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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편지 엄마의 엄마 김현영

내게 노래를 가르쳐준 최초의 사람은 엄마다. 매기의 추억, 엄마야 누나야, 그리고 얼굴. 모두 엄마가 즐겨 부르던 노래들이다. 잘 때만 빼고는 항상 노래를 물고 있던 엄마의 입. 어쩌면 엄마는 잠을 자면서도 계속해서 노래를 불렀는지도 모른다. 다른 누가 아닌 엄마 자신의 꿈속이기에 다른 사람은 꿈도 꾸지 못하는 자신만의 진짜 노래를 불렀는지도. 그렇다면 엄마의 진짜 삶이란 것도 그 꿈속에 있었다고 해야 맞지 않을까. 그곳에서 노래를 부르다 잠이 든 한 여자가 잠들기 전까지 부르던 그 노래를 그대로 입술에 묻힌 채 여기서 깨어나 어리둥절한 채로 나의 엄마가 되어버렸던 건 아닐까.
 이 글의 첫 문장에 나오는 엄마를 처음엔 어머니라고 썼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어머니는 나의 엄마 같지가 않았다. 어머니는 그래서 엄마가 되었다. 그것만 보더라도 엄마가 나의 엄마가 된 것은 엄마의 꿈이었다기보다는 나의 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스의 신비주의자, 다스칼로스는 말했다. 모든 부모는 다 자식이 선택한 것이라고. 내 엄마의 자식은 모두 다섯이다. 그러니 두 가지는 추측할 수 있겠다. 이 엄마가 자기 엄마이길 바란 사람이 적지 않았다는 것. 둘만 낳아 잘 기르자던 시대에 다섯을 낳았으니 이 엄마는 시대적 꿈보다는 보잘 것 없는 한 영혼의 꿈에 더 귀를 기울여주는 존재라는 것. 이런 엄마가 내 엄마라니… 아, 나의 안목은 그 얼마나 탁월한가. 그리스의 신비주의자, 다스칼로스는 말하지 않았지만 신비와는 전혀 무관한 나는 말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자식들은 한마디로 이렇게 정리된다. 짜아식, 잘난 척하기는. 저 혼자 태어난 줄 아나봐.

엄마의 노랫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무심코 들이켰다 해도 목젖이 놀라지 않을 정도로 알맞게 따뜻하고 알맞게 시원한 생수와도 같은 음량이었다. 늘 들이쉬면서도 들이쉬는 줄도 모르고 있던 공기 같은 그 노래들로 내 귀가 숨을 쉬었다. 그러니 엄마는 전혀 가르치지 않고도 다 가르친 셈이다. 매기의 추억, 엄마야 누나야, 그리고 얼굴을 나는 배우지 않은 채로 다 배웠다. 엄마의 노래는 그렇게 나의 노래가 되었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흥얼거려보면 그것이 그대로 얼굴이 되었다.

봄꽃이 난분분 지던 어느 밤, 탁월한 안목의 소유자인 내가 그만 얼굴을 다쳤다. 노래로 단련된 얼굴답게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악보에나 있음직한 화음이 얼굴에 새겨졌다. 그럼 그렇지. 얼굴은 다쳤어도 나의 안목은 다치지 않았다. 단조로운 도미솔 보다야 스트라빈스키 급의 불협화음이 뭔가 더 있어 보이지 않는가. 다만 아쉬운 건 타이밍. 공교롭게도 그날은 나의 마흔 번째 생일이었다. 그리고 그날 응급실에 함께 있어준 사람이 하필이면 나의 엄마였다. 자기 얼굴에 책임질 나이라고 하는 마흔 살의 첫날. 그 나이가 되어서도 엄마의 집에서 엄마가 끓여준 미역국을 얻어먹고는 엄마도 없고 미역국도 없는 내 집으로 돌아오던 그 밤. 오래전부터 엄마의 노래는 이미 나의 노래가 되어 있었지만 나는 아직 누구의 엄마도 아니었다. 그런 내가 부르는 엄마의 노래라는 건 대체 어떤 노래여야 하는 걸까. 확실한 건, 그날 엄마가 앉아있던 보호자석이 더는 엄마만의 자리일 수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나의 탁월한 안목으로 보건대 그것이 이제 더는 자연스러운 장면이 아니었으니까.

봄꽃이 진 자리에서 자연스레 여름의 잎들이 돋아나던 어느 낮, 병원 문을 나섰다. 그 사이 엄마의 갑상선에서도 잎이 돋았다. 아직은 신록이었다. 이제 여름의 잎들은 차곡차곡 초록빛의 마일리지를 적립해갈 테지. 쌓아둔 마일리지만큼 여름의 잎이 가을의 잎이 되겠지. 누가 자연 아니랄까봐 그렇게나 자연스럽게. 엄마의 갑상선에 돋은 잎은 당연히 자연이 아니니 솎아내는 게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고 나면 초록빛의 마일리지가 최고로 쌓인 어느 한날에 엄마의 예순일곱 번째 생일이 당도해 있을 것이다.

이 초록은 다 어디서 왔을까? 봄꽃에게서 왔을까? 모든 단풍을 사실은 초록이 낳았듯이 이 여름의 잎들도 모두 봄의 꽃들이 낳은 걸까? 엄마가 나를 낳고 엄마의 엄마가 엄마를 낳았듯이 그렇게나 자연스럽게?

그리스의 신비학자, 다스칼로스는 말했다. 모든 부모는 다 자식이 선택한 것이라고. 내가 탁월한 안목으로 내 엄마를 선택한 건 사실이지만 제아무리 탁월했다 해도 엄마가 나를 낳아주지 않았다면 나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니 다스칼로스의 그 말은 이렇게 바꾸어도 무방하리라. 당신이 나에 의해 내 엄마로 선택되었을 때 당신은 나를 당신의 자식으로 선택했다고. 선택했기에 선택되었고 선택되었기에 선택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것과 되는 것이 결국은 하나라고.

엄마는 가르친 적도 없이 엄마의 노래들을 내게 가르쳐주었다. 나는 배우지 않고도 그 노래들을 다 배웠다. 아주 오래전부터 엄마의 노래는 이미 나의 노래였다. 그러니 나도 이미 엄마였던 것이다. 아직은 어떤 자식의 엄마도 아니지만 나는 언제나 내 엄마의 엄마였는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나는 봄의 꽃, 엄마는 여름의 잎. 그렇게나 자연스럽게 나는 엄마를 낳게 될 것이다. 엄마의 진짜 삶이 있는 바로 그곳에다가.

※ 김현영: 소설가. 1973년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나 명지대 문예창작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경인일보 신춘문예에 ‘숨은 눈’, 문학동네 하계문예공모에 ‘여자가 사랑할 때’가 당선되어 데뷔했다. 소설집 <냉장고>와 <까마귀가 쓴 글>, <하루의 인생>, 장편소설 <러브 차일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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