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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풍경 아시아ㆍ아프리카에서 펼친 의료봉사 유인종

강원희 의료선교사 약력
1934 황해도 재령군 출생ㆍ1955 서울 대광고 졸업ㆍ1961 연세대 의대 졸업ㆍ1961 전주예수병원 인턴-레지던트
1962 간호사 출신인 두 살 아래 부인(최화순)과 결혼, 슬하에 1남1녀ㆍ1970 군의관 복무ㆍ1970. 9 강원도 간성에서 개원
1970. 12 강원도 속초에 대동의원 개원ㆍ1982 한경직 목사의 권유로 네팔 의료선교 시작ㆍ1987 방글라데시 의료선교
1991 스리랑카 의료선교ㆍ1995 2차 네팔 의료선교ㆍ1999 안동성소병원 14대 병원장ㆍ2002 에티오피아 의료선교
2010 3차 네팔 의료선교(현)ㆍ상훈: 보령의료봉사상, 일가상, 연세의학대상, MBC 사회봉사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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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중순, 서울 청량리의 한 아파트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 중인 강원희(78) 선생을 만났다. 그는 30년 동안 네팔과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그리고 에티오피아에서 아픈 이들을 돌본 공로를 인정받아 2012년 아산상 의료봉사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
2010년부터 세 번째 네팔을 찾아 의료봉사활동을 하고 있던 그는 잠시 미국과 우리나라에서 회의에 참가한 뒤 자택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자택은 그가 강원도 속초에서 11년간 대동의원을 운영하면서 마련한 아파트로, 현재 그가 가진 유일한 재산이었다. 며칠만 쉰 뒤 그는 다시 부인(최화순ㆍ6)과 함께 네팔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표정이 밝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 또한 천진난만한 소년처럼 잘 웃었고, 그 표정이 무척 밝았으며, 오지에서 의료봉사를 하며 쌓인 추억거리가 많아서인지 얘깃거리가 끊이지 않고 나왔다.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유능한 외과의사로, 안동 성소병원 원장까지 역임했으면서도 권위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돋보기 너머로 다정한 눈길을 건넬 때는 마치 친근한 동네 할아버지 같았다.

‘히말라야의 슈바이처’와 ‘다주’
연세대 간호학과를 졸업한 간호사 출신으로, 남편이 모는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아 오지 중의 오지만 골라 다니며 아픈 이들을 돌보는 현장에 함께했던 부인 또한 얼굴이 오염 안 된 계곡물처럼 맑았다.
부인은 남편이 의료봉사 경험담을 풀어놓을 때, “그 이야기들을 모두 여기에 담았다”라면서 <히말라야 슈바이처>(규장출판사)라는 남편의 자서전 겸 간증록을 슬쩍 내놓았다. 안락한 삶을 내려놓고, 가난한 나라에서 질병을 앓는 이들에게 의술로 나눔과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6ㆍ5를 전후해 우리나라의 풍경을 찍은 사진집을 본 적이 있으신지. 지금은 우리나라가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발전해 여러 면에서 선진화되어 있지만, 그때의 사진들을 보면 정말 ‘그때를 아십니까?’라는 말이 절로 나올 것이다. 네팔의 지금 풍경이 그때 우리가 살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강원희 선생이 처음 네팔에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행들과 함께 티베트 난민촌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한 남자가 일행을 집으로 들어오라고 강권하더니 차를 권했다. 그런데 찻잔을 엄지손가락으로 쓱 돌리며 닦더니 차를 따랐다. 네팔 사람들은 아무 데서나 손으로 코를 풀어 건물 기둥이나 책상 모서리, 옷자락에 닦는다. 그런 손으로 컵을 닦은 것이다.
일행은 아무도 마시지 않았지만, 그는 ‘여기 계속 있으려면 이걸 마셔야 한다’고 생각하고 단숨에 들이켰다. 의사는 보통사람보다 위생에 더 예민할 수밖에 없지만, 네팔에서는 더러운 것을 더럽다고 여기지 않고 참는 연습을 해야 했다. 이렇게 현지화에 충실한 결과 그는 네팔에서만 세 차례에 걸쳐 10년 동안 의료봉사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가 네팔의 관광도시 포카라에서 활동하던 1985년, 병원 응급실에 60대 할아버지가 황급히 찾아왔다. 두 아들이 번갈아가며 업고 온 허름한 차림의 할아버지를 검사하고 진찰한 결과 전복막염(全腹膜炎)이었다. 배 전체에 염증이 퍼진 상태여서 급히 수술을 결정하고 동행한 두 아들에게 헌혈을 요청했더니 망설이다가 수락했다.
수술하고 봉합을 마쳤는데 할아버지가 쇼크에 빠져 긴급수혈이 필요한 상황이 됐다. 그러나 아들들은 무섭다며 헌혈을 거부했다. 기가 막힌 상황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자신과 환자의 혈액형이 같은 것을 확인한 그는 자신의 피를 정상 채혈량보다 많이 뽑아 수혈했고, 환자는 목숨을 건졌다. 사실 그는 피를 더 뽑으려고 했지만, 소식을 듣고 달려온 네팔인 원장이 “이러다가 닥터 강이 죽는다”면서 채혈을 중지시키는 바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자에게는 먹거리를 사주기도 한다. 퇴원해도 잘 먹어야 회복이 빠르기 때문에 식료품을 사들고 다 쓰러져가는 환자의 집을 찾아간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병원에서 퇴근한 뒤에도 자신을 찾는 환자가 있으면 왕진을 서슴지 않으며, 주말이면 쉬지 않고 이동진료를 간다. 멀지 않은 곳으로 갈 때는 110cc에 불과한 작은 오토바이 뒤에 아내를 태우고 간다. 간호사 출신인 아내가 그의 보조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자신의 피를 수혈해 중환자를 살려내고, 부인을 오토바이에 태워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찾아 이동진료를 하며, 환자가 퇴원하면 식료품을 사들고 환자의 집을 찾는 그를 네팔 사람들은 서슴없이 ‘히말라야의 슈바이처’라고 부르고 있다.
그는 또한 네팔의 거지와 행려자들로부터 ‘다주’로 불린다. 네팔어 ‘다주’는 ‘형님’을 뜻하는데, 단순한 형이 아니라 아주 존경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계급사회인 네팔에서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사회적 약자들을 직접 치료하고, 무료로 약을 주다보니 그들에게 ‘다주’로 불리며 추앙받는 것이다.
1934년 황해도 재령군에서 태어나 참혹한 전쟁과 가난을 겪은 그는 연세대 의대에 다닐 때부터 대학연합 의료봉사 동아리인 생명경외클럽(Veneratio Vitae Club) 활동을 하고, 선교사 고허번(Herbert A.Codington) 박사의 이동진료를 따라다니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수련의이던 1962년 연세대 간호학과를 마치고 간호사로 일하던 부인과 결혼식을 올렸고, ‘무의촌 진료’를 약속한 혼인서약대로 군의관으로 군복무를 마친 1970년 무의촌이나 다름없던 강원도 간성에서 개원했다.

