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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 이야기 대통령 아들 살린 최초의 감염증 치료제 이재담

하버드 졸업 직전의 건강한 청년 루즈벨트 주니어가 급성부비강염으로 매사추세츠종합병원에 입원한 것은 1936년 11월이었다.

부비강에서 오른쪽 뺨 안쪽까지 번진 염증으로 인한 농양 때문이었는데, 주치의였던 토비 박사는 수술로 고름을 배출시킬 생각이었지만 환자의 상태가 갑자기 악화되어 수술을 할 수 없었다. 세균 검사에서는 연쇄상구균이 확인되었다.
12월 중순, 입원 3주가 지나자 환자는 의식이 몽롱해졌으며, 위험할 정도로 체온이 오르고, 호흡곤란까지 호소하였다. 기침할 때 피가 섞여 나오기도 했는데 이는 세균이 목 안쪽 작은 혈관을 파괴했다는 뜻이었다.

방치할 경우 패혈증으로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토비 의사는 마지막 수단으로, 아직 실험 단계에 있는, 최근 독일에서 개발된 세균감염증 치료제인 프론토실을 써보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보호자인 영부인 엘레노어 루즈벨트 여사에게 동의를 구했다.

한편, 미국에 프론토실을 가장 먼저 도입한, 1936년 당시 미국 설파제 치료의 최고 권위자는 존스 홉킨스의 페린 롱 박사였다. 12월의 어느 날, 롱 의사가 동료들과 있는 자리에 외부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를 건네받은 롱은 “장난치지 마세요. 당신이 미세스 엘레노어 루즈벨트일 리가 없지요”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몇 초 후 다시 울린 전화를 받은 롱은 잠시 귀를 기울이더니 정중하게 대답했다. “예. 미세스 루즈벨트, 제가 닥터 롱입니다.” 날이 갈수록 상태가 나빠지는 아들에게 실험적인 약을 써야 할지 고민하던 영부인이 약의 효과와 부작용에 관해 자세히 듣기 위해 전화를 한 것이었다.

영부인의 동의를 얻은 토비 의사는 환자에게 프론토실 주사에 더해 바이엘 미국 지사로부터 특별히 입수한 경구용 설파제도 한 시간 간격으로 투약하는 치료를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어느 정도가 적당한 용량인지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는 상당히 공격적인 치료 방침이었다. 몇 가지 사례가 논문으로 알려지긴 했지만, 정작 투여해보니 설파제의 효과는 의료진이 보기에도 놀라웠다. 투약 개시 후 이틀째에 환자의 열이 내리기 시작했고, 수일 만에 위험한 상황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의 아들을 살린 이극적인 에피소드는 단숨에 설파제 붐을 불러왔다. 12월 17일의 뉴욕타임스는 치료과정을 톱기사로 소개하면서 ‘새 약이 젊은 루즈벨트를 고치다’라는 제목을 달았다.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라디오 방송과 신문, 잡지들이 앞을 다투어 이 사건을 다루었고,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미디어들의 ‘기적의 약’에 관한 보도는 미국인들에게 설파제의 효능을 각인시켰다.

미국의 제약회사들은 때를 놓칠세라 설파제 생산에 뛰어들었다. 다음해인 1937년부터 급격히 증가한 미국의 설파제 생산량은 페니실린이 실용화되기 직전인 1942년에는 무려 5천 톤에 이르렀다. 한편 건강을 되찾은 루즈벨트 주니어는 다음해 6월 결혼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훈장을 받았으며 전역 후에는 하원의원으로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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