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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에서 만난 예술가 대한민국 조경계의 대모(代母) 김재영



콘크리트 갈라진 틈에서도 솟아나고 있는
저 저돌적인 고요
단단하고 건조한 것들에 옮겨 붙고 있는
저 촉촉한 불길

- 김기택의 시, ‘초록이 세상을 덮는다’ 중에서

인류는 서양과 동양에서 서로 다른 문명을 일으켜왔지만, 낙원에 대한 상상만큼은 유사했다. 무릉도원이든 에덴동산이든 인간이 행복함을 느끼는 장소는 거대하고 화려한 건축물이 아니라, 꽃과 과일이 가득하고 맑은 물이 흐르는 자유로운 ‘땅’이었다. 인간(homo)이 흙(humus)으로 빚어진 존재이기 때문일까. 그런데 모든 것이 저절로 주어지는 낙원에서와 달리 인간의 정원은 창조되고, 지켜지고, 돌보아져야 한다.

투명한 햇빛이 나뭇가지 사이로 빛나는 정원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조경가 정영선(73・서안 대표) 선생을 만났다. 그녀는 버려지고 황폐해진 땅을 아름다운 정원, 푸르른 공원으로 만드는 일에 평생을 바치다시피 했다.

“경북 경산의 할아버지 과수원에서 태어났어요. 어린 날 기억을 더듬으면, 과수원 언덕에는 언제나 사과 꽃이 만발했고 바위 밑에는 백합과 매리골드가 한창이었어요. 교사였던 아버지도 학교와 사택을 온통 꽃과 나무로 꾸며놓으셨어요. 어느 날, 아버지가 가져오신 스위스 달력을 보았는데, 정말 아름답더라고요. 전쟁 뒤의 헐벗은 산만 보았던 제겐 충격이었지요. 스위스의 산처럼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고 싶다는 열망을 품고 서울대 농학과에입학했어요.

당시에는 조경학과라는 게 없었거든요. 만날 벼농사, 콩농사 짓는 법만 배우다가 졸업했어요(웃음). 한동안 잡지사 기자로 일했는데, 당시 훌륭한 건축가 선생님들을 찾아다니면서 인터뷰도 많이 했지요. 그러다가 서울대 환경대학원에 조경과가 생긴다는 소식을 듣고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어요. 학위 마치면서 바로 교수로 부임해 강단에 섰어요. 헌데 결혼해서 아이 낳아 기르는 딸이 안쓰러웠던지 어머니께서 멀리까지 출퇴근하지 말고 조경사무실을 차려 보라고 권하더군요. 그렇게 해서 서안을 차렸는데, 국가적 차원에서 벌이는 개발 사업이 많던 시기라 일감도 자연 많았지요(웃음).”


조경가들이 뽑은 최고의 공원

어디 그래서만일까. 열과 성을 다해 작업에 임하는 걸로 소문났기에 ‘한국 조경계의 대모’라는 별명까지 얻었을 터다. 야외작업을 하느라 햇볕에 그은 얼굴에 번지는 소탈한 미소가 보기 좋았다.

<정원을 말하다>의 저자 로버트 포그 해리슨의 말대로 실제의 정원, 혹은 상상 속의 정원은 오랫동안 역사의 광란으로부터 피난처가 되어왔다. 신들의 정원은 아득히 멀리 있었고, 플라톤의 아카데미아나 황제의 정원은 일반인이 근접하기 어려운 곳에 실재했다. 그에 비해 소시민들 앞에 가까이 다가와 있는 현대의 공원은 얼마나 친근한가. 푸르른 자연과 격리된 삶을 살아가야 하는 도시인들에게 공원은 무엇보다 소중한 피난처이며 생명성을 회복하는 재생의 공간이다.

