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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동행 “다른사람의 고통에 귀를 열어야 한다” 조성진

※ 이정호 신부 : 1957 서울 출생. 1988 성공회대 신학과 졸업. 1989 대한성공회 사제서품. 1992 샬롬의 집 원장. 2005 남양주시외국인복지센터 관장(현). 2006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 대표. 2007 국가인권위원회 외국인 전문위원. 아산상 사회봉사상, 다산대상, 한빛대상 인권상 등 수상

어느 외국인노동자지원단체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국인을 어떻게 대하는지 거리 실험을 한 적이 있다. 먼저 백인인 미국인이 영어로 길을 물었다. 그러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동안 배운 영어 실력을 총동원해 아주 친절하고 공손하게 찾아가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어떤 사람은 그를 원하는 목적지까지 직접 안내하기도 했다.
다음에는 피부가 까무잡잡한 방글라데시 사람이 길을 물었다.
역시 영어로. 이 경우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가던 길을 그냥 갔다. 어떤 이는 “너, 어디에서 왔어?” 하며 우리말로, 그것도 반말로 되묻기도 했다.
경기도 남양주시외국인복지센터 관장인 이정호(57) 대한성공회 신부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피부색에 따라 외국인을 어떻게 차별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차별

“미래를 내다본다면 동남아 출신 노동자들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됩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고령화 사회이고, 초저출산 국가예요. 10~20년 뒤에는 이런 외국 노동자들이 예전 우리의 파독 광부나 간호사처럼 반드시 필요할 때가 올 겁니다. 지금부터 잘 준비해서 ‘외국인노동자가 잘 살면 우리가 더 잘 살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요즘 다문화 가정이 굉장히 늘었잖아요? 외국인 며느리를 맞았으면 시부모가 인사말 정도는 며느리 나라 말로 배워야 할 텐데 안 하잖아요? 이것도 문제입니다.”

가구공장 밀집지역으로, 또 불법체류 외국인이 많은 것으로도 잘 알려진 경기도 마석에서 20여년간 외국인노동자들과 더불어 살아온 이 신부는 불법체류자까지 옹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곳에 새로 들어오는 외국인들에게는 “한국에 더 이상의 코리안 드림은 없다”고 교육해요. 체류기간이 지나면 정상적으로 돌아가라고 가르치고 있죠. 이제는 컴퓨터 교실을 운영하지 못할 정도로 그들이 컴퓨터를 익혀서 들어오고 있거든요. 현지에서 받은 교육 수준도 굉장히 높고요.”

그가 당부하고 싶은 것은 공정한 법 집행이다. 불법체류를 단속하는 공권력이 마치 깡패처럼 외국인노동자를 단속하니까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도 33세인 방글라데시 출신 남자 노동자가 서슬 퍼런 단속반을 피해 3층에서 뛰어내리다가 양쪽 발목이 모두 부러진 일이 생겼다. 이 사람은 아마도 평생 발을 절어야 할 것이다. 이 신부조차도 거친 단속을 만류하다가 맞아서 1주일 동안 입원한 적이 있을 정도다.

1989년 대한성공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이정호 신부는 ‘괴짜 성직자’이다. 183cm 거구에 햇볕에 그을린 피부, 운동을 좋아하는 호탕한 성품이어서 사제복이 아니었다면 주먹깨나 썼음직한 ‘어깨’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그건 목에 쓸데없는 힘이 들어가있지 않고, 신자나 일반 대중과의 거리감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이 신부는 1957년 서울 충무로 4가에서 3남3녀의 넷째이자 3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근로자가 200여명인 공장에 딸린 구내식당을 운영했다. 그는 원래 교회를 다녔는데, 고교 2학년때 글씨를 잘 쓰는 그의 솜씨를 빌리려는 후배의 부탁을 들어주려고 처음 성공회 교회를 찾았다. 그곳이 성공회 성북교회였다.

