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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가 산책 파괴와 맞서 싸운 고집 센 작가 정재숙




여러 해 강운구(66) 선생을 뵀지만 작업실에 들어서기는 두 번째다. 광화문 언저리 9평 남짓한 작고 좁은 그 방은 그이가 주로 암실로 쓰면서 고즈넉한 오후를 보내는 곳이다. 단단하게 생긴 책상과 의자 두어 개, 선반에 빼곡한 책과 토기 몇 점…. 군더더기 없는 공간 구성이 그의 사진을 닮았다.

“여기가 내가 노는 데거든요. 성과는 빼고 양(量)은 할 만큼 했으니 놀아도 되는 권리는 획득했다고 봅니다. 문화적 깊이가 있는 나라라면 좀 편하게 놀 수 있겠지만 난 불편하게 놀고 있죠. 그나마도 다행이고.”

일간지 사진기자로 일한 10여 년을 빼고는 매인 직장 없이 늘 프리랜서와 전업 작가로 살아온 그이다운 말이다. 1970년 초부터 ‘새마을 운동’과 산업화의 여파로 피폐해지는 농촌을 찍기 시작한 그는 75년 동아일보 기자들의 ‘언론수호투쟁’에 가담해 농성하다가 해직되었다. 그 무렵을 돌아보는 회고도 그이답다.

“성향이나 기질로 투쟁에 앞장설 입장은 못 되었고, 단지 정당한 쪽에 머리 수 하나 보탠 것이 유일한 일이었죠.”


‘곧 죽어도 나는 작가다’란 뚝심으로 버틴 40년
사진 일에 대한 인식이나 평가가 몹시 박하던 그 시절, 그는 출장 다닐 여비조차 없을 때가 많았다. “나도 걷는 건 좀 한다”는 그의 말은 그래서 두 가지 의미로 들린다. 현장에 자신의 두 발로 접근하는 다큐멘터리 작가로서의 뚝심이 그 하나요, 차비가 없으면 걸어서라도 간다는 절박함이 다른 하나다. “내가 일관되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곧 죽어도 나는 작가다’ ‘작가는 혼자 버텨내어야 한다’라는 신념 때문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1973년에 찍은 전북 장수군 장수면 수분리 사진이 한 예다. 장수에 갔다가 대충 돌아본 뒤에 남원으로 가려던 작가는 버스가 세 시간이나 뒤에 떠난다는 말을 듣고 걸어가려고 길을 나선다. 걸어가다가 수분리 마을을 우연히 ‘발견’한다. 억새의 줄기로 엮은 지붕을 한 건새집을 처음 본 것이다. 아름답고 독특한 이 마을의 건새집은 그가 찍은 얼마 뒤 ‘새마을 운동’으로 모두 사라져버렸다. 강원도 용대리 너와집도 그의 사진 속에 남은 채 79년에 철거됐다.

“옛날이라고 해 봤자 겨우 이삼십 년밖에 안 되지만, 좋았던 또는 인상 깊었던 곳이나 괜찮은 사진을 찍었던 곳을 이제 다시 가 보기가 겁난다. 좋게 잘 바뀐 곳은, 단언하지만 한 곳도 없다. 여러 곳이 복구불능의 상태로 망가져 있었다. 그래서 기억만이라도 사진처럼 온전하게 간직하자는 생각 때문에 망가진 현실을 직시하기가 겁난다”라고 그는 <마을 3부작> 사진집에 썼다. 기록하는 자의 중요한 덕목인 객관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진가가 강운구다. 그는 “‘결정적인 순간’보다는 결정적인 장면을 바랐다. ‘결정적인 순간’의 외마디 말고, 감히 결정적인 장면의 촉촉한 정서와 진한 서사를 한꺼번에 바랐다.”고 적었다.

소설가이자 사진가인 조세희 씨는 “강운구는 사진으로 우리 시대의 가장 나빴던 성격인 파괴와 맞서 싸웠다. 그의 사진들은 그가 지켜낸 영혼을 닮아 아름답다.”고 평했다.


