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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풍경 “또이 예우 한국” (사랑해요 한국) 조성진

지난 5월 5일 어린이날, 오안희(42) 씨 가족은 충남 아산의 집에서 멀지 않은 부여로 나들이를 갔다. 유적지를 둘러보고, 외식도 하고 돌아오는 길에 가족은 마트에 들렀다. 아이들에게 선물을 사 주기 위해서였다.
맞벌이이지만 부부의 수입은 많지 않다. 아산의 삼성전자 협력업체인 영인솔루션의 구매ㆍ자재팀 소속으로 지게차 운전을 하는 남편(김웅표ㆍ44)의 월급은 200만 원이 안 된다. 아산시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통번역지원사로 근무하는 아내는 90만 원에 못 미치는 월급을 받고 있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맘껏 해줄 수 있는 형편이 못 되는 것이다. 남편이 아이들에게 “선물은 만 원이 넘으면 안 된다”는 상한선을 제시했다.
아산 남성초등학교 5학년인 장남 병일(11)이는 의젓하고 속이 깊다. 갖고 싶은 것이 무척 많았을 텐데도 아빠의 바람대로 딱 1만 원짜리 장난감을 골랐다. 반면 형과 같은 학교 1학년인 둘째 병현(8)이는 제멋대로다. 무슨 일을 하건 아빠가 자기편임을 아는 까닭이다. 둘째는 2만6천 원짜리를 집어왔고, 아빠는 잠시 옥신각신하는 척하다가 계산을 해주었다.

남녀평등 실천하는 모범부부
결국 부부는 이 일로 말다툼을 벌였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곧이곧대로 들어주는 건 올바른 가정교육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아내는 둘째의 말이라면 무조건 OK 하는 남편과 번번이 말싸움을 한다. 실랑이를 벌일 때마다 남편은 “알았다. 다음엔 그러지 않겠다”고 하지만 그때뿐이다.
아이들의 교육에 관한 일 말고는 부부는 다툴 일이 별로 없다. 오안희 씨 집은 남녀평등이 이루어지고 있는 민주적인 가정이기 때문이다. 남편은 3교대로 일한다. 아내가 출근해서 일하거나 야근할 때 집에 있는 날이 종종 있다. 그런 날이면 남편은 주부 노릇을 톡톡히 한다. 청소와 빨래, 요리, 설거지가 남편의 몫이다. 이따금 김치찌개에 감칠맛을 내기 위해 몰래 라면수프를 넣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남편이 가사를 분담하게 된 데는 처가의 영향이 크다. 베트남의 처가를 몇 번 방문했을 때 그는 장인이 밥을 짓고 설거지하는 모습을 보았고, 경북 포항 출신으로 가부장적인 풍토에서 자란 그에게 그런 장인의 모습은 일종의 문화적 충격이었다. 아내로부터 베트남은 남자와 여자가 평등한 사회라는 설명을 들은 남편은 이후 살림꾼으로 변모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보는 것에서 삶의 교훈을 얻고 실천하는 것은 아니다. 심성의 결이 곱고 착한 그 같은 사람만이 무엇이 중요한지 느끼고 실행하는 것이다. 결혼하던 무렵, 오안희 씨가 시댁과 친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를 남편으로 선택한 것은 그의 이런 포용력 때문인지도 모른다.
부 티 오안. 1971년 베트남 하농에서 태어난 그녀의 본래 이름이다. ‘부’는 성이고, ‘티’는 이름의 주인공이 여자임을 드러내는 관용어이며, ‘오안’은 베트남의 예쁜 새 이름이다. 아버지는 부 반권(74)으로 공무원을 지냈고, 어머니 이름은 누엔 티 프엉(70)이다. 두 분 다 생존해 있고, 건강한 편이다. 그녀는 1남4녀의 둘째였고, 형제들은 모두 베트남에서 직장에 다니고 있다.
지금도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상징하듯 총명한 소녀였다. 공부를 무척 잘 했다.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전교 회장을 도맡아 했다. 홍가이고등학교에 진학해서 약간 떨어졌지만, 그래도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다. 이 당시 꿈은 교사였다.
요즘은 경제발전을 이루고 있지만, 그녀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87년 무렵만 해도 베트남의 경제사정은 좋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가 공무원이라고 해서 형편이 나을 것도 없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봉제공장에서 재봉 일을 하던 그녀는 결단을 내렸다. 돈을 벌어서 못 이룬 학업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한국행을 결심한 것이다. 그 당시 베트남에서 봇물을 이루던 코리안 드림 행렬에 그녀도 몸을 실었다.

