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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담인 “암울한 시절, 어둠 밝힌 불빛이 있었다” 장현숙

김인숙(55) 교수는 1958년 충남 아산에서 2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국어선생님이어서 크게 부족한 것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녀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에 서울에서 사업을 하던 작은 할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가족 모두 서울
로 이사했다. 안정적으로 사업을 키워나가던 작은할아버지 밑에서 김 교수의 가족은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고등학교 1학년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따로 사업을 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전교 1, 2등을 놓친 적이 없었죠. 그 시절 제 꿈은 사범대학에 진학해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집안 사정이 급격히 변하면서 삐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차피 대학에 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닌데 뭐 어때’라는 심정으로 놀러 다니기에 바빴습니다. 성적은 날이 갈수록 떨어졌죠.”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 그녀를 보고 가슴 아파하던 아버지는 그녀 몰래 한 대학교 인문계열에 원서를 냈다.
“아버지가 원서를 낸 학교가 성심여대였어요. 가톨릭대학교의 전신 격인 성심여대는 당시 캠퍼스가 춘천에 있었는데 상류층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로 유명했어요. 그런데 성적이 좋지 않던 제가 덜컥 합격해버린 거예요. 그때가 1977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원하던 대학이 아니었고, 집안 사정도 뻔히 알고 있던 터라 금방 그만둘 생각이었습니다. 등록금 해결도 못 해주면서 억지로 대학에 보낸 아버지가 너무 원망스러웠죠.”
성심여대는 1978년 부천으로 캠퍼스를 이전할 계획이었다. 그녀는 속으로 ‘잘 됐다. 학교를 옮기면 그만두자’며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고 동아리 활동에 전념했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생각을 고친 것은 장학금에 관한 정보를 알면서부터다.
“한 줄기 빛이 보이는 듯 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시험을 잘 볼 수 있으니까요. 1학년이 끝나갈 무렵, 아산장학생에 선정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장학생이 된 것 같았습니다.”
성심여대의 인문대학에는 국문, 불문, 영문, 사회사업 등 4개의 학과가 있었다. 3학년에 올라가면서 전공을 정해야 하는데 그녀는 사회사업학과를 선택했다. 사회사업학과는 지금의 사회복지학과이다.
아산장학생이 된 후 그녀는 장학회 활동을 열심히 했다. 그 중에서도 농촌 봉사활동은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또 재단의 지원으로 성심여대 학생들을 모아 여러 차례 농촌 봉사활동을 다녀오기도 했다.

28세에 전임교수가 되다
4학년이 되면서 다른 친구들이 홀트복지관 등 현장에서 일을 하던 때, 그녀는 진로에 대한 고민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여건만 된다면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 회사가 완전히 부도가 나서 더욱 어려워졌다. ‘취직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또 한 줄기 빛이 보였다.
“농촌 봉사활동을 하면서 아산재단 직원들과 친해졌어요. 한 분이 제게 ‘졸업하고 뭐 할 거냐?’고 물어 보시기에 솔직히 털어놨죠. 그랬더니 어쩌면 다음해부터 아산장학금이 대학원생까지 확대될 수 있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물론 확정된 것이 아니고,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분명해졌죠.”
그녀는 그 말을 들은 후부터 학과 사무실을 빌려 한 달 반 동안 공부에 매진했다. 목표는 서울대학교 대학원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아산장학금이 처음으로 대학원까지 확대된 1981년, 서울대 대학원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했다.
“대학원을 졸업할 즈음 ‘아산재단에서 일할 기회는 없을까?’란 생각을 했습니다. 재단 직원들과의 관계도 좋았고, 전공과도 잘 맞아 떨어졌으니까요.”
1984년 대학원 졸업 후 그녀는 지역사회학교후원회(지금의 한국지역사회교육협의회)에 기획간사로 취직했다. 1969년 설립된 지역사회학교후원회는 정주영 아산재단 설립자가 회장을 맡고 있던 단체였다. 광화문 현대빌딩의 후원회 사무실에서 일하던 그녀는 중요한 회의가 있는 날이면 설립자와 이사들에게 자료를 작성해 건네주는 등 직접 마주치는 일이 많았다.
“직장생활이 재미있지는 않았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어 한 꿈을 떠올리고는 후원회를 10개월 다니고 퇴직한 후 1985년부터 서울신학대학에서 시간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다음해 전주 한일신학교(현 한일장신대학교)에서 전임교수를 제안해 28세에 교수가 됐죠.”

김 교수는 박사학위를 취득한 1991년부터 성공회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조교수로 일했고, 성심여대와 가톨릭대학교가 통합된 해인 1995년 가톨릭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로 부임해 지금까지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소통하는 것은 선생이어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이죠. 그들의 다채로운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정말 내가 행운아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강제로 성심여대에 저를 끌고 가셨던 아버지께 지금은 고마움을 느낍니다(웃음).”
인터뷰를 마치며 아산장학금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제게 아산장학금은 어두운 곳에서 꿈을 향해 달려갈 수 있도록 길을 밝혀준 불빛과도 같았습니다. 수많은 다른 학생들에도 마찬가지였겠지요. 상담을 하다보면 아직도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대학의 서열이
부의 서열과도 연결돼, 서열이 낮은 대학에 어려운 학생들이 더 많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상위권 학교에 집중되는 지원을 중하위권 대학 쪽으로 확대해 잠재력 있는 학생들을 발굴해 도와주시면 사회적으로 더욱 의미 있는 제도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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