‘조경가들이 뽑은 최고의 공원’으로 선정된, 선생의 대표작 중 하나인 선유도공원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레 나왔다. 선유도공원은 23년간 수돗물을 공급하던 정수장에 녹색의 자연을 끌어들이되, 그 공간의 역사와 땅의 기억을 존중하면서 기존의 낡은 공간을 창조적으로 재탄생시킨 경우였다. 낡은 것의 재생, 산업유산에 대한 문화적 계승이라는 조경의 시대적 패러다임을 선보인 국내 첫 작품으로 조경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우리는 산업화 과정에서 생겨나, 그 기능을 다해 버려진 폐건물과 부지를 무조건 부수고 갈아엎는 공사를 원치 않았어요. 낡은 건물이지만 그 흔적을 남겨놓음으로써 후대로 하여금 기억하고 성찰하게 했지요. 그리고 식물들을 불러들여 땅의 생명성을 되살려 놓았어요. 거기에 도시인을 위한 문화적 공간, 평안한 휴식처가 되길 바라는 마음도 담았고요.”
산업과 문화, 인공과 자연,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넘나들며 통섭하고 융합하는 공원. 그곳에는 오래된 콘크리트 시설과 풀, 나무, 호수 등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었다.

“조경은 혼자 하는 작업이 아니에요. 여러 분야의 전문가와 일꾼들이 지혜를 모으고 힘을 다해야 완성되지요. 협력과 조화, 그리고 무엇보다 땅을 아끼고 사랑하는 심성이 필요합니다”라고 선생은 말한다. 실제로 그녀는 장화를 신고 직접 큰 돌덩이를 들어 자리 잡게 하거나, 풀과 나무를 심느라 평소에는 점퍼 차림으로 다닌다고 했다. 그나마 오늘은 잘 차려입었노라, 고백하며 환히 웃는 모습에서 나이를 무색케 하는 생명력이 넘쳐났다.

선생의 또 다른 작품인 광화문광장이 최악의 조경으로 선정된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선유도공원은 ‘원안대로 시행’한 경우였어요. 그에 반해 광화문광장은 우리가 현상 설계에서 당선됐지만 원안대로 된 게 하나도 없어요. 나는 광화문광장을 텅 빈 채로 역사의 무게감을 느낄 수 있는 국가상징 광장으로 조성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거기에다 세종대왕 동상을 앉히고, 유치한 꽃밭을 만들고 잔디까지 깔더라고요. 죽어도 안 된다고 반대했는데도 마음대로 만들어놨으니 꼴찌로 선정된 건 당연해요.”

청계천 조경에 대해서도 “공직자들이 급하게 사업을 진행하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욱 친환경적이고 생태적인 곳이 되었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조경을 건축의 부속물로 인식하는 사람이 많다. 이에 대해 선생은 “건축과 조경은 주종관계가 아니라 협력관계다. 조경과 건축이 서로 잘났다고 떠들면 좋은 작품 안 나온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발 딛고 사는 땅을 다루는 작업이 조경이에요. 건축가에게 땅은 건물 지을 단단한 기반으로 여겨지지만, 조경가에게 땅이란 식물을 자라게 하는 생명체예요. 땅과 빛과 물과 식물의 유기적 관계는 물론, 거기서 살아갈 사람들의 공간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생각하는 게 조경이라고 봐요. 살아있는 생명과 시간을 다룬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지요. 그리고 조경이 예술이냐 아니냐, 논란이 되어왔지만 대체로 자연과 문명이 만나는 지점에 조경 분야가 자리 잡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요.”

정작 본인은 후배들 앞에서 스스로를 ‘청소가’라 부른다고 했다. 자연에 뭔가를 덧붙이는 사람이기보다는 ‘정리’하는 사람이길 원한다면서.

“우리는 유한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지구가 소비재라는 생각을 벗어버리고, 잠시 들렀다 떠나는 손님의 마음으로 후손에게 건강한 자연을 물려주어야 해요. 그것이 대지를 다루는 조경가에게 요구되는 덕목이에요.”

인류 문명의 역사는 파괴를 서슴지 않았다. 그렇기에 한편에서는 온전한 몸과 정신을 보존하기 위해 애써왔다. 치유, 혹은 속죄의 힘을 찾아내어 우리 안에서 자라나게 하는 일. 서울아산병원의 숲은 그러한 치유의 힘을 특별히 중요시하면서 만들었다고 했다.

