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커버스토리 “아산상 받고 한 명 더 데려왔어요” 유인종

기우였다. 여덟 명이나 되는 입양아들이 과연 제대로 자라고 있을까 하는 걱정은 그야말로 쓸데없는 염려였다.
지난해 8월 말, 아산상 효행·가족 부문 후보에 오른 탁정식(60) 씨를 예비심사하기 위해 서울 율현동 자택을 찾았을 때는 아이들이 모두 학교와 유치원에 가 있어서 만나지 못했다. 공개입양한 아이들이 여덟 명이나 되고, 그 중 네 명이 장애수당을 받는 장애아인데 아이들을 만나지 않아도 되는 것인지 걱정스러웠다.
그런데도 탁정식 씨를 괜찮게 평가하였던 것은 아이들을 입양해 기르는 그와 아내(강수숙·52)가 입양에 대해 건강하고 확고한 철학을 지니고 있고, 그들이 하는 말에서 진정성이 전해졌으며, 부부의 선한 눈빛에서 우러나오는 인품 때문이었다. 경험에서 배운 ‘목소리와 눈빛은 그 사람을 반영한다’는 생각을 믿어보기로 했다.
물론, 탁정식 씨가 지난해 6월 정부종합청사 방호원을 정년퇴임하기 전까지 ‘입양’으로 받은 여러 상들(장관·국무총리·대통령 표창 등)도 평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후 아산상 운영위원회의 엄격한 심사 결과 탁정식 씨는 3명의 효행·가족상 수상자에 포함되었고, 작년 11월 25일 상을 받았다.

무슨 일 있어도 아이들 편인 엄마
이번 인터뷰 시기는 일부러 아이들 방학 때를 골랐다. 그래도 친아들인 장남(고3)을 포함해 아이들이 9명이어서, 모두 집에 있는 시간을 맞추기가 정말 어려웠다. 어떤 아이가 학원에서 돌아오면 다른 아이가 학원에 가기 때문이었다. 입시 준비를 하느라 새벽에 집에서 나가 한밤중에 돌아오는 큰아들은 포기하고 나머지 아이들의 시간을 간신히 조정해 1월 10일 오후 5시에 자택을 찾았다.
1억5천만 원에 전세로 살고 있는 집은 대모산 자락의 단독주택 2층으로, 방 3개와 다락방이 2개 있는 35평형이었다. 현관에 들어섰다가 열려 있는 신발장을 쳐다보곤 입이 딱 벌어졌다. 작지 않은 신발장은 아이들 신발로 빼곡했다. 부모의 신발은 겨우 한 켤레씩만 눈에 띄었다.
거실에 들어서자 아이들이 분주하게 오가며 인사했다. 주눅 들지 않고 밝은 모습이 보기 좋았다. 오직 한 명, 막내인 5남(7)만이 골난 표정을 풀지 않았다. 막내는 촬영을 하면서도 “사진 찍기 싫다”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며 화난 얼굴을 감추지 않았다. 그래도 엄마는 “우리 집에 온 지 1년도 안 돼 아직 적응이 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야 마음속 응어리가 풀릴 것”이라며 막내를 두둔했다.
사실 엄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편이 되어 줄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런 든든한 ‘빽’이 있기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떤 어려운 일이 생겨도 헤쳐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막내를 믿어 주는 엄마가 있으므로, 그 아이의 상처받은 마음은 점차 치유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새끼들의 머릿수를 세는 엄마돼지처럼 아이들의 수를 헤아리는데 아무래도 한 명이 더 많았다. 장남은 학교에 가 있으므로 4남4녀, 모두 8명이어야 하는데 아무리 세어 봐도 9명이었다. 꼼꼼히 살펴보니 여자아이가 한 명 더 늘어 있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아산상을 받고 며칠 뒤에 여자아이 한 명을 더 데리고 왔어요. 이번에 처음 입양된 게 아니라 두 군데에 입양됐다가 양쪽 집에서 포기한 아이에요. 생모에게 버림받은 것을 포함하면 세 번이나 버려진 것이죠. 이런 아이들은 문제가 많은 것처럼 보여요. 도벽이 있거나, 폭식을 하고, 심한 경우 자위까지 하거든요. 사실 이런 행동들은 관심을 끌기 위해 하는 것인데, 이전 입양 가정에서는 이해를 하지 못한 것 같아요. 자꾸 버림을 받으니 아이는 상처를 더 받고…. 애완견도 버림받으면 문제 행동을 하는데, 사람은 오죽 하겠어요…. 그래서 일단 정서를 순화시켜 보려고 데려왔어요.”
엄마가 냇물처럼 잔잔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러는 중에도 아이는 계속 부모 곁을 맴돌며 물건을 던지거나, 아빠를 때리면서 주의를 끌었다.

