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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즈업③ 국내 정신의학을 세계수준으로 견인 유인종

서울대 의대 정신과학교실 주임교수 겸 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과장인 권준수(權俊壽ㆍ54) 교수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정신의학자로 꼽힌다. 권 교수는 조현병(정신분열병)과 뇌영상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수준의 연구를 수행해왔으며, 2011년 4월 조현병의 발병을 예측하고 예방하는 연구 업적을 인정받아 동양인 최초로 3년 임기의 국제조현병학회 이사로 선임됐다.
김진혁 인제대 의대 교수는 권준수 교수를 가리켜 “우리나라 정신의학을 국제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한 의사”로 평가하기도 했다.
권 교수는 정신질환에 대해 편견을 갖게 만들던 용어인 ‘정신분열병’을 ‘조현병(調絃病)’으로 바꾸는 데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 ‘조현’이라는 말은 ‘현악기의 줄을 고른다’는 뜻으로, 정신질환을 앓는 환자도 치료를 받으면 일상적인 생활이 가능하다는 의미를 지닌다.
제6회 아산의학상 임상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권 교수와 인터뷰하기 이틀 전에 전 야구선수 조성민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살이 사회적 이슈가 될 때마다 각종 매스컴이 코멘트를 따기 위해 몰려드는 전문가가 권 교수여서 그 얘기를 먼저 화제로 삼았다.

- 그의 자살 원인을 무엇이라고 보나.
“전 부인과의 관계, 최근 사귀고 있는 여자와의 관계, 잘못 알려진 자신의 일들 그리고 경제적인 어려움 등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상실에 대한 반응으로 보인다. 그것이 우울증을 일으킬 수 있고, 자살로 나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남은 아이들이 문제인데, 그의 자살 전에 아이들이 TV에 나온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아이들에게는 엄마와 외삼촌의 죽음이 극복하기 어려운 기억인데 자꾸 상기되는 게 문제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아빠의 장례식장에서 아이들이 의연했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너무 큰 충격이어서 슬퍼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

자살자의 70%가 우울증 상태
-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33.5명으로(2010년 기준) OECD 34개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은 것으로 집계됐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높은 이유는 무엇인지.
“첫 번째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인 것 같다. 자극이 많고, 한 가치관에서 다른 가치관으로 넘어가는 변화가 급격해서 여기에 적응하고 살려니까 아노미(혼돈) 현상이 나타나는 것 같다. 두 번째는 교육의 문제를 들 수 있겠다. 교육이 좌절감을 적절하게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줘야 하는데 우리는 입시 위주의 경쟁교육이다 보니 사회에 나와 어려움을 마주했을 때 이겨낼 수 있는 훈련이 안 돼 있다. 그러다 보니 조금만 어려운 스트레스가 와도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식당에서 자기 아이들이 떠들어도 기죽이지 않겠다고 혼내지 않는데, 이건 잘못된 일이다. 이 사회는 더불어 살아가는 곳이라고 가르쳐야 하는데 그런 교육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 감정의 기복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 아닌가. 우울증은 어떤 상태를 의미하나.
“생활하면서 생기는 약간의 우울증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병적인 우울증은 진단 기준이 있다. 우울한 상태가 2주 이상 지속되고, 수면에 문제가 있으며, 밥맛이 떨어지고, 죄책감을 심하게 느끼는 것 등이다. 자살의 70%가 우울증 상태다. 즉 자살자 100명 중 70명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얘기다. 나머지 20명은 정신병이고, 10명은 다른 다양한 이유가 원인이다.”
- 1996년부터 2년간 미국 하버드의과대학 정신과학교실 방문교수로 있으면서 조현병 환자는 뇌파 중 감마파에 이상이 있다는 걸 처음 발견해 전 세계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뇌파의 일종인 감마파는 뇌에서 정보를 전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동물 연구는 많았는데 인간 연구는 거의 없어서 이걸 밝히면 조현병의 병리적 기전을 밝히는 데 중요하겠다고 생각하고 매달렸다. 지금은 ‘중개연구’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그때는 중개연구라는 말이 없었는데, 당시 내 연구가 기초연구와 임상연구를 연결하는 중개연구의 획기적인 틀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규칙적인 운동, 뇌기능 강화시킨다
- 권 교수의 연구를 통해 조현병의 원인이 규명된 것인가.
“그건 아니고 원인 규명이 시작된 것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조현병의 기전을 밝히는 날이 뇌의 구조를 밝히는 날이 될 것이다. 그만큼 조현병은 어렵다. 많이 밝혀졌지만 아직 완벽하게 규명되지 않았다. 아직도 연구가 제대로 안 된 우리 신체가 뇌이고, 뇌에 연관된 마음ㆍ심리이다. 신경계 질환은 규명이 비교적 쉽지만, 정신질환은 아직도 멀었다.”
- 자폐증과 조현병, 우울증, 강박증, 치매가 잘 나타나는 연령대가 있나.
“자폐증은 어릴 때, 조현병은 사춘기에서 20~30대 중반, 우울증은 중년, 강박증은 10대 후반에서 20대 그리고 치매는 60대 이상 노인에게서 가장 많이 나타난다.”
- 그 질환들에 대처하는 방법은.
“발병 원인은 유전적ㆍ체질적ㆍ뇌인적 요인과 외부의 환경적 요인 두 가지가 다 관련돼 있다. 조현병의 경우 60~70%는 유전적인 요인이 강하지만, 그렇다고 다 발병하는 건 아니고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발병한다.
외부의 환경적 요인을 바꿔주는 게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방법이다. 이를 위해선 규칙적인 생활과 운동, 복식호흡ㆍ명상ㆍ요가 등의 이완요법 그리고 긍정적인 마음 같은 네 가지가 중요하다. 특히 운동이 중요한데, 운동하면 뇌를 자극해서 스트레스를 이겨내는 뇌기능이 강화된다. 운동을 하루에 30분 이상, 1주일에 3일, 두 달 동안 했더니 뇌의 기억중추인 해마의 용적이 20% 이상 커졌다는 보고가 있다.
이완요법도 긴요하다. 늘어났다 줄었다 하는 용수철처럼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는 나름대로의 방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에서 ‘유전자가 모든 생명현상에 우선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자유의지,마음이란 무엇인가. 이들의 실체는 없는 것인가.
“마음은 당연히 있다. 뇌와 마음은 동전의 앞뒷면 같은 것이다. 환원론적으로 얘기하자면, 신경세포라는 물질에서 뇌가 나오고, 뇌에서 마음이 나온다. 동양적인 연구는 마음을 중시하고, 서양의학은 뇌를 중시할 뿐이다.”
- 쾌락과 중독은 도파민이라는 신경물질과 관계있다고 하는데, 중독의 기준은 무엇인가.
“중독에는 좋은 면과 나쁜 면이 있다. 나이 들면 도파민 기능이 떨어져서 무덤덤해지는데, 이는 정상적인 생리현상이다. 운동이나 도박, 섹스, 마약 같은 강한 자극을 필요로 하는 것은 도파민 분비를 경험하기 위해서이다.
중단했을 때 금단현상이 나타나고, 의존성이 높아지면 중독이다.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고, 생활에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중독이 아니다.”
- 우리는 지금 뇌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나.
“정신과적인 입장에서는 뇌의 기능 중 5~10%만 쓰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인간의 능력은 지금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뇌에는 1천억 개의 신경세포가 있는데, 미국에서 이 신경세포의 구조를 밝히려는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 우리나라 정신의학의 현재 수준은.
“임상진료는 세계적인 수준과 비슷하다. 문제는 그걸 뒷받침하는 기초와 중개연구가 많이 뒤떨어진다는 점이다.”

