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아름다운 동행 “난민에게 필요한 건 따뜻한 관심입니다” 조성진

에티오피아가 고향인 토니(25)는 지난해 8월 서울에 왔다.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참전용사인 그는 한가하게 관광하러 온 것도 아니고, 열심히 일을 해서 결혼 밑천을 장만하러 온 것도 아니다. 고향에서 명문대학을 다니던 그는 민주화운동을 벌이다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고향을 탈출했다.
황급하게 고향을 떠나느라 거의 맨몸으로 서울에 도착한 그는 물어물어 서울 상도동에 자리한 ‘피난처’를 찾았다.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이유로 고국을 등진 아프리카인들에게 국내 최초의 난민 지원단체인 피난처의 이름은 제법 알려져 있는 까닭이었다. 피난처에서 제공한 쉼터에 몸을 누인 토니는 피난처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우리 정부에 ‘난민’ 신청을 했다. 언제가 될지 기약할 수 없지만, 난민 신청이 받아들여지면 토니는 신분의 불안을 떨치고 한국에서 임시 정착생활을 할 생각이다. 그러다가 고향에 ‘봄’이 찾아왔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바로 조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난민이 뭐예요? 한국에도 난민이 있어요? 그 사람들은 왜 한국에 오는 거예요?”
난민에게 임시 숙소를 제공하고, 법률 지원활동을 펼치는 이호택(54)ㆍ조명숙(43) 부부를 만나면 사람들이 빼놓지 않고 하는 질문이다.
생소한 단어이지만, 우리나라가 발전하면서 민주화를 이루는 사이에 우리 곁에도 난민이 많이 들어와 있다. 그 숫자도 적지 않아 2012년 8월 현재 전 세계 60여 개국에서 4,700여명의 난민들이 자유와 보호를 얻기 위해 우리나라에 난민 신청을 한 상태이다.
우리나라는 1992년 난민협약에 가입했고, 1994년부터 난민 신청을 받기 시작했으며, 2001년 최초로 한 명의 난민 신청자를 받아들였다. 이후 2002년에 다시 한 명, 2003년에 13명, 2004년에는 18명 등 지금까지 290여 명이 난민 지위를 획득했다.
난민들은 미얀마와 나이지리아, 콩고,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코트디부아르, 에티오피아 그리고 이란 등 세계 각국의 독재ㆍ분쟁 국가에서 박해와 억압을 피해 우리나라에 왔다. 독재국가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고문당하고, 종교와 신념을 지키다가 박해를 받아 가족과 집을 잃고, 소수민족이라는 이유로 강제노역에 시달리다가 난민이 된 사람들….
우리가 당연히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유와 평화가 너무나 절실해 그들은 고국을 등지고 국제난민협약국인 우리나라를 찾았다.

