설에서 근무한 초기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등 주로 해외에 나가 있었다. 중동에 근무하면서도 그의 구애는 계속됐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원유 저장시설 현장에서, 쿠웨이트에서는 저수조 공사현장에서 일했습니다. 해외에서 근무하면 6개월 근무 후 20일 정도 휴가를 나올 수 있었습니다. 1989년 휴가를 나왔을 때, 아내에게 다시 한 번 고백했고 결국 아내가 마음을 받아줬죠. 내친 김에 결혼까지 하고 출국했습니다.”

아내를 한국에 남겨두고 그가 향한 곳은 쿠웨이트였다. 당시 쿠웨이트의 정세는 꽤나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석유 공급량을 늘려 가격을 낮추고 있던 쿠웨이트를 이라크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1년 남짓 시간이 흘렀을 때, 결국 전쟁이 발발했다. 1990년 8월 걸프전의 시초가 됐던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이 개시된 것이다.

“저희 공사현장은 시가지에서 꽤 먼 곳이라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2개월 동안 통신이 두절된 현장에 꼼짝없이 갇혀 있었죠. 그때 임신 5개월이던 아내의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입니다.”

쿠웨이트에서 귀국 후 1년 동안 화천 현장에서 근무한 이찬섭 씨는 1991년 남광토건으로 회사를 옮겼다. 이후 낙동강하수처리장, 영주-감천 국도, 서안산IC, 당진-대전고속도로 등 굵직한 건설 현장 소장으로 근무했다. 지금은 울산-포항고속도로 2공구 현장을 책임지고 있다.

준공 표지석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질 때의 뿌듯함은 말로 표현 못할 정도지만 주말에만 가족 얼굴을 볼 수 있어 아쉬운 부분도 많았다. 울산 현장을 맡고 있는 요즘도 주말에만 딸 홍명(24), 규하(20) 씨와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
이렇게 바쁜 스케줄 속에서도 그는 2005년부터 2008년까지 정담 동문회장을 맡았다. 동문회장의 임기가 2년이니 회장직을 두번 연임한 셈이다. 회장 임기 중 가장 큰 행사는 2007년 ‘장학생 배출 30주년 기념행사’와 ‘정담(淨淡) 30년’ 문집을 발간한 일이었다. 동문들의 기념 문집은 ‘정담 10년’, ‘정담 20년’ 등 10년마다 한번씩 출간되고 있다. 요즘도 동문들과의 교류가 활발하다. 장학생 시절부터 평생지기가 된 이들도 있어서 1년에 네 번 열리는 정기 모임에는 꼭 참석한다.

“동문회 활동을 하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아산장학생이라는 이름 아래 모인 사람들과의 소중한 인연을 유지하고, 또 새로운 인연을 만들었다는 것이죠. 제가 어디 가서 20년, 30년 후배들과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다 동문이라서 가능한 것이죠. 회장을 그만 둔 뒤에도 후배들에게서 연락이 옵니다. 요즘은 청첩장이 자주 오더군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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