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제19회 아산상 수상자 "가난해서 시력을 잃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이인영




“시기를 놓친 환자가 ‘선생님 언제 보게 되는 거예요?’하고 물을 때 가장 안타깝습니다.” 제19회 아산상 수상자, 한길안과병원의 정규형(56) 이사장이 말한다. 큰 창을 통해 멀리 산 능선이며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인천 부평동 한길안과병원빌딩 이사장실. 카리스마가 있다고 인정받는 그가 부끄러운 표정으로 미소를 띄운다.

정 이사장은 지난 85년 정안과의원(한길안과병원 전신)을 개원한 이래 20년 넘게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수술을 포기하는 많은 환자들에게 무료진료와 수술로 빛을 찾아주었고, 2002년부터는 우즈베키스탄에 매년 의료봉사단을 파견했으며, 2003년에는 타쉬켄트시에  우즈벡코리아자선병원을 설립해 상시 전액 무료 진료하는 의료봉사를 해왔다.

그는 가난한 환자에게 연말이면 쌀이며 내복을 선물하고, 시각장애인학교인 ‘혜광학교’와는 자매결연을 맺고 매년 무료진료 외에도 안경, 장학금 등을 지원했다. 아동복지시설 ‘해피홈’, 무의탁 노인위탁시설 ‘즐거운 집’, ‘노인학대예방센터’ 등과도 결연 및 협약을 맺고 후원하고 있다.
한길안과병원은 의료봉사 실적 정리를 시작한 2000년부터 지금까지 국내에서 무료수술 250여 명, 무료진료 850여 명, 인종을 가리지 않고 내원환자 전원을 무료로 진료, 수술해 주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수술 1,700여 명, 진료 1만 6,500여 명을 기록했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여동생이 3개월 동안 실명한 적이 있다. 그가 중학생이고 동생이 다섯 살 때 뇌염으로 뇌압이 증가돼 시신경을 눌렀다. 동생은 상태가 나빠져 가톨릭에서 임종 시에 주는 ‘종부성사’까지 받았다. 그런데 기적처럼 종부성사 후 눈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가 시계를 갖다대며 안타까이 물었다. “이게 뭐야? …” “시계 끌 …” 그는 이 말을 잊지 못한다. 아기 말투로 ‘시계줄’을 ‘시계 끌’로 발음했지만 그건 삶의 환희였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앞 못 보는 안타까움을 잘 이해한다.

이것저것 물어보고 그냥 돌아서는 환자의 뒷모습. 그는 그 등이 말하는 외로움을 알았다. ‘몸이 천냥이면 눈은 구백 냥’ 이라는데 몸 전체가 병든 거나 진배없는 환자들. “가난해서 치료받지 못하는 일만은 없어야 합니다.” 그가 말한다. 그것이 봉사를 하게 된 이유다. 소문을 듣고 병원에 어려운 환자들이 몰려들었지만  지금까지 한 명도 그냥 돌려보내지 않았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다른 사람 보다 많으세요.” 정안과 개원 시부터 함께했던 문경순 간호부장이 말했다. 의료법인으로 전환한 뒤에는 뜻을 함께하는 최기용 병원장과 무료진료를 더욱 체계화했다. 국내만 연간 7,000만 원의 무료진료 예산을 책정했다.

2002년 설 연휴 때 우즈베키스탄으로 의료봉사를 처음 떠났다. 그곳에서 치과진료 봉사를 하고 있는 ‘아시아문화협력개발기구’의 친구로부터 “고려인 25만 명이 모여 살고 있는 이 지역 사람들이 안질환으로 고통 받고 있다. 도와주면 좋겠다.”는 권유를 받았다. 11명으로 구성된 의료진은 일주일의 짧은 일정동안 소문을 듣고, 이틀에 걸쳐 마차를 타고 오는 등 몰려드는 1,000여 명의 환자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중앙아시아 사막성 기후로 중증 백내장을 앓아 실명위기에 처한 환자들이 많았다. 밤 10시까지 강행군을 했지만 수백 명의 환자들을 남기고 떠나야 했다. 

첫 봉사를 마친 그는 즉시 병원 건물을 물색하고, 3억 원을 들여 수술실, 입원실과 의료장비를 갖춘 우즈벡코리아자선병원을 열었다. 현재는 우즈베크인 여의사 한 명 등 총 4명이 상근한다. 그곳 의사는 매년 한길안과병원에서 연수를 받고, 이곳 의사들은 명절 연휴를 이용, 교대로 가서 수술을 집도한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맹인으로 10년을 살다가 수술 2시간 후 세상을 보기도 하는 사람들. 감격하여 붙들고 흘리는 그 눈물의 의미가 그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어 결코 멈출 수 없는 사업이 되어버렸다.


‘노동자 의사’ 선친 따라 이웃의 길잡이로
한길안과병원은 국내 3대 안과전문병원에 들 정도로 규모가 크며 11명의 우수한 안과전문의가 진료한다. 백내장, 망막분야, 시력교정 분야의 의료기술이 국내 최정상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같은 한길의료재단에 김포한길안과, 부천한길안과, 우즈벡코리아자선병원이 있다. 공익성을 중시하며 의료봉사에 적극적이지만, 그런 사실은 널리 알려져있지 않다. 이는 병원 설립자인 정규형 이사장이 알려지는 걸 별로 반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 이사장은 이번에 아산상을 수상하게 되자 “해 온 일에 비해 매우 뜻 깊은 상을 받았다. 상금 1억원에 사재 1억원, 병원 및 지인 후원금 등 총 5억 원으로 청소년을 위한 장학기금을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정 이사장 선친의 함자가 ‘정한길’이다. 의사였던 선친은 그가 레지던트였을 때 6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어렵게 공부해 외과의사가 된 선친은 정형외과, 산부인과를 다 진료하고 24시간 연중무휴로 일을 하셨다. 당시 의사들은 노동자나 다름없었다. 왕진도 마다않고, 밤에도 두드리면 언제나 문을 여셨다. 자연스레 의사가 된 그는 동생들을 키우고 어려워진 집안을 책임지기 위해 근무하던 명동성모병원을 그만두고 인천 부평역 앞에 정안과를 세우게 됐다. 그 병원이 커져 2002년 확장 이전할 때 선친의 존함을 따 ‘한길안과병원’이라 개명했다. 한길, 그 일원으로 정 이사장은 흔들리지 않고 목표를 향해 꿋꿋이 걸어가는 외길을 가며 힘든 이웃의 손을 잡아주는 다정한 길잡이가 되어주고 있다. 



한길안과병원의 의료진과 직원들은 표정이 밝고 친절하다. 병원의 비전과 설립자인 정 이사장의 꿈이 그들에게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그의 꿈은 ‘한길안과병원이 세계적인 전문병원으로 성장하고, 항상 어려운 이웃과 함께 하는 아름다운 재단이 되는 것’이다.  한길안과병원에 가면 드나드는 환자나, 보호자, ‘한길눈박물관’을 방문한 어린이, 의료진 모두에게 어둠을 걷어내는 서광이 비치는 듯 하다.

이미지 하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