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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편지 바다를 털고 나오렴 신현림

사과꽃이 피었다 지고, 아카시아꽃과 밤꽃이 피어갈 텐데 도저히 이쁜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 캄캄한 바다에 갇힌 어린 학생들을 방치했으니 잔인하고 잔혹한 한국의 어른들이 우리 아닌가. 생각할수록 배 안의 주검들이 어른거리고 슬프기만 했다. 얼마나 더 사람이 죽고 울분을 터뜨리고 비명을 질러야 우리가 깨어날까.

페이스북에는 아이들의 무사귀환을 바랐던 기도만큼이나 무력감과 허무, 자조적인 통탄의 소리가 쏟아졌다. 지금도 여전히 아파하고 작은 움직임의 열망과 변함없는 사랑을 전하는 노란 리본의 외침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앞으로도 사람들의 마음에는 애들을 살리지 못했다는 깊은 죄의식과 슬픔이 짙게 남을 것이다.

이런 죄의식과 슬픔은 생각하며 사는 사람에게나 생기는 것이다. 이번 비극으로, 거의 생각을 안 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나는 무척 놀랐다. 선장, 선원에, 세월호 실제 주인의 행적하며 그저 어이없고 기가 막힐 뿐이었다. 상식, 상도에서 벗어나도 너무나 벗어났기에 ‘인간은 무엇인가?’를 다시 질문하게 되었다.

그래서 법과 상식의 강력함을 보여줄 정부가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기대하고 의지할 정부의 모습이 안 보였다. 나름 노력은 했겠지만, 도대체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습에 놀랄 뿐이다. 4월 25일의 스페인 여객선 화재와 비교해보면 그 대처 방식이 달랐다. 화재 사실을 파악한 선장과 선원들은 신속하게 대처했고, 스페인 해경은 화재 발생 직후 구조헬기와 선박을 보내 300여명의 탑승객을 전원 구출했다는 뉴스를 보고 우리만 왜 이런가, 그저 부끄러울 뿐이었다.

이럴수록 정신 바짝 차리고 행동해야 하건만, 생명의 존중감도 흐릿하고 살아있음의 경외심마저 잃은 게 아닐까 한다. 이런 모습은 평소 눈앞의 욕심만 많고, 인생의 참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안하고 생각조차 없다는 얘기다.

깨달음은 늘 늦게 오기는 한다. 깨어 살지 않을수록 더 그렇다. 좋은 시간이 다 지나고 나서야 좋았음을 깨닫고, 헤어지고 나서야 사랑했음을 깨닫고, 잃고 나서야 소중했음을 깨닫는다. 그 이유는 대부분 그냥 사는 데 급급하다보니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를 때가 많아서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깨어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늘 깨어 살며 앞과 뒤의 진실을 살피고, 내가 뭘 원하는지, 나 자신을 넘어 나라와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제대로 아는 게 중요하다.

국가부터 깨어 사는 마음으로 국민을 지키고, 어떤 위기에서도 굳건히 살아남게 전 국민 지혜훈련이 필요하다. 더불어 인생의 목표, 가치, 사랑과 물질의 나눔까지 진정한 삶에 대한 통찰과 깨달음이 있어야 하겠다. 이번 비극을 만든 이들의 죄업은 반드시 엄단해야 하겠지만, 이번 희생은 무엇보다도 앞으로 또 있을지 모를 희생을 막는 숭고한 뜻이 있다고 본다. 우리 모두 깨어나 희생이 헛되지 않길 기도한다.
저마다 함께 사는 사회가 빛나도록 노력하고, 다시는 이런 불행이 안 생기도록 결심해야 한다.

방금 전, 세월호에서 희생당한 학생들에게 바치는 시를 썼다. 참담하도록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고, 우리 어린 친구들의 영혼이나마 힘껏 껴안아드리면서 이 슬픈 시간 앞에 시 ‘바다를 털고 나오렴’을 전한다.


누군가 승냥이처럼 길게 울다 사라진다
숱한 너희들이 쓰러지고,
대지가 상여처럼 흔들린다
언제나 새 사건이 헌 사건을 밀어냈다
푸른 뱀이 몸을 휘감다 나갈 뿐
시끄럽다가도 순식간에 잊혀졌다
이번에는 다르구나
잊어서는 안 되는 비극이 되었구나
너희들을 지켜주지 못한 나와 어른들을
이 슬픈 뱀이 휘감고 놓질 않는구나
미안해서 심장이 태워지듯 아프고 아프구나
시간을 되돌려 너희들을 모두 구해주고 싶구나
어여, 슬픈 바다를 털고 나오렴
아직 따뜻한 몸이구나
살았구나 살은 거지
오늘 밤 불쌍한 모두를 데려다 잠재워야겠구나
거대한 팽이처럼 소용돌이치는 바람이 멈출 때까지
회오리 바람이 그칠 때까지
추운 손들이 울부짖고
고무풍선처럼 터져버리고
파랑새가 날아가버리고


※ 신현림 : 경기도 의왕 출생. 국문학과 졸업, 디자인대학원에서 순수사진 전공. 시집<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 <세기말 블루스> <해질녘에 아픈 사람> <침대를 타고 달렸어>, 세계시 모음집 <딸아, 외로울 때는 시를 읽으렴 1•2>, 에세이집 <나의 아름다운 창> <신현림의 너무 매혹적인 현대미술> <매혹적인 현대사진> <다시 사랑하고 싶은 날> 등 출간. 세 번째 사진전 ‘사과밭 사진관’으로 2012 울산 국제사진페스티벌에서 한국 대표작가 4인 중 한 명으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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