성공회 교회에 갔더니 신부님과 신도들이 무척 따뜻하게 대해 주어서 그때부터 독실한 성공회 신자가 되었다.
신일중학교에 다닐 때는 농구선수, 고대부고에서는 핸드볼 선수였던 그의 꿈은 체육 교사였다. 그것도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의 체육 선생님이 되어 자신이 가르친 아이들이 전국대회에서 우승하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대학입시에 2년 연속 낙방하여 입대하게 되자 해병대에 지원했다. 해병대 1사단 3연대 통신병으로 근무한 그는 남다른 신체조건 때문에 사단 대표 축구선수로 발탁되었고, 축구로 인해 군복무를 편안히 한 덕택에 축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축구실력 뛰어난 신부님

군대에서 익힌 축구 실력은 훗날 외국인복지센터를 만든 뒤에도 빛을 발휘한다. 외국인노동자를 모으고 조직할 때 축구를 앞세운 것이다. 농구를 좋아하는 필리핀을 제외하면, 축구는 모든 나라 노동자들이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운동이었다.

1996년부터 외국인 축구 한마당을 개최했고, 2001년 추석에는 당시 뚝섬축구장에서 16개국의 노동자 320명이 참가한 ‘2002 월드컵 성공기원 외국인 축구 한마당’을 열기도 했다. 이 대회에서는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이 영어로 축사를 해주었다. 축구 마니아인 이 신부도 선수로 직접 참여할 때가 많았다. 선수로 참여해 맹활약을 한 탓에 최우수선수상도 몇 차례 받았다. 지금 이 신부는 걸을 때 약간 절뚝거린다. 젊어서부터 운동을 좋아한 탓인지 오른쪽 무릎연골이 모두 닳아 없어져서이다.

아무튼 축구 덕택에 군복무를 편안히 마친 그는 앞날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그때 신부님이 사제의 길을 권유하여 1982년 성공회대 신학과에 입학했다. 성공회대에 다닐 때 그는 2층에서 떨어진 장애아동을 응급실로 옮긴 적이 있다. 이때 자기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장애아동을 보면서 장차 장애인을 포함한 약자들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장의사 일을 배운 것은 그런 결심의 일환이었다. 가진 것이 많지 않은 사람들과 지내다 보면 직접 염(殮)을 해주어야 하는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뒤에 한센인들과 생활하면서 그는 여러 차례 실제 염습을 하기도 했다.

1989년 사제 서품을 받은 뒤에는 김성수 주교의 비서 신부로 발령이 났다. 큰 어른인 김성수 주교를 보좌하면서 그는 성직자가 걸어야 할 올바른 길을 제시받는 등 큰 영향을 받았다.
어느 날 주교 신부가 그에게 명령을 내렸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서울 정동의 주교좌성당에서 근무하고, 토요일과 일요일은 한센병 환자촌인 성생원(지금의 남양주시외국인복지센터자리)의 관리 신부를 맡으라는 지시였다. 당시 그는 성공회 수유리교회 청년부에서 만나 1986년에 결혼한 부인(김복선・52)과의 사이에 세 살짜리 딸(예빈)이 있었다. 1990년 6월 1일, 그는 주교 신부의 지시에 따라 딸을 무동 태운채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녹촌리에 있던 성생원에 첫발을 내디뎠다.

성생원은 1962년에 성공회가 132,200㎡의 부지를 구입해 한센병 환자들이 정착해 살 수 있도록 공평하게 나누어준 곳이어서 성공회에 우호적인 곳이었다. 하지만 그가 부임할 당시에는 주말에만 관리 사제를 보내는 것에 대해 반감이 있기도 하였다. 사정을 파악한 그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주민들과의 거리감을 없앤 뒤 한글과 한문・교양 교실을 운영했다. 또 한센인 행복학습관을 개관하여 컴퓨터와 독서 교실을 여는 등 자립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노력했다.

김성수 주교가 기억하는 일화 하나. 한 번은 김 주교가 이정호 신부, 한센인들과 함께 목욕을 갔다. 한센인들과의 목욕이 꺼림칙했던 김 주교는 일부러 천천히 옷을 벗고 마지막에 목욕탕 안으로 들어섰다. 아들 같은 이 신부가 곁에 있으면 마음이 놓일 텐데 이 신부의 모습은 보이지를 않았다. 뿌연 김이 서린 목욕탕을 둘러보는데, 온탕 안에서 이 신부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가가 보니, 이 신부는 어느 틈에 한센인들과 함께 온탕 안에 들어가서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천하태평인 이 신부의 얼굴을 보면서 김성수 주교는 ‘네가 나보다 낫다’는 생각을 했다.

