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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즈업 “그동안 받은 사랑, 돌려드려야죠” 이창민

4월 25일 오전, 당장이라도 후두두 빗방울이 떨어질 것 같은 흐릿한 서울을 뒤로 한 채 경상북도 최남단 청도로 향한다. 얼마나 달렸을까. 높지도 험하지도 않은 나지막한 산들로 둘러싸인 아늑한 청도가 보인다. 주변에 보이는 것은 온통 산과 들뿐, 화려한 도시문명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서울에서 느낄 수 없던 봄이 여기 있었다. 바람에 희미하게 실려 오는 풀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히고, 산에 들에 피는 꽃들이 그리도 곱다.
소싸움과 씨 없는 반시로 유명한 청도는 새마을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라는 새마을운동 노래의 가사는 알아도 그 발상지가 청도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너나 할 것 없이 못 살던 때 ‘우리 한 번 잘 살아보자’고 똘똘 뭉쳤던 청도군민의 정신이 온 나라로 퍼졌고, 그렇게 시작된 것이 새마을운동이다. 40여년이 지난 오늘, 이곳 청도에서 다시 한번 모두가 뭉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유명한 탤런트도, 의사 선생님도, 미용사도…. 모두가 행복한 청도를 만들기 위해 모인다고 한다.

1박2일의 사랑 나누기
청도읍 고수3리 노인복지회관 앞마당. 유리창을 까맣게 선팅한 하얀색 대형버스 한 대가 앞마당으로 천천히 들어선다. 차 앞문이 열리자 하얀색 가운을 입은 의사 선생님이 나타난다. “안녕하세요, 어르신들. 이틀 동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라는 말에 버스로 몰린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친다. “아이고, 무슨 말씀이신교, 우리가 잘 부탁드립니더, 어서 오이소.”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 속에 서울아산병원 의료진들이 순회진료버스에서 하나둘 짐을 내린다. 일사불란한 움직임도 잠시. 어느새 노인복지회관 2층 강당과 휴게실에 병원 진료실이 차려졌다. 오늘은 서울아산병원 순회진료팀 전성훈 자문의사를 비롯해 박종훈 안과 전문의, 심재호 영상의학과 전문의, 박진영ㆍ김경준 간호사, 장용철 방사선사 등 13명이 참가했다. 어르신들이 많이 호소하는 관절 질환과 백내장 질환 치료를 위해 이날은 특별히 정형외과와 안과 의료진이 함께 했다. 복부 및 갑상선 정밀검사를 위한 최신형 초음파검사 기기도 눈에 띈다.
잠시 뒤 또 다른 대형버스 한 대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버스에서 사람이 내릴 때마다 주민들 사이에서 연방 탄성이 터진다. 김영철 씨를 비롯해 이한위ㆍ정영숙ㆍ정혜선 씨 등 TV에서나 보던 연기자 30여명이 한꺼번에 나타나자 신기하기만 하다. 수수한 옷차림과 연예인답지 않은 소탈함에 멀찌감치 지켜보던 주민들도 금세 다가선다. 연기자들이 일일이 손을 잡고 인사를 건넨다.
“정말 이보희 씨가 맞는교, 내 젊었을 때 정말 좋아했는데, 아직도 이리 곱네, 고와.”
젊었을 적 열성팬이었다던 할아버지의 입이 귀에 걸렸다. 서울아산병원의 이번 무료 순회진료에는 한국방송연기자협회 소속 연기자들이 함께한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저희들을 보고 잠시나마 즐거워했으면 좋겠습니다. 이곳 청도에 사랑과 웃음이 넘치도록 열심히 힘써보겠습니다.”
1박2일의 ‘사랑나누기 의료봉사활동’은 한국방송연기자협회 김영철 이사장의 인사말로 시작되었다. 장황한 인사말이 아닌, 행복한 이틀을 전하고 싶다는 짧은 인사말이었다.