아홉 번째 아이를 데려온 이유
새로 온 4녀에게도 다른 아이들처럼 부모가 새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 집에 입양되는 아이들은 모두 순우리말로 된 새 이름을 얻었다. 1990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수필이 당선된 아내의 솜씨다. 초등학교 5학년일 때 입양한 차남의 경우 이름을 바꾸면 다 큰 아이에게 오히려 나쁜 영향을 미칠 것 같아 본래 이름을 쓰게 했다. 물론, 성(姓)은 모두 ‘탁(卓)’씨로 바꿨다.
부부는 4녀 또한 정식으로 입양하려고 하지만, 입양기관에서 난색을 표시하고 있다. 입양한 아이들이 지금도 충분히 많다는 것이 이유라고 했다. 그렇다고 4녀를 받겠다고 나서는 가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곳 말고는 4녀가 딱히 갈 곳이 없기 때문에 결국엔 자신들이 맡게 될 것으로, 부부는 전망하고 있었다.
아무튼 대단한 부부였다. 아산상을 받을 즈음에 “여력이 닿으면 아이를 더 입양하겠다”는 말을 하기는 했지만 실행에 옮기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정말 아산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부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집의 아침은 6시 30분부터 시작된다. 3개의 방 중 한 곳에서는 부부와 4남, 5남이 함께 잔다. 또 한 방에서는 남자형제인 장남과 차남, 3남이 생활하고, 마지막 한 방은 여자형제인 3녀와 4녀, 5녀 차지다. 장녀와 차녀는 다락방에서 잔다. 기상한 식구들은 7시쯤 상을 두 개 붙여 놓고 함께 식사를 한다. 예전에는 아내 혼자 식사 준비를 하느라 고생이 많았지만, 지금은 정년퇴임한 남편이 국을 끓이거나 김치전을 붙이면서 일손을 많이 덜어주고 있다.
입이 많다 보니 음식에 들어가는 돈이 여간 많은 것이 아니다. 한 달 생활비가 550만 원 가량 되는데, 이 중 상당액이 식품비다. 흔히 하는 말로, 엥겔 계수가 무척 높은 것이다. 모든 것을 아껴 쓰는 알뜰생활을 해야 하는데, 여기엔 남편이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가령 달걀을 살 때도 인근의 대형 마트를 밤에 가면 7,000원짜리를 4,500원에 팔 때가 있는데, 이런 찬스를 노려서 물건을 사 오는 것이 남편의 몫이다.
이 집에는 자가용이 없다. 첫 번째 이유는 차를 사서 유지할 형편이 안 되고, 두 번째는 차가 환경오염의 주범이고, 세 번째는 장애가 있는 아이들은 걷는 게 건강에 좋아서 차를 마련하지 않았다고 부부는 말한다. 그래서 남편은 마트에 장을 보러 갈 때면 배낭을 메고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입양한 4남5녀의 아이들 중 네 명에게 장애가 있다. 2004년 입양한 장녀는 오른손 검지와 중지가 붙어 있는 지체장애 3급이다. 수술을 해주었지만, 손바닥이 별로 없는 등 손모양이 남달라서 장녀는 손을 늘 소매 안에 감추고 다닌다.

1999년, 맨 처음 입양한 차녀는 장애가 없었다. 차녀 입양 뒤 부부는 ‘이왕 버림받은 아이들에게 가정의 울타리를 제공할 것이라면 차라리 장애아를 입양하자’고 결심했지만, 장애 1급인 아이는 그때만 해도 키울 자신이 없어서 선택한 아이가 장녀였다.
세 번째로 입양한 3남 또한 지체2급으로 중복장애를 갖고 있었다. 손가락과 발가락이 엄마 뱃속에서 절단된 채 태어났고, 오른쪽 다리가 왼쪽보다 짧으면서 발목도 뒤틀려 있었다. 그런 상태로 시설에 버려져 자라던 아이를 5세일 때 집으로 데려왔다. 그런데, 지금 초등학교 4학년이 된 3남은 쾌활한 성격으로 공부를 잘 하고, 뜀박질에도 아무 문제가 없다. 학교에서도 모범생으로 칭찬이 자자해 부부에게 웃음꽃을 선사하고 있다.

