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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교실 “두뇌활동 소홀하면 치매 걸리기 십상” 이재홍

우리나라에서 ‘알츠하이머병’이라는 퇴행성 치매질환이 세간의 큰 주목을 끈 계기가 된 일이 있었다. 바로 미국 대통령 레이건 때문인데, 미국인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전직 대통령인 그가 1994년 겨울 자신이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담화문 형식으로 밝혔다.
“이제 나는 인생의 황혼기로 여행길을 떠납니다. 하지만 미국의 앞날에는 항상 밝은 아침이 있을 것임을 믿습니다.”
절로 듣는 이의 눈시울을 적시게 하는 가슴 뭉클한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당시 신문지상에 크게 보도된 바 있다. 일국의 대통령을 지낸 분도 노인성 치매인 알츠하이머병을 피해갈 수 없구나 하는 충격과 놀라움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 일을 계기로 미국에서는 알츠하이머병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크게 높아지고 질병 극복을 위한 연구 열기가 활화산처럼 끓어올랐다. 막대한 연구 기금이 조성된 것은 물론이다. 연구자들 입장에서는 레이건 전 대통령만큼 훌륭한 알츠하이머병 홍보대사가 다시 없었을 것이다.
근래 ‘천일의 약속’이라는 TV 드라마가 큰 화제 속에 막을 내렸다. 젊고 아리따운 아가씨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사랑하는 사람을 옆에 두고 점점 기억이 바래지는 가운데 실의와 좌절을 겪는 과정이 눈물겹게 그려졌다. 그런 탓인지 요즘 기억력이 떨어져 걱정된다며 진료실 문을 두드리는 환자 아닌 환자들이 부쩍 늘고, 신문사에서 알츠하이머병에 대한 자료를 요구하는 전화가 자주 걸려온다. 모름지기 병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고 관심을 끌어야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고 그래야 치료의 길도 보일 수가 있다.

‘천일의 약속’ 방영 뒤 급증한 환자(?)
알츠하이머병으로 대변되는 치매가 젊은 사람에게도 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알츠하이머병은 65세 이상 노인에게서 주로 생기는 퇴행성 뇌질환이다. 이 병은 뇌세포가 점점 파괴되면서 뇌 조직이 줄어들고 그에 따라 뇌기능이 악화일로를 밟는다.
처음에는 기억력 장애로만 나타나 노인성 건망증이나 우울증과 구분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초기에 기억력 장애가 두드러진 이유는 뇌에서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라는 부위(측두엽 안쪽에 위치)가 침범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병변이 인근 부위로 퍼져나가면 점차 공간 지각력과 판단력이 떨어지고 일상생활 수행능력이 상실된다. 이때쯤 되면 누가 봐도 분명한 치매의 증상을 보이는 것이다.
일단 치매 단계에 접어들면 걷잡을 수 없이 증상이 진행돼 기억력이 상실되고, 고유한 인격이 점차 없어지며, 어린애같이 돼버려 가족이 늘 곁에서 돌봐야 하는 상태로 된다. 또한 환각, 망상, 공격적 행동 등의 이상행동을 보이고 가족이 누구인지도 몰라보게 된다. 종국에는 인지기능 외에 운동기능에도 이상이 와 몸을 잘 못 쓰며 자리보전하고 눕게 돼 폐렴 같은 합병증으로 사망에 이르게 된다.