“몸도 마음도 고쳐주고 싶어요”
진료소가 세워진 노인복지회관이 마을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2층 강당은 마을의 정자나무 아래 평상처럼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청도읍 송북리에서 온 김이남(61) 할머니가 인사를 건넨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탤런트 손도 잡고, 의사 선생님도 보니깐 얼마나 좋은교. 이렇게 와주니깐 북적북적 사람 사는 것 같고, 참으로 고맙심더.”
주민들의 진료는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접수, 예진, 진료, 채혈, 투약, 검사 등 모든 과정이 막힘없이 술술 흘러간다. 작년 한 해에만 전국의 농어촌 의료소외지역과 사회복지관에서 9,435명을 진료한 서울아산병원 순회진료팀의 경험이 한껏 발휘된다.
의료진들 사이로 빨간 조끼를 입은 연기자들이 진료 안내와 접수를 위해 정신없이 움직인다. ‘사랑나누기봉사단’ 막내 연기자 전혜영 씨가 진료를 기다리는 할머니에게 진료 순서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고도 한참 말동무를 해준다. 별 얘기도 아니었다. 그저 편하게 웃고 떠든다. 할머니는 전혜영 씨를 보고 “딸같이 잘 한다”고 얘기하고, 전혜영 씨는 “엄마같이 편하다”고 말한다. 이 사람이 진짜 딸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살갑게 안마도 해드린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있지만 진료를 보기 위한 긴 줄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전성훈 자문의사는 이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료를 마치고도 한 할아버지의 이야기에 한참 동안 귀 기울인다.
“진료를 받으러 와서 증상에 대한 이야기 외에 본인의 인생 이야기를 털어놓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 분들에게는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이 제일 좋은 약입니다. 어쩌면 어르신들은 몸이 아파서가 아니라 마음이 아파서 이곳을 찾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성훈 자문의사는 몸도 마음도 모두 고쳐주고 싶다고 했다. 한 할머니가 아까부터 싱글벙글이다. 오랜만에 염색도 하고 머리도 잘랐는데 젊어 보인다고, 마음에 꼭 드셨단다. 2층에서 의료봉사가 진행되는 동안 3층에서는 ‘가위손 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서울과 부산 등 전국에서 온 미용사 35명이 어르신들의 꽃단장에 분주하다.

이웃으로 다가온 진솔한 연예인
“지금까지 어르신 90여분이 이발을 하셨고, 40분 정도가 염색을 했는데 어찌나 좋아하시는지…. 주변에 미용실이 얼마 없다네요. 다들 젊어지신 거 같다고 좋아하시니까 정말 뿌듯하네요.”
부산에서 왔다는 김영만 미용사의 손이 다시 경쾌하게 움직인다.
몇몇 사람이 비에 젖은 채 들어온다. 창밖을 보니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빗속을 우산 없이 종종 걸음으로 지나가는 할아버지가 눈에 띄었다. 그 순간 한 젊은 남자가 다가가 우산을 씌워준다. 한 손으로는 우산을 들고, 한 손으로는 할아버지 팔짱을 끼고 빗속을 걸어간다. 30여분 뒤, 우산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며 들어오는 그 젊은 남자를 노인복지회관 현관에서 만날 수 있었다. 연기자 이규준 씨였다. 미처 우산을 준비 못한 어르신들이 꽤 있는 것 같아 현관에서 기다리다 지금까지 다섯 분 정도를 모셔다 드렸다고 한다.
“사실 이틀 동안 특별히 봉사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희 얼굴을 보여주고 웃음을 드리는 건 당연한 일이죠. 시청자분들이 저희를 좋아해주시고 사랑해주시는데, 이렇게라도 나오지 않으면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거든요. 손 한번 잡아드리고 말동무 해주면, 그게 그냥 좋으신 거예요.”
한쪽 어깨가 비에 흠뻑 젖은 채 어디론가 다시 뛰어가는 이규준 씨의 뒷모습이 보인다. 연예인들의 봉사는 가식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이다. 어느새 백아흔아홉 번째 어르신이 진료를 받는다. 1박2일 일정의 마지막 진료다.
“촌에 사는 늙은이를 본다고 일부러 여기까지 와가지고 참말로 욕봤심더. 선생님들도 건강하이소.”
청도읍 고수1리에서 오신 최외분(84) 할머니가 약 봉투를 가슴에 안은 채 강당을 나갈 때까지 고맙다는 말을 연신 건넨다. 노인복지회관 앞마당까지 배웅 나온 김영철 이사장이 최 할머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물끄러미 바라보며 아쉬움을 드러낸다.
“1박2일이 금세 지나갔네요. 그동안 받은 사랑을 작게나마 돌려드리고 싶어 봉사를 시작했는데, 있다 보니 저희가 더 많은 사랑을 받은 것 같네요. 많은 분들에게 도움을 드릴 수 있도록 앞으로도 계속 봉사현장에 나올 생각입니다. 연극 공연도 계획 중이고요.”
봉사하면서 얼굴이 부드러워지고 밝아졌다는 김영철 이사장이 너털웃음을 지어보였다. 1박2일 동안 함께한 그들에게서는 연예인 혹은 스타라는 이름에 수반되는 화려함을 찾을 수 없었다. 진료를 기다리는 할머니 손을 잡고 껄껄거리는 넉살 좋은 이웃집 아저씨, 내 차례는 언제냐며 괜스레 툴툴거리는 할아버지를 눈웃음으로 달래는 애교만점 아줌마, 집으로 돌아가는 할머니 팔짱을 꼭 끼고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가는 잘 생긴 옆집 총각 등 바로 우리 이웃의 모습이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화려한 모습 뒤에 숨겨진 연기자들의 따뜻함과 소박함이 묻어났던 청도에서의 1박2일이었다. 그들의 진솔함과 유쾌함에 우리 모두가 치유 받았는지 모른다. 아름다운 곳에 익숙해지려니 떠날 시간이라 한다. 조만간 낯익은 얼굴들과 봉사자로 다시 마주치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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