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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편지 봄에는 일상의 창고를 녹여라 정은숙

눈 창고를 본 적이 있나요. 눈 창고에 가본 적이 있는 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내리는 눈? 질문이 이해가 안 되는지 대부분은 반문하곤 했다. 한겨울에 일본 삿포로 ‘모에레누마’ 공원에 간 것은 기적처럼 아름다운 일이었다. 일에 지쳐 있었고, 사람 관계가 헝클어져 있을 때였다. 온천이라도가자, 몸을 녹이자 싶은 마음으로 떠난 여행이었는데 그만 눈 창고를 보고 온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본인 조각가 이사무 노구치는 일찍이 뉴욕에서 예술적 성과를 드높였다. 뉴욕엔 그의 이름을 딴 ‘노구치 뮤지엄’도 있다. 뮤지엄 안과 야외에는 그의 조각품이 설치되어 있는데 조각가 한 사람만을 위한 뮤지엄으로는 뉴욕에서 유일하다고 했다. 그 이사무 노구치가 죽기 전 마지막 설계 작업을 한 것이 바로 모국 일본의 ‘모에레누마’ 공원이다.
공원을 설계하다니? 사람들이 내게 눈 창고가 뭐야, 라고 묻듯이 나는 조각가의 공원 설계의 의미를 직접 보기 전에는 파악하기 힘들었다. 189ha(1.89㎢)라는 큰 규모의 공원에는 유리 피라미드 전시관과 분수대, 야구장, 놀이터 등 다양한 시설이 들어차 있었다. 그 다양한 시설 배치, 놀이터의 기구, 조경 등 시설물을 포함하여 공원 콘셉트를 이사무 노구치가 직접 설계한 것이었다.
한겨울의 공원은 내리는 눈을 맞으며 하얀 빛을 보석처럼 뿜어냈다. 눈은 걷기 힘들 만큼 쌓여 있어, 공원을 산책하겠다는 계획은 자연스럽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눈 호강이나 해야지 싶은 마음으로 전시관 맨 위층으로 올라가 전망을 내다보았다. 그러다 눈 창고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일년 열두 달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는 창고를 35일간만 공개한다고 했다.
공개 이유는 그 창고에서 전시관 개관 10주년 작품전이 열리기 때문이라는데, 사사키 히데키라는 작가의 작품보다는 창고에 호기심이 생겨 바로 300엔 입장 티켓을 끊었다. 작품은 물방울의 움직임을 비추는 빛의 춤이라고나 할까, 매혹적이었다. 눈 창고답게 전등 하나 없어 안내자의 플래시 빛을 따라 조심스레 움직여야 했다. 서늘한 기운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눈 창고가 무엇인지 물었다. 말 그대로 겨울 내내 쌓인 눈을 저장하는 곳이란다. 이 눈은 봄이 지나 여름 되는 시점에 서서히 녹기 시작하는데, 그 녹아내린 물을 수력화하여 에어컨 대신 전시관 전체를 시원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물론 에어컨만큼 시원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뜨거운 더위를 피할 정도라고는 했다. 놀라서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예술가의 창의적인 발상은 자연의 순환 구조까지 예술화하는구나 싶어서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모에레누마 공원이 본디 쓰레기 매립지였다는 것. 왜 이사무 노구치가 자연을 강조하는 콘셉트의 공원으로 예술화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1시간가량 머문 공원에서 온갖 재미있는 생각이 굳은 머릿속을 뚫고 튀어 올랐다. 예술, 창의성, 단순미, 자연, 빛 … 그동안 공원 하면 산책이란 낱말만을 떠올렸던 내게는 폭죽처럼 터져 나오는 아이디어들이었다.
복잡한 일과 사람 관계에서 놓여나려 떠난 여행이었지만 도착한 날 온천탕에서 몸을 풀어도 머릿속이 완전히 말끔해지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모에레누마 공원에서 예술적 감흥에 젖어 내가 앓고 있는 문제를 살포시 내려놓게 되었다. 억지 쓰며 풀어보려 했던 사람 관계, 나 혼자만의 문제라고 스스로 외로운 방에 유폐했던 시간들이 자연스레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서울에 돌아와서도 눈 창고의 이미지가 아른거렸다. 당장 밀린 일 처리를 하느라고 바쁘게 살았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마침 그 즈음 내가 참여하고 있는 독서회에서는 모국어의 속살이랄 수 있는 시를 읽는 시간을 가졌다.
‘온종일 비는 쟁여논 말씀을 풀고 / 나무들의 귀는 물이 오른다. / 나무들은 전신이 귀가 되어 / 채 발음되지 않은 / 자음의 잔뿌리도 놓치지 않는다. / 발가락 사이에서 졸졸거리며 작은 개울은 / 이파리 끝에서 떨어질 이응을 기다리고, / 각질들은 세례수로 부풀어 / 기쁘게 흘러넘친다.’ - ‘봄’ 부분
황인숙 시인의 시 ‘봄’을 읽으면서 아름다움과 자연은 거기 그냥 있다고 믿는 마음이 되었다.
모에레누마 공원은 쓰레기 매립지를 재생한 것 이상의 아름다움이 있는 곳이었다. 예술가의 손이 곳곳에 닿아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
봄이 오면 ‘이파리 끝에서 떨어질 이응을 기다리는’ 마음이, 각질들을 벗겨내며 기쁘게 흘러넘칠 게 분명하다. 시와 예술이 삶에 해결책을 내려주진 않지만 문학적, 예술적인 향취와 힘은 굳은 일상의 창고를흔들어대며 문제들을 녹여내니까.
봄이 온다. 나의 기쁨이 오고 있다.

※ 정은숙 : 전주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정외과를 졸업했다. 1985년 편집자로 출판계에 입문했으며, 2000년 <마음산책>을 창업, 250여 종의 책을 펴냈다. 문단에는 1992년 데뷔했다. 시집 <비밀을 사랑한 이유>, <나만의 것>과 편집자의 세계를 그린 <편집자 분투기>, 책 인문서 <책 사용법>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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