“외부공간이 그렇게 넓은 병원이 별로 없어요. 한강 그리고 주변의 자연과 어울리는 숲을 만들어 보자, 그러고는 신관 앞 ‘생명의 숲’에 많은 초화들과 식물들을 심었어요. 생명이 자라는 모습, 계절마다 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동관 앞은 관목들과 침엽수림, 물소리나 새소리를 통한 치유를 염두에 둔 ‘치유의 숲’으로 조성했고, 편의시설들이 마련된 서관 앞은 ‘만남의 숲’으로 만들었어요. 잘 자라는 식물을 보면서 환자는 치유를, 보호자들은 휴식을, 스트레스 많은 의사들은 커피 한 잔이라도 아름다운 숲 속에서 마실 수 있는 여유를 주고자 했지요.”

무심히 지나쳤던 나무며 풀이 하나하나 새롭게 눈에 들어왔다. 모두 누군가의 돌봄과 염려로 살아가는 고귀한 생명체들이었다. 그리고 그 생명체들은 다시 누군가를 치유해 주는 아름다운 순환이 그려져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선생의 작품 목록에는 한국 정원의 백과사전이라고 불리는 호암미술관의 희원과 현대중공업 영빈관이 들어있다.
“우리나라 조경은 서구와 다를 뿐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과도 달라요. 우리 조상들은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정원을 인위적으로 만들기보다 경치 좋은 곳에 작은 정자를 짓고 그 주변 경관을 감상하는 걸 좋아했지요. 거기서 시를 짓거나 음악을 즐기기도 하고요. 현대중공업의 영빈관을 고치면서도 그 전통을 활용했어요. 기존에 있던 키 큰 나무들을 옮겨 심고, 대신 확 트인 바다 풍경을 끌어들였어요. 결과적으로 아주 멋진 정원이 되었지요.”

국토가 아프니 마음도 아프다

고대 서사시 <오디세이아>의 주인공 오디세우스는 아름답고 영원한 칼립소의 섬에 만족하지 못하고 날마다 해안가로 가서 문제투성이 고향을 그리워한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을 잘 드러낸다. 자기 자신을 가꾸려는 노력을 통해 존재하는, 고민 속에서 자라나는 존재인 인간. 그러한 본성은 끊임없이 돌보고 염려하면서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의 마음에 잘 나타난다.
요즘 선생의 고민 대상은 더욱 광범위해졌다. 지방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대면해야 하는 버려진 쓰레기와 난개발로 더럽혀진 풍경이 너무 가슴 아프다고 했다. 게다가 4대강사업 한다면서 마구 파헤친 결과, 자연스럽고 아름답던 강 풍경이 사라지고 생명체들도 수난을 당하는 걸 보면 화가 난다고 했다.
“얼마 전 이포보 앞을 지나면서 눈을 감아버렸어요. 이상한 공룡 알 같은 걸 만들어 놓고서 좋다고 하니, 원. 산과 계곡, 강과 평야가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우리 강토가 이렇게 아프니까, 내마음도 너무 아파요. 대도시만이 아니라 온 나라를 고르게 돌보아야 할 텐데…. 요즘엔 학생들과 국도 따라 걷기를 하면서 문제점을 공유하려고 해요.”
그녀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픈 자식을 염려하는 어머니처럼. 고대 우화에 나오는 돌봄과 염려의 여신 쿠라(Cura)처럼. 그녀의 절실한 바람이 이 시대 모든 이의 가슴에 전해져 풀씨처럼 싹을 틔운다면, 더럽혀지고 병든 땅도 조금씩 회복되지 않을까.
날이 저물고 있었다. 정원 한쪽에 마련된 연못에도 달이 뜨고곧 별이 뜰 것이었다. 초목들의 어머니를 만난 것처럼 푸릇푸릇하고, 고향 땅을 밟은 것처럼 푸근한 저녁이었다.

※김재영 : 1966년 경기도 여주 출생.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문학박사). 2000년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 받으며 데뷔. 소설집 <코끼리>, <폭식> 출간. 외국인 노동자의 고단한 삶을 그린 단편 ‘코끼리’가 고등학교 문학교과서에 수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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