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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편지 그리운 벌 함민복

강화도 길상장날 장터에 들러 모종을 샀다. 계절이 계절인지라 나물과 모종들이 많이 나왔다. 시골 아낙들의 흥정 뒤에 줄을 서서, 머릿속으로 텃밭의 크기를 가늠하며, 고추·토마토·상추·수세미를 샀다. 챙 넓은 모자를 하나 사고 택시를 불러 탔다. 집까지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 거리라 평소에는 걸어 다녔지만 비닐봉투에 든 모종을 생각해서였다.

여름이 일찍 온 것 같죠?
그러게 말이시다. 여름도 한여름 아니꺄. 이거야 원, 봄이 없어졌으니 큰일 낫시다.
택시 기사의 말을 들으며 둘러본 주위 산이 온통 푸르렀다. 나무들이 조심조심 내민 연한 연두빛 새순 사이사이에 산벚꽃이 피어나 파스텔 풍이었던 게 어저께 같은데, 벌써 산에서 제일 늦게 잎을 틔우는 상수리나무마저 잎사귀가 피어나 산이 짙푸르렀다. 7월 중순 날씨가 5월 초순에 찾아왔다고 연일 호들갑을 떨던 TV 뉴스의 증거로 산은 변해 있었다.

햇볕이 뜨거워 모종들을 바로 이식할 수 없어, 저녁때까지 보일러실 그늘에 두기로 하고 집 뒤로 갔다. 개들이 그늘을 찾아 혀를 빼물고 축 늘어져있었다. 참새 한 마리가 개장 안으로 날아와 물그릇에 앉아 물을 찍어 먹어도, 만사가 귀찮은 듯 멀뚱멀뚱 쳐다만 봤다. 우리 집 개는 1년에 털갈이를 두 번한다. 여름이 오기 전에 가는 털로 갈고, 겨울이 오기 전에 굵은 털을 촘촘히 갈아입는다. 그런데 털갈이를 시작하기도 전에 여름이 왔으니 오죽 덥겠는가. 몸을 들썩이며 가쁜 숨을 쉬는 개의 혀끝에 침이 길게 매달렸다. 턱이 빠져라 하품을 하던 개가 앞다리를 끌어 입에 물고 자근자근 털을 훑었다. 개털 속 목마른 벼룩이 개의 더운 피를 빨고 있나보다.

우리가 얻기 위해 잃은 것들
이웃집 앵두꽃이 피었을 때도 벌이 날아오지 않더니, 우리 집에 피어난 배꽃에도 벌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배나무꽃이 덜 화사했다. 앞집 복사꽃에도 벌은 날아오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꽃들의 안색이 좋을 리 없다. 핵과일들은 수분(受粉)을 해야 열매를 맺는다는데 수분을 할 수 없으니, 꽃나무들은 얼마나 깊은 절망에 빠질까. 한 해를 낙망한 심정으로 살아야 할 나무들의 꽃도 마음이 평화로울 리 있겠는가.

꽃나무마다 가득하던 벌들 붕붕거리던 소리는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꽃나무에 정적이 짙어지더니, 끝내, 꽃향기마저 능동적으로 벌들을 찾아 나선 듯 날카로워진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기억 속에 벌들은 얼마나 많았던가. 아카시나무, 밤나무, 라일락나무에 꽃이 피면 벌들의 날갯짓 소리가 넘쳐나지 않았던가. 그 날갯짓 소리가 꽃핀 나무를 통째 하늘로 들어올릴 것만 같기도 했었다. 어린 시절엔 길을 가다가도 자주 벌을 만났다. 벌에 쏘일까 두려워 그 자리에 웅크려 앉으며, 정말 벌은 뻐꾸기를 무서워할까를 생각하며 ‘뻐꾹뻐꾹’ 뻐꾸기 흉내도 내었다. 군부대에서 아카시 꽃핀 나무를 베어 넘길 때, 나무들의 영혼처럼 일제히 빠져나가던 벌떼는 어떠했던가.

아인슈타인은 꿀벌이 사라지면 인류가 4년 안에 멸망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꿀벌이 사라지면, 지구에서 생산되고 있는 전체 작물의 3분의 1(충매로 수분을 하는)의 80%가 사라진다고 한다. 많은 식물들이 열매를 맺지 못하면 초식동물도 사라지고, 초식동물을 먹고 사는 동물들도 사라질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하다. 꿀벌이 사라지고 있는 원인으로 지구의 온난화 현상, 사람들이 사용하는 무선장비들이 발생하는 전자파, 정체불명의 바이러스, 유전자조작 식물 등 여러 가설들이 나왔고 일부는 부분적으로 증명되고도 있다. 우리 인류의 욕심이 벌에게 벌 받을 시기가 참말로 눈앞에 닥쳐온 것은 아닐까.

우리가 얻기 위해 잃은 것들은 얼마나 많을까. 한겨울에 죽어가는 아버지를 위해 눈밭 속에서 딸기를 구해와 효자가 되던 시절에서 우리는 얼마나 멀리 와 있는 것일까. 내 유년시절엔 대형마트는커녕 냉장고도 없었다. 동네에 찬 우물이 하나 있어, 찬물 떠다가 찬밥 말아먹으며, 된장에 풋고추 찍어 먹던 맛은 어디로 갔을까.

고추와 상추 모종을 심으며, 바쁜 일상생활을 하며 나도 몰래 더워진 눈빛을 가끔 석양에 식히며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부터는 곡식 하나를 심어도 비닐하우스에서 계절을 앞당기며 자란 모종이 아닌, 씨앗을 땅에 심어야겠다는 결심도 섰다. 모종을 심은 텃밭에 물을 뿌리며 오래 전에 썼던 동시 한 편을 떠올려보았다.

연구

슈퍼소
슈퍼옥수수
슈퍼콩
자꾸자꾸
동물 식물을 크게 만들어야만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다면
차라리
사람들이 작아지는 방법을 연구해보면 어떨까
밥상, 밥그릇, 숟가락, 젓가락
다 앙증맞게 만들어도 되겠지
나무 위에서 잠을 잘 수도 있겠지만
인공날개 달고 하늘을 날 수도 있겠지만
원하지도 않았는데 커진 콩, 옥수수, 소는
얼마나 살아가기 불편할까.

※ 함민복: 1962년 충북 중원 출생. 1988년 <세계의 문학> 통해 데뷔. 시집 <꽃봇대>, <말랑말랑한 힘>, 산문집 <눈물은 왜 짠가> 등 출간. 김수영문학상, 박용래문학상, 윤동주문학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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