‘젊은 치매환자’는 전체 알츠하이머병의 5%
알츠하이머병은 뇌졸중, 암, 심장병과 더불어 65세 이상 노인 인구의 주요한 사망 원인이며, 장수사회의 앞날을 어둡게 하는 주범이라 할 수 있다. 경제성장과 의학발달로 인간 수명 100세를 바라보는 시대가 온다고 하는데, 노인 인구가 많아지면 자연 알츠하이머병 환자가 급증하는 결과가 된다.
이 병은 왜 생기는 것일까? 알츠하이머병 사망 환자의 뇌조직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뇌세포 바깥에 덩어리를 이루며 모여 있는 아밀로이드판(amyloid plaque)과 뇌세포 안에 실타래처럼 뭉쳐 있는 신경원섬유매듭(neurofibrillary tangle)이 특징적으로 관찰된다. 각각을 구성하는 것이 베타아밀로이드(β-amyloid) 단백질과 타우(tau) 단백질이라는 것이고, 그 중에서도 베타아밀로이드가 뇌에 쌓이는 것이 알츠하이머병을 일으키는 시발점이 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즉, 이 병의 원인은 뇌 세포막에 있는 정상 단백질이 대사되는 과정에서 베타아밀로이드라는 독성 단백질이 생성돼 분해되지 않고 덩어리(plaque)를 만들어 뇌 안에 축적되기 때문으로 믿어진다.
이렇게 되면 뇌신경세포간의 신호전달이 방해받고, 타우 단백 침착 같은 이차적인 병적 과정이 유발돼 결국 뇌세포가 파괴된다. 특정인에게서 알츠하이머병이 생기는 이유는 아직 분명치 않으나 유전적 소인(genetic predisposition)과 환경적 요인(environ mental factors)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의 여주인공 수애의 경우는 알츠하이머병을 일으키는 원인 유전자를 부모로부터 물려받아 뇌에서 베타아밀로이드가 과잉 생산됨으로써 병이 이른 나이에 생기는 ‘유전형(또는 가족형)’ 알츠하이머병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불행한 경우는 다행히 전체 알츠하이머병의 5% 정도에 그친다.
그러나 알츠하이머병의 95%를 차지하는 ‘만발형(late-onset, 대개 65세 이후에 발병)’은 이러한 유전자 이상이 발견되지 않는다. 단지 알츠하이머병이 발병할 확률을 높이는 유전자 변이가 많이 관찰될 뿐이다. 이를 ‘감수성 유전자(susceptibility gene)’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병을 초래하는 원인 유전자가 아니라 발병 가능성을 높이는 위험요인 유전자인 것이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뇌에서 콜레스테롤을 운반하는 아포지질단백질인 apolipoprotein E를 만드는 유전자이다. 마치 혈액형처럼 ε2, ε3, ε4의 세 가지 형질로 존재하는데, ε4를 부모로부터 물려받을 경우 노인이 되었을 때 알츠하이머병의 발생위험도가 크게 올라간다. 그러나 이러한 유전적 요인은 알츠하이머병의 여러 위험인자 중의 하나일 뿐이고 뇌졸중, 두부 외상, 저학력 등의 후천적 또는 환경적 요인이 또한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유소년이나 청소년기의 교육이 강조되는데, 이는 뇌의 예비능력을 높이는 효과가 있어 훗날 알츠하이머병으로 인한 뇌 손상이 와도 버틸 수 있는 여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따라서 교육 연한이 높을수록 알츠하이머병에 대해 유리하고, 6~7년 이하의 저학력은 불리한 위치에 놓인다. 뇌졸중이나 두부 외상 같은 뇌 손상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만큼 뇌의 여력이 줄어들기 때문에 알츠하이머병에 걸리기 쉽다.

치매를 치료하고 예방하려면?
이 병의 진단은 병력과 신경심리검사 그리고 뇌 MRI 결과를 참고한 후 의사가 내리는 임상적 판단에 의해 이루어진다. MRI를 찍어보면 환자의 대뇌 위축, 특히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 부위의 위축을 흔히 관찰할 수 있다. 확진은 뇌 생검이나 사후의 부검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었는데, 근래 영상기법의 발달로 베타아밀로이드에 선택적으로 결합해 뇌 안에 베타아밀로이드가 축적돼 있는 것을 바로 보여줄 수 있는 아밀로이드 PET 영상법이 나와 알츠하이머병 연구와 조기진단에 크게 기여할 전망이다.
치료 면에서는 아직 뚜렷한 약물요법이 나와 있지 않다. ‘콜린분해효소억제제’ 약물이 FDA의 승인을 받아 공식 치료제로 많이 쓰이고 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증상 치료제로, 병의 진행을 멈추거나 되돌리지 못한다. 알츠하이머병 뇌에서 부족한 ‘아세틸콜린(acetylcholine)’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을 뇌 안에서 오래 남아 작용하도록 도와줌으로써 일시적인 인지기능의 향상과 진행속도를 늦춰주는 효과를 나타낼 뿐이다.
따라서 병의 진행을 바꿀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의 약물이 세계적인 다국적 제약회사를 중심으로 전 세계적으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병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독성 단백질의 생성을 막거나 분해를 유도하고 제거를 용이하게 하는 약물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것 중의 하나로 면역반응을 이용해 베타아밀로이드를 뇌에서 제거하는 단일항체치료가 근래에 유망한 방법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병의 주범이라 할 수 있는 물질을 뇌에서 몰아내는 방법이야말로 근본적인 치료에 가까이 다가서는 길이 될 것이다. 앞서 말한 알츠하이머병의 조기진단법과 결합시켜 아직 뇌 손상이 없거나 경미한 상태의 환자를 일찍 발견해 위와 같은 치료를 시행한다면 치매의 진행을 방지하는 훌륭한 전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약물요법만이 능사는 아니다. 모든 병이 그러하듯이 치료보다는 예방이 우선이고 더 효과적이다. 알츠하이머병에 대한 여러 역학조사 결과 알츠하이머병 예방을 위해서는 평소부터 자신의 몸 관리, 뇌 관리를 잘해야 한다는 것이 거듭된 결론이다.
알츠하이머병의 원인인 베타아밀로이드의 축적은 치매증상 시작보다 최소 10년에서 15년 정도 앞서서 시작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치료나 예방의 기회가 넓게 열려 있다는 의미이다. 뇌세포의 손상을 막기 위해서 항산화제가 많이 함유된 채소나 과일, 생선을 평소에 자주 먹는 식습관이 권장된다. 중년에 고혈압이나 당뇨병이 있는 사람은 미리 이를 잘 조절해나갈 일이고, 평소 두뇌활동을 활발히 하고 규칙적인 신체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으며, 사람들과 만나고 어울리는 사회활동을 적극적으로 잘 유지하는 것이 뇌 건강을 유지하면서 치매를 예방하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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