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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가 산책 디자이너 노라노의 일과 삶 강승민

그는 멈추지 않는다. 내년이면 만 80세가 되지만 이렇게 말한다. “인생은 멈추지 않는다”고. 남들 같으면 은퇴하고도 남을 나이지만 그는 여전한 ‘현역’이다.  그는 1956년 대한민국 최초로 패션쇼를 열었고 80년대 미국 뉴욕에서 활약한 패션디자이너 노라노 씨다.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3월까지 넉 달 동안 그를 만났다. 거의 매일 전화통화를 하거나 많게는 한달에 서너 번 이상 직접 만나 식사를 하며 얘기를 나눴다. 노 선생이 12월 6일부터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  나의 선택, 나의 패션’을 중앙일보에 연재했고 필자는 담당기자였기 때문이다. 필자는 노 선생이 직접 쓴 원고를 받아 신문에 적합하도록 약간 손을 보고 그에 맞는 사진을 고르는 일을 맡았기 때문에 그와의 만남은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웠다. 4개월 동안 그와 나눈 이야기들, 노라노의 일과 삶을 정리한다.


1947년에 떠난 미국 유학길
“그렇게 대단한 한국인 패션디자이너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는 것이 중앙일보에 연재된 노선생 얘기에 대한 대부분 독자들의 반응이다. 그가 만약 요즘처럼 연예인의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인터넷을 비롯한 수많은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시대에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면 어땠을까. 그랬는데도 이런 ‘대단한 성공기’가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다면 그것 자체로도 뉴스감일 게다.

그런데 그가 가장 왕성하게 활동했던 80년대에도 노라노의 성공기가 자주 신문 잡지에 실렸던 것은 아니다.  왜 그랬을까. 그의 대답은 이렇다.

“나는 한번도 내 자랑을 한 적이 없어요. 뭐 별로 자랑할 만한 일도 없었고, 일로 만난 사람들과도 관련된 일 얘기 말곤 개인사를 떠벌린 적도 없고…. 그래서 그런 거겠죠.”

노라노 선생은 해방 직후인 1947년 초여름 한국인 여성으론 두번째(첫번째는 오페라 가수였던 고 김자경 선생이다)로 당시 허허벌판이던 여의도 공항에서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패션 디자인 공부를 위한 유학길이었다.‘한복 대신 간소복을 입자’는 국가 주도의 캠페인이 벌어지던 것이 50년대였으니 46년 대한민국엔 ‘패션’의 개념조차 없던 때였다. LA의 프랭크 왜건 테크니컬 칼리지에서 디자인을 공부한 그는 1950년 귀국한 뒤 명동에 ‘노라노의 집’이란 의상실을 열었고 불모지였던 한국의 패션을 일구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도 그는 학업과 병행해 ‘타박’이라는 기성복 제조업체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며 창작뿐 아니라 상업적인 실무까지 익혔다. 56년 프랑스 파리의 패션학교인‘아카데미 줄리앙 아르 에콜’에서 수학했고, 이탈리아ㆍ스페인 등지를 여행하며 예술적 감성을 키웠다.



그에게는 정말 자랑할 만한 일이 없었을까. “나는 많은 혜택을 받은 사람이에요. 남들보다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 교육받고 지금처럼 살 수 있는 기회도 얻었죠. 그런데 내가 하는 일이 잘된다고 그걸 자꾸 얘기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살았어요. 어린 시절부터 말이죠.” 그가 쉽게 말하지 않으려 했던 자신의 성공은 그의 남다른 성장 환경과 관련이 깊다.

그는 1928년 우리나라 초대 방송관리국장인 노창성과 최초의 여성 아나운서인 이옥경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나운서였던 어머니 덕에 그는 일찍부터 패션에 눈을 떴다. “어머닌 직업상 의상에 신경을 많이 쓰셨죠. 40년대엔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던 프랑스인 디자이너한테 옷을 해 입으셨고요. 외할아버지도 멋쟁이셨어요. 그래서 옷이며 멋내기며 제가 물려받은 유전자는 자연스레 ‘패션 DNA’였던 거죠.”
하지만 그가 이뤄낸 것 전부는 노력의 결과다.