콩고의 고위 정보요원 출신인 욤비
우리나라에 온 난민 신청자들은 당국으로부터 난민 인정을 받기까지 정식 취업을 할 수 없다. 소득이 없는 난민들에게는 당연히 집도 없다. 이호택ㆍ조명숙 부부는 1993년부터 갈 곳 없는 난민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면서 지원 활동을 펼쳐왔다.
난민들이 피난처를 신뢰하고 의지하게 만든 사건이 있다. 바로 콩고 출신의 욤비(46)를 우리 정부가 난민으로 받아들이게 만든 일이다.
욤비는 콩고의 고위 정보요원으로서 현직 대통령을 비판하는 여론조사 보고서 작성과 야당 활동이 문제되어 수감되었다가 어렵게 탈출했고, 자신의 과거 행적에 관한 기사도 여러 건 갖고 있었다. 그 정도 증거라면 쉽게 난민 지위를 인정받을 것이라고 생각한 욤비는 2002년 11월 난민 신청을 했지만 예상과 달리 불허되었다.
사실 돈을 벌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한국에 온 외국인 노동자와 신념의 문제로 조국을 등진 난민을 구분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난민 신청자를 쉽게 받아들였다가는 외국인 노동자들도 난민 신청을 해서 정당한 국내 체류자격을 얻으려 할 것이므로 당국에서는 심사를 엄격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까닭에 난민 심사에는 평균 2~3년, 길면 4~5년이 걸렸다.
욤비의 신사적인 면모와 성실성에 매료된 피난처 이호택 대표는 그의 난민 인정절차를 돕기 위해 콩고를 방문했다. 수도 킨샤사에서 다른 정보요원의 증언을 녹음하고 증인진술서를 받은 이 대표는 욤비의 신문 조서와 신문 기사 사본들을 구해 귀국했다.
돌아오자마자 모든 자료와 증거들을 정리해 법무부에 제출했지만, 당국은 또 다시 의심했다. 다른 정보요원의 공문서 복사, 컴퓨터나 타자기가 아니라 손으로 쓴 심문조서 등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욤비는 6년 만에 난민 인정을 받았다. 교육학을 전공한 교사이자 경제학과 정보학을 전공한 인텔리인 욤비는 피난처에서 콩고와 아프리카를 위한 캠페이너로 일하다가 난민 지위를 얻은 뒤에는 NGO학을 공부한 뒤 국제 NGO 활동가가 되었다. 한편 욤비를 위한 이호택 대표의 헌신적인 노력은 또 다른 ‘욤비’들이 피난처의 문을 두드리는 계기가 되었다.
1959년 전주에서 태어난 이호택 대표는 서울대 법대와 같은 대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대학원에서는 노동법을 전공했다. 법학을 전공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그는 사법시험에 합격해 변호사가 되고 싶었지만 10년 이상 시험에 낙방하면서 절망을 경험했다.
패배자, 실패자라는 느낌을 떨치지 못하고 있을 때 그가 만난 사람들이 난민이었다. 제 나라를 등지고 남의 나라에서 피난살이를 하는 난민들을 돕는 길에 들어서면서 그는 사명을 발견했고, 이제는 자신이 걸어온 길에서 사랑과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그는 사법고시 실패 후 전공인 노동법을 살려 시민종합법률상담소에서 리서처로 일하다가 1994년 희년선교회의 부탁으로 희년외국인상담소 등 외국인 노동자 지원단체에서 간사로 활동하면서 난민들과 인연을 맺었다. 외국인 노동자 중에는 난민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국인노동자 지원하다 난민과 인연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난 아내 조명숙 씨는 단국대 한문교육과에 다니던 1993년부터 파키스탄 등에서 온 노동자들을 돕는 활동을 하다가 이듬해 외국인 노동자 지원단체에서 일하면서 남편을 만났다.
그녀는 집으로 잘못 걸려온 전화를 받아주다가 운명처럼 외국인 노동자와 난민을 만났다. 우연히 파키스탄 노동자의 전화를 받고 산업재해를 당한 그의 친구를 병원까지 찾아가 도와주었다가 그들을 위한 인생을 시작한 것이다. 외국인노동자단체에서 함께 일하게 된 두 사람은 중국, 필리핀 등을 방문해 한국에서 일하다가 임금체불, 산재를 당하고도 불법체류자라는 이유로 쫓겨난 외국인 노동자들을 찾아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11년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1997년 4월에 결혼한 부부는 신혼여행간 중국에서 아마도 지구상에서 가장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을 또 다른 난민인 탈북자 문제에 눈을 뜨고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1997년부터 이호택ㆍ조명숙 부부는 탈북자 지원에 전념하였고, 이후 1년여간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탈북자 11명이 베트남을 통해 한국에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왔다. 부부의 영향으로 1999년 두리하나선교회가 설립되면서 탈북자 구출이 본격화되었다.

“우리가 관심과 연대를 보여줄 차례”
1999년 한국으로 돌아온 부부는 외국인 난민과 북한 난민을 보호하기 위해 사단법인 ‘피난처’를 설립했다. 남편이 대표를 맡아 지금에 이르고 있고, 아내는 2003년 탈북청소년을 위한 야간학교인 ‘자유터학교’를 피난처 안에 만들어 2010년까지 교장으로 활동했다. 2004년 다시 탈북청소년 대안학교인 ‘여명학교’를 만든 아내는 현재 교감으로 근무하고 있다.
피난처는 외국인 난민들이 법무부로부터 난민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소송 지원 등 법률상담을 해주고, 임시 공동숙소를 제공하는 한편 생필품과 병원치료 등을 지원한다. 또 해외 난민촌 방문 조사와 지원 활동도 펼치고 있다.
북한 난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자유터학교와 탈북 2세 아동들을 위한 공동숙소 등을 운영하고 있다. 난민을 위한 피난처 활동을 인정받아 부부는 서울지방변호사회 시민인권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부부는 서울 일원동의 15평 연립주택에서 남편의 어머니(임종님ㆍ77)와 각각 중학교 1학년과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시헌), 딸(가연)과 함께 산다.
사회적으로 조명을 받지 못해도 누군가는 꼭 해야 할일을 해왔지만 피난처 대표인 남편과 여명학교 교감인 아내의 월급은 합쳐도 30~40대 회사원 한 명의 월급에 못 미친다.
여기에 아내가 연세대 교육행정대학원에 다니고 있어서 두 사람의 월급으로는 생활이 빠듯하지만, 부부는 자신들을 부르는 곳에서 자신들을 필요로 하는 일을 하는 덕분에 웃음이 끊이지 않는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
부부는 지난해 11월, 사회운동가로서 20년간 난민 지원이라는 한길을 걸어온 공적을 인정받아 아산재단으로부터 아산상 사회봉사상을 받았다. 1억원의 상금을 받았지만, 아산상 상금은 모두 난민들을 위한 숙소를 보수하고, 새로 얻는 데 쓰겠다고 말했다. 안식을 찾아 우리나라로 피신한 난민들에게 집은 곧 사랑이고, 희망인 까닭이다. 자신들의 활동은 이번에 수상한 명예로운 아산상으로 충분히 보상받고도 남았다는 것이 부부의 생각이다.
“난민 지원 얘기를 꺼내면 우리도 살기 어려운데 어떻게 난민까지 돕느냐고 우려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도 한때 난민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일제 식민통치와 독재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외국으로 몸을 피했고, 그때마다 세계는 따뜻한 관심과 연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우리의 자유와 평화를 조금 나누어줄 차례입니다.”

이미지 하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