새로운 꿈을 키우는 중

성생원에서 사목활동을 하던 이정호 신부는 가구공장에서 일하는 외국인노동자들을 자주 보게 되었다. 좁은 집에서 생활하는 그들이 임금체불과 음주・도박・싸움 등의 문제를 안고 있음을 알게 되어 영어 미사를 시작하였고, 1992년에는 교회 옆에 외국인노동자 숙소인 ‘샬롬의 집’을 세웠다.

1996년에는 아예 성생원 주임신부로 정식 부임하면서 샬롬의 집을 외국인노동자지원단체로 확대하였고, 교회의 헌금으로 외국인노동자의 상담을 위한 직원들을 고용하였다.
불법체류 노동자들은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없어서 사고가 나면 많은 치료비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신부는 관련단체들과 연합하여 1999년 주노동자의료공제회(지금의 한국이주민건강협회)를 출범시키는데 관여하였다. 한 달에 6천 원을 내면 전국 700개 협력 의료기관에서 진료비와 약제비를 할인 받을 수 있는데, 현재 1천여 명이 가입해 있다. 2000년부터는 서울아산병원과 연세대 의료봉사동아리, 온누리약사회 등 의료봉사단체들과 연계해 무료진료를 제공하고 있다.

아산재단과 서울아산병원은 2002년부터 이곳에서 순회진료를 실시하고 있고, 2005년부터는 외국인근로자 가을 체육대회를 지원하고 있다. 또한 2천만 원 상당의 초음파 치료기 등 물리치료 장비와 이주여성의 한국사회 적응 프로그램을 지원해왔다.

2000년에는 가구공단 규모가 더욱 커지면서 2천여 명의 외국인노동자가 일하게 되자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노동자들이 상부상조할 수 있도록 국가별 공동체를 조직하였고, 농구와 축구대회 등의 체육활동과 문화 페스티벌을 지원해왔다(지금은 외국인노동자 수가 줄어서 370여개 공장에서 700여명이 일하고 있다). 2005년에는 교회가 보유한 24억 원 상당의 토지 2,640㎡를 남양주시에 기부 체납하였고, 경기도와 남양주시는 그 땅에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복지센터를 지어 주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외국인복지센터는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인데, 4층에는 이 신부가 아내와 딸과 함께 생활하는 사택과 직원 숙소가 있다. 아빠의 무동을 타고 들어왔던 딸은 국민대 언론정보학부를 마친 뒤 27세의 어엿한 숙녀가 되어 외국계 기업에 취직, 학교에 다닐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이곳에서 출퇴근하고 있다.
한센인과 외국인노동자의 더 나은 생활을 위해 헌신한 이정호 신부는 지난해 11월의 아산상 시상식에서 사회봉사상을 받았다.

당시 그는 “저보다 훌륭한 분들이 많을 텐데 상을 받게 되어서 부끄럽다”면서도 “1990년 이곳에 들어온 뒤 줄곧 약자들을 위해 살아온 데 대한 격려라고 생각한다”며 환하게 웃었다.
성공회에서는 말기암과 중증 치매환자를 위한 호스피스병원인 랜디스기념병원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 신부가 현재 건립위원장을 맡고 있다. 아산상 상금 1억 원은 대부분 이 병원 건립을 위한 모기금으로 사용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성공회 사제는 65세가 정년이다. 정년퇴임까지는 제법 남았는데, 그는 의외의 말을 했다.
“저의 경우, 나이가 든다고 해서 설교를 더 잘 하는 것도 아니고, 더욱 깊어지고 심화되는 느낌도 안 들어요. 그래서 사제는 62세 이전까지만 하면 좋겠어요. 그 다음이요? 할 일이 있죠. 이곳에 와서 일하다가 돌아간 방글라데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자기 고향에 와서 학교를 하라고 권하고 있어요. 선교 목적이 아닌, 한국문화를 알리는 학교 말이에요. 방글라데시에서 새로운 꿈을 일굴 생각을 하느라 많이 행복한 요즘입니다,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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