속초의 이름난 외과의사
같은 해 연말에 속초로 장소를 옮겨 10여 년간 대동의원을 운영한 것은 “속초에서 북방한계선까지 큰 수술을 할 수 있는 의사가 없다. 강원도 동쪽의 환자들에게 진짜 도움이 되려면 중환자들이 모이는 속초에서 개원해야 한다”는 주변의 집요한 권유 때문이었다. 대동의원을 운영할 때도 궁핍한 환자에게는 병원비를 받지 않았다. 수술을 하더라도 비용을 미
리 말하지 않고 수술이 끝난 뒤 “있는 대로 내세요”라고 했으며, 무의탁 노인과 빈민들을 무료로 진료해 주었다.
다른 지역에서도 환자들이 찾아오는 유능한 외과 의사로 살던 그는 1980년부터 이상한 일을 몇 차례 겪는다.
환자를 많이 보다 보면 스트레스가 쌓인다. 그는 육체적ㆍ정신적 압박감을 과속운전으로 풀었다. 그의 운전 실력은 군의관으로 참전한 베트남에서 배운 것이라 난폭하기까지 했다. 하루는 시골의 산길을 과속으로 달리다가 차가 낭떠러지에서 몇 차례 구르는 아찔한 사고를 당했는데, 그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이해하기 어려운 의료사고도 겪었다.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그는 안락한 삶 대신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살라는 계시로 받아들였다. 그의 나이 48세.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고, 병원은 환자가 몰려서 숨 쉴 틈이 없을 지경이었다.

핵심은 환자를 위하는 마음
가족과 주변사람들은 “보통사람처럼 살자”거나, “속초에서 봉사활동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만류했지만 그는 더 이상 인생의 황금기를 소모적으로 보낼 수 없다고 결심했다. 때맞춰 평소 교분이 있던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가 네팔에서의 의료활동을 제안했다. 1982년 8월, 마침내 그는 생애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네팔로 떠나면서 의료봉사의 첫발을 내디뎠다.
빈부귀천에 상관하지 않고 환자들을 섬기는 의료 봉사활동의 시작이었다.
네팔에서는 힘든 병원 근무를 하면서도 한두 달에 한 번은 장거리 이동진료를 다녀왔다. 하루에 갈 수 있는 곳이라면 환자들도 비교적 쉽게 병원을 찾아올 수 있으므로 적어도 하룻밤을 자면서 가거나, 아니면 15시간가량 걸어서 도착하는 오지를 찾아갔다. 보통 간호사 2명과 동네사람 포함해 5~6명이 한 진료팀이 되는데, 1~2일 동안 200명 이상을 진료한다.
그도 사람인지라 이런 곳을 다녀오면 너무 힘이 들어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생각이 달라진다.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오지 사람들 가운데에는 초기에 치료받았으면 건강을 회복했을 환자가 많았다. 진료 시기를 놓쳐서 목숨까지 잃는 일을 떠올리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또 다시 험한 길에 오르고 만다.
네팔에서 10년, 방글라데시에서 4년, 스리랑카에서 4년 그리고 에티오피아에서 7년 동안 활동하면서 그는 대체로 비슷한 스케줄을 소화했다. 일과시간에는 병원이나 난민센터 등에서 환자를 보고, 저녁에는 왕진을 다녔으며, 주말에는 장거리 이동진료를 다닌 것이다. 80세가 멀지 않은 나이인데도 그는 얼마 전 다시 네팔로 떠나 의료봉사를 하고 있다.
의약품과 의료시설이 턱없이 부족한 오지에서 환자들을 치료한 그의 헌신적인 삶은 2011년 ‘소명 3-히말라야의 슈바이처’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 영화는, 그동안 그가 한 일이 돈을 벌거나 명예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과 나눔 그 자체를 위한 봉사였다는 사실을 잘 증거하고 있다.
“1년에 한 번 정도 2~3주간 휴식을 취하기 위해 우리나라를 찾을 때마다 들르는 포항 선린병원에 ‘We care, God heals!’라는 글이 적혀 있습니다. ‘의사는 돌볼 뿐이고, 치료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말이죠.
제가 하는 일의 핵심은 의료기술이 아니라 환자를 위하는 마음입니다. 그것만 있으면 어떤 장애건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일은 하나님에게 맡겨야죠. 저는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오지에서 아픈 이들을 돌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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