전통의학에 깊은 관심
권 교수는 1959년 3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고향은 경남 밀양이지만 어릴 때부터 대구에서 성장해 고등학교는 대구 계성고를 졸업했다. 부친과 큰형은 별세했고, 경제학을 전공한 둘째형은 회사원이다. 모친(손윤조ㆍ81)은 생존해 계신다.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라는 선친의 권유로 1978년 서울대 의대에 입학했고, 학부시절에 우리나라 정신의학계의 태두인 이부영 교수의 영향을 받아 정신과를 선택했다.
그는 학부생 때 서울대 의대의 운동권적인 동아리인 동의학연구회(東醫學硏究會)의 6회 회원이었는데, 이때 지도교수가 이부영 교수였다. 서양적인 정신과학을 연구하고 임상에 적용하는 교수이자 의사이면서도 우리의 사상체질과 천부경ㆍ정신ㆍ마음 등에 관심이 많은 것은 이 동아리의 영향이 크다. 권 교수 또한 동의학연구회 지도교수를 20년 동안 맡았다.
스스로를 염세주의자 또는 운명론자라고 말하는 권 교수는 ‘순리대로 살자’는 좌우명을 가지고 있다. 노력을 해서 뇌기능을 바꿀 수는 있겠지만, 거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연구를 하고, 나이가 들수록 타고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즐겁거나 어려운 일에 맞닥트려도 일희일비하지 않으려고 한다.
다섯 살 아래인 부인(신건희ㆍ49)과의 사이에 딸이 두 명 있다. 큰딸은 지난 2월 서울대 심리학과를 졸업했고, 둘째는 고려대 환경생태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다. 그는 장녀를 의대에 보내고 싶었는데, “가정을 돌보지 않는 아빠를 보니까 의사가 돼선 안되겠다”는 딸의 의견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진료와 연구ㆍ교육 등 일에 치이면서 사느라 집에서 저녁식사 하는 날이 1주일에 한 번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어서 운동을 못 했는데, 올해 들어 1주일에 3~4일 트레드밀(러닝머신)에서 30~40분 달려 복부비만을 없애자는 목표를 세웠다. 지난해 4월부터는 승용차 대신 지하철을 이용해 출퇴근하면서 걷는 시간을 늘리고 있다.
아산의학상 수상을 그는 무척 부담스러워했다. 자신보다 열심히 하는 분들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산의학상은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라 후배ㆍ제자들이 시스템적으로 잘 뒷받침해준 덕택에 받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상금도 예상보다 0이 하나 더 붙어서 상당히 부담스럽다. 약물치료가 한계에 부딪쳐서 작년부터 전문가들과 팀을 구성해 줄기세포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또 바둑 기사들의 뇌기능 연구 등을 통해 정상인의 뇌기능을 끌어올리고 환자의 손상된 뇌기능을 정상화시키는 연구에 주력하고 있는데, 아산의학상은 한눈팔지 말고 연구와 치료를 더욱 열심히 하라는 채찍질로 받아들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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