사진과 글이 한 몸인 ‘강운구 표 리얼리즘’
변명 같지만, 자꾸 선생의 글과 말을 인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글을 기가 막히게 잘 쓰는 사진가이기 때문이다. 글쟁이들이 그의 글 앞에서 기죽어 나자빠진 일화가 한 둘이 아닌데도 슬쩍 말을 돌린다.

“일종의 불공정거래라 할 수 있죠. 끼워서 팔기랄까. 사진만으론 안 팔리니까. 불쌍한 거죠. 사실 잡지사에서 부탁할 때 글 쓰는 이와 함께 가도 똑같은 걸 보고 와서 딴 소리를 하니 혼란스럽죠. 차라리 내가 북치고 장구 치고 혼자 하는 게 편하다 싶어요.”

많은 이에게 강운구의 사진세계를 각인시킨 한 점의 사진이 있다.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서 1977년에 찍은 한 농부의 사진이다. 여러 번 시도한 끝에 얻은 그 노작에 작가는 ‘내가 본 그 사람 그대로, 보이는 느낌 그대로’라는 글을 붙였다. 송알송알 맺힌 땀방울이 얼굴을 덮고, 주름투성이 뭉툭한 손가락 끝에서는 꽁초가 타들어간다. 한평생에 걸친 노동이 진하게 배어든 이 농부 사진은 그가 말하는 일종의 ‘결정적 장면’이라 하겠다.

길을 자주 떠나는 그지만 “옛날만큼 눈에 안 들어와서” 고민이라면서 “이것도 새로운 경지일 꺼요.” 한마디 했다. 나이에 맞는 깊이가 있으리라 기대하고 돌아다니는데 “동어반복이나 잔소리는 하기 싫다.”는 것이다.


사진 같은 사진이 팔려야 정상
“요즘 미술시장에 사람이 몰린다고 들었습니다. 사진을 많이 팔아주는 건 고마운데 왜 그림 같은 사진만 사지요? 말랑말랑하고 예쁘장하며 가벼운 살롱 사진 말입니다. 사진 같은 사진을 사야지. 그래도 안 팔리는 것보다는 낫겠지만요.” 

그는 사람들이 사진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사방에 이미지가 흔하게 넘쳐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사진은, 그림이나 조각이 그렇듯 고유한 문법이 있다. 그것을 알아야 사진을 잘 감상할 수 있고 진짜 사진과 가짜 사진을 구분할 수 있다.

40년 넘게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어온 그는 “왜 사진에서 리얼리티가 깨지는가, 왜 리얼리티가 없다고 보는가.” 안타까워했다. 세상이 바뀌었다지만, 그 바뀐 세상을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도 있지만 끝까지 양보할 수 없는 진실의 리얼리티를 그는 진득하게 붙잡고 있다.

그는 <마을 삼부작>에 이런 글을 붙였다. “시간과 겨루기에서, 슬프지 않은 것은 이 세상엔 아무것도 없다. 사진은 슬프지 않다. 다만 사진에 화석 같은 흔적만 남기고 사라진 것들이 슬플 따름이다.”

작업실 근처 찻집에서 커피 한 잔을 나누고 등을 보이며 걸어가는 그를 배웅할 때, 갑자기 강운구 선생이 슬퍼하는 ‘사라진 것들’은 어쩌면 그가 견지해온 고집과 고통과 자부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 강운구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빌린 카메라로 처음 사진을 찍은 이래 50년을 사진가로 살아왔다. 일간지 사진기자 시절 ‘사진작가는 무엇을 해야 할까’ ‘사진이란 무엇일까’를 고민하며 수많은 이론서와 사진역사책을 독파한 뒤 사진의 큰 틀과 가야만 할 길을 스스로 찾았다. 그는 ‘외국 사진이론의 잣대를 걷어내고 우리의 시각언어로써 포토저널리즘과 작가주의  영상을 개척한 우리 시대의 빼어난 다큐멘터리 사진가’란 평을 듣는다. <경주 남산> <우연 또는 필연> <강운구 마을 삼부작 - 황골 용대리 수분리> 등의 사진집을 내며 개인전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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