“내년에 만으로 80이예요. 하지만 크게 다쳐 입원했을 때와 일요일을 빼곤 지금까지 단 하루도 쉬지 않았어요. 사업이 잘 될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늘 한결같이 오전 8시면 사무실로 출근해 열심히 일을 했어요.” 대개 성공한 사람이 그렇듯 성공의 비결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노력’뿐이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죠”
그는 현재 예림양행 소속 디자이너다. “내 평생 직함은 이것뿐이에요. ‘디자이너’.” 회사 운영과 중요한 결정에 그가 전혀 관여치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늘 디자이너로 살고 싶어 했고 또 그렇게 살았다.
흔히 사람들은 ‘노라노’라는 이름을 들으면 ‘양재학원’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는 디자이너로서 옷을 만든 것 말곤 다른 일을 해 본적이 없다.

“나는 건달이에요, 건달.” 환하게 웃으며 농담 섞인 대답을 한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디자이너는 건달이어야 해요. 항상 트렌드에 올라타야 하니까요.” 그가 평생 최고의 디자이너가 될 수 있었던 이유 하나를 들은 것 같다. “80년대엔 1년에도 서너 번씩 전 세계를 돌았어요. 뉴욕, LA, 시카고, 파리, 밀라노, 로마, 홍콩, 도쿄…. 그렇게 바쁘게 트렌드를 흡수하며 살았죠.”

79년 노라노는 미국 뉴욕 7번가에 쇼룸을 연다. 그해 그는 ‘헨리 벤델(Henry Vendel)’이라는 최고급 부티크에서도 주문을 받을 만큼 인정받는 디자이너가 됐다.

“‘여왕처럼 보이려 하는데 왕의 몸값은 필요 없다’를 캐치프레이즈로 삼고 고급스러운 실크 드레스를 합리적인 가격대로 만날 수 있게 한 우리 아이디어가 미국 여성에게 통했던 거죠.” 성공은 이어졌고 결국 뉴욕 7번가의 메이시 백화점 1층 쇼윈도 15개가 모두 그의 옷으로 채워지는 ‘사건’도 생겼다. “가장 잘 팔리면서도 백화점 바이어들이 제일 강력하게 추천하는 상품만이 1층 쇼윈도를 장식할 수 있는 건데…. 그땐 그 쇼윈도에 걸려 있을 내 옷만 생각해도 마음이 설레었어요.”

그가 갑자기 해외에 진출해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40년대 미국 유학을 거쳐 해외 진출을 차근차근 진행시켰다. 70년부터 73년까지는 프랑스 파리 프레타 포르테(기성복) 패션쇼에 참가했고 74년에는 미국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패션쇼도 열었다.  80년대 미국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90년에는 홍콩과 일본에도 회사를 세워 활동 무대를 세계로 넓혀나갔다.



끝없는 도전
허허롭게 웃는 모습이 필자에게 보여준 모습의 전부지만 분명 그 여유로운 미소 가운데는 그만의 철학이 있을 듯싶었다. “사는데 특별한 목표는 없어요. 하지만 도전은 있어요. 목표라는 것은 달성하고 나면 허탈해지죠. 하지만 도전은 늘 새로운 도전을 이끌어 내고 성취감을 줘요.”

그가 지금까지 끊임없이 새로워진 이유를 찾았다 싶었다. 그는 중앙일보에 연재된 자신의 글을 5년도 넘게 준비해 왔다. “기억력이 좋을 때 정리해 두자고 생각했어요. 아주 조금씩 천천히 준비했죠. 매일은 아니었지만 하루에 한 시간 이상씩 준비했죠.” 신문에 연재된 그의 글은 지면 제약 때문에 준비한 것의 일부뿐이다. 그는 “연재하지 못한 부분을 더해서 책을 출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래야 그의 도전이 마무리 되는 것일까. 다음은 뭘까.

“내년엔 지금까지 해왔던 작품 활동을 총정리할 계획이에요. 제대로 된 ‘한국 현대 복식사’에 남을 만한 자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죠.” 역시 다음 도전 과제가 준비돼 있었다. 그런데 또 그와 연관된 다음 과제도 있었다.

“내 것만 정리할 게 아니라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것도 필요한 것 같아요. 아무리 찾아봐도 잘 정리된 ‘한국 현대 복식사’ 책을 구할 수가 없거든요.”

그의 다음 도전은 무엇일지 도무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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