시댁과 친정 반대 무릅쓰고 결혼
1995년, 그녀는 아산의 현대자동차 협력업체에 산업연수생 신분으로 취직했다. 그리고 그때 이곳에 근무하던, 두 살 위의 남편을 만났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우리나라 다문화가정은 대부분 남편과 아내의 나이차가 많이 난다. 남편이 열 살 이상 많은 경우가 흔하고, 20세 이상 더 먹은 경우도 적지 않다. 또 서로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교제 기간이 부족한 채 중매를 통해 결혼을 서두른 사례들이 많다. 다문화가정의 이혼율이 높은 데는 사랑 없는 결혼이라는, 근본적인 원인이 작용하고 있다. 오안희 씨 부부는 결혼 과정에서도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5년이라는 긴 연애 기간을 거쳐 웨딩마치를 울린 것이다.
남편은 산업연수생으로 일하는 베트남 아가씨의 성실하고, 적극적이며, 활발한 모습에 반했다. 소극적이던 평소 모습과 달리 베트남 처녀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한 그는 마침내 그녀의 마음을 얻어냈고, 알콩달콩 사랑을 키우다가 프러포즈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집안에 결혼 의사를 밝히자 부모는 난리가 났다. 2남 중의 큰아들인 그가 외국인과 결혼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여자의 친정부모 또한 결혼을 반대했다. 똑똑한 딸이 낯선 땅에서 고생하는 것도 안쓰러운데, 외국 남자와 결혼하겠다니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이다.
고민하던 두 사람은 우선 혼인신고를 하기로 했다. 2000년 2월 두 사람이 혼인신고를 하여 법적으로 부부가 되자 양쪽 집은 어쩔 수 없이 결혼을 받아들였다. 2000년 4월, 남편 고향인 포항에서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아내가 태어난 베트남 하농으로 신혼여행을 갔다. 그곳에서 다시 혼례를 올린 두 사람은 2주일 동안 하노이와 호치민 등을 여행하며 달콤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2년 뒤인 2002년 사랑의 결실인 큰아들을 낳았고, 다시 2005년 둘째아들이 태어났다.
“우리 시어머니 같은 분이 없으세요. 결혼 뒤에는 친딸처럼 잘해 주세요. 한 번도 속상한 말을 한 적이 없으시고, 제가 공부하고 싶으면 계속 공부하라고 응원해 주시니까 정말로 고마워요.”
아내는 2003년에 한국 국적도 취득했다. 국적을 바꿀 때 결혼이주여성들을 담당하던 사회복지사가 베트남 이름 ‘오안’에 우리말 ‘희’를 붙여 ‘오안희’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 주었고, 개명 신청 담당자는 ‘吳安熙’라는 한자 이름까지 지어 호적에 등재했다.

전국 통번역지원사 ‘실적왕’ 선발
그녀의 둘째아들은 활달하지만, 보통의 아이들과는 약간 다르다. 그래서 그녀는 아들 양육에 도움을 얻기 위해 2007년 아산시 다문화가족지원센터(이하 지원센터)에서 운영하는 아동양육지도사 과정에 등록하는 한편 아예 지원센터로 직장을 옮겼다.
이때부터 맡은 ‘통번역지원사’라는 일은 그녀의 인생 후반전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녀의 적성에 딱 들어맞아서 신바람 내며 일할 수 있게 됐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전국적으로 유명한 결혼이주여성으로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통번역지원사는 결혼이주여성이 한국 국적을 취득하거나 친정부모를 초청할 수 있는 방법 등을 알려주는 일을 한다. 또 고부 갈등이라든가 권위적인 남편과의 문제 같은 가족갈등도 상담한다. 이따금 남편에게 심하게 폭행당한 결혼이주여성이 지원센터의 문을 두드리는데, 이런 여성들과의 상담과 경찰 신고, 서류 작성, 재판 보조 등도 통번역지원사의 몫이다. 현재 전국의 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통번역지원사는 200여 명이다.
통번역지원사로서의 오안희 씨의 전문성은 무척 높다. 한 달에 150~200건의 상담을 진행하며, 2011년에는 전국 지원센터의 통번역지원사 중에서 상담 성적이 가장 좋아서 ‘실적왕’으로 선발되기도 했다. 2012년에는 2천 건 이상의 상담을 진행했고, 2013년 4월에는 250건을 담당했다.
아산에는 500명 가까운 베트남 결혼이주여성들이 살고 있다. 그녀는 주로 이 여성들을 상대하지만, 캄보디아나 필리핀 등 다른 나라 출신들도 담당한다. 또 아산 지역 거주 여성들이 주로 그녀를 찾지만 가끔 서울이나 대전, 천안 등에서도 그녀를 찾아온다. 상담 사례가 워낙 많다 보니 결혼이주여성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왕언니 오안희’를 찾으라는 일종의 공식이 생겼다. 상담 문의가 쇄도해서 이제 그녀와 상담하려면 예약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다.
그녀는 2010년부터 충남 다문화명예홍보대사로 임명돼 일하고 있고, 2012년에는 다문화가정의 투표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홍보대사로 뽑히기도 했다.
“통번역지원사는 결혼이주여성들이 한국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어요. 이런 전문성을 정부에서 인정해서 지원을 많이 해주면 좋겠어요. 스트레스가 심한 직업이거든요. 6월에 아산재단에서 주최하는 심포지엄에 참석하면 이런 문제를 제기해볼까 해요.”
아산재단은 6월 20일 ‘한국의 나눔문화와 복지사회’를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하는데, ‘포용적 사회와 나눔문화의 현실’을 다룰 제2주제 토론회에서 김형용 동국대 사회학과 교수가 주제발표를, 그녀와 박태규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가 토론을 맡는다.
“쟁쟁한 교수님들과 토론회에 참석하려니까 영광이면서도 떨리는 게 사실이에요. 학사(2013년 순천향대 사회복지학과 졸업)에 불과한 제가 박사인 교수님들에게 이론적인 면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겠죠. 하지만 제게는 다문화가정의 문제를 다룬 생생한 현장경험이 있으니까 상담을 하면서 느낀 점을 말씀드리려고 해요. 아산재단에서 제게 바라는 것도 그런 점 아닐까요?”
심포지엄이 끝난 뒤 7월이 오면 그녀에게는 좋은 일이 또 생긴다. 마침내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는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66㎡ 아파트는 처음에는 월세였다. 작년에 이 아파트를 전세로 전환한 데 이어 이번에 아예 사들이는 것이다.

“우리 부부의 월급을 꾸준히 모아왔어요. 여기에 지난해 아산상 다문화가정상을 수상하면서 받은 상금이 큰 몫을 차지했어요. 상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저축했거든요.”
충남경찰청장과 아산 시장, 보건복지부 장관에 이어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던 그녀는 그런 상을 받을 때도 기뻤지만, 이번 내 집 마련이 더 기쁘다면서 행복감을 드러냈다. 베트남 하농에서 태어난 부 티 오안은 이제 한국 아산의 오안희가 되어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자신만의 세상을 펼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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