아이들의 지적장애를 사랑으로 극복
네 번째로 입양한 3녀는 지적장애 3급이었다. 지능검사를 하면 IQ가 85로 나왔다. 하지만 입양 5년이 지난 지금은 지적장애가 사라졌다. 따라서 장애수당도 받지 않는다. 꾸준히 받은 심리치료의 영향이 크지만, 그보다는 새로 생긴 부모의 헌신적인 사랑이 지적장애를 없앴을 것이다.
다섯 번째로 입양한 차남은 장녀와 나이가 같지만 생일이 10개월 빠르다. 양손의 엄지손가락이 없는 지체장애 4급에 지적장애 1급이었지만, 꾸준히 심리치료를 받게 해주고 있는 지금은 지적장애를 거의 느낄 수 없다.
여섯 번째로 입양한 5녀는 뇌병변1급으로 IQ가 60이다. 안짱다리 수술을 해주었고, 심리치료를 계속 하고 있어서 상태가 호전되는 중이다.
이렇게 차남과 장녀, 3남 그리고 5녀가 장애를 갖고 있다. 이 아이들 앞으로 18세까지 나오는 장애수당이 230만원쯤 된다. 또 복지부와 강남구에서 지급하는 입양수당을 합치면 140만원이 된다. 굳이 ‘돈’ 얘기를 꺼내는 것은 부부가 이런 돈을 노리고 아이들을 입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가 가끔 생기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입양기관에서조차 굳이 장애아를 찾는 부부를 두고 “혹시 앵벌이를 시키려는 것 아니냐?”고 의심한 적이 있었다.
물론 장애와 입양 수당을 합치면 적잖은 액수이다. 하지만 이 돈들은 온전히 아이들을 위해 쓰이고 있다. 아이들을 위한 크고 작은 수술과 치료비, 이런저런 학원비 등으로 그 돈을 지출하는 것이다. 남편이 정년퇴임한 뒤 고정수입이 사라져서 요즘 생활은 빠듯한 편이다. 그러나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밴 부부는 없으면 없는 대로 거기에 맞춰 사는 지혜를 갖추고 있다. 5월부터는 매달 80만 원가량의 연금을 받을 예정이어서 그때부터는 살림이 좀 필 것으로 보인다.
3남을 제외한 아이들의 성적은 좋은 편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부부는 공부를 강요하지도 않는다. 다만 남편이 틈날 때마다 “아빠 나이가 많아서 너희를 돌보는데 한계가 있으니까 공부 열심히 해라. 그래야 세상을 살아간다”며 아이들을 책상 앞에 앉히고 있다.

격려와 칭찬이 아이들에게 큰 무기
탁정식 씨는 1952년 경남 사천에서 2남2녀의 장남이자 둘째로 태어났다. 양조장을 하던 집안이어서 원래는 경제적으로 넉넉했다. 그러나 부친(탁영래·90)이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에 가담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진주고를 졸업한 뒤 부산대 전기과에 입학했다가 집안형편이 어려워 휴학한 뒤 끝내 복학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후 막노동과 가게 점원 등 여러 일을 전전했다. 38세인 1990년 결혼한 뒤 상경하여 은행의 경비로 일하다가 1994년 행정안전부 소속 정부청사관리소에 기능직 10급인 방호원으로 채용됐다. 이때는 독립유공자인 부친의 덕을 봤다. 17년 동안 광화문 앞의 정부종합청사로 출근하다가 지난해 6월 기능직 8급으로 정년퇴임했다.
1960년에 태어난 강수숙 씨는 2남5녀의 넷째딸이자 여섯째로, 고향은 남편과 같은 경남 사천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모친을 여의어서 엄마 없는 아이들의 마음을 잘 헤아린다. 이런 성정이 훗날 시설에 있는 아이들을 입양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녀는 원래 수도생활에 관심이 많았다. 수녀원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들을 입양해서 살 생각이었다. 그러던 중에 오빠의 친구인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가진 것은 없지만 바르게살기 위해 고민하는 인품을 보고 남편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였다. 이때 ‘입양’이라는 결혼조건을 제시했는데 남편은 제안을 선선히 받아들였고, 그 약속을 결혼 9년 뒤인 첫아이 입양 때부터 충실히 지키고 있다.
“아이들에게 입양 사실을 숨기면 결국 사춘기 때 문제가 생겨요. 하지만 우리처럼 공개입양하면 아이들이 사춘기도 무난히 넘깁니다. 또 우리 집에서는 장애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친아들보다 입양한 아들과 딸의 파워가 더 세요.”
아내는 아이들과 대화를 자주 나눈다. 얘기를 나누며 전하는 격려와 칭찬이 아이들에겐 강력한 무기가 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모두 기아(棄兒)여서 친부모가 찾는 일이 없었고, 앞으로도 생기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아이들 또한 친부모를 찾을 의사가 없다. 하지만 “너희들이 대학에 들어가면 친부모를 찾아보자”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이들의 자존감을 북돋는데 좋을 것 같아서이다.
인터뷰를 마치며 부부에게 아산상 상금 1천만 원을 어디에 사용했느냐고 물었다.
“아이들에겐 상을 받은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어요.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도 있는데, 입양 때문에 수상했다면 마음을 다칠 수도 있어서였죠. 아빠가 공무원 생활을 잘 해서 좋은 상을 받았다고 했어요. 그리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점에 가서 고기를 구워 먹고, 나머지는 통장에 잘 보관해 두었습니다. 아이들 덕에 받은 상금이니까 아이들을 위해 써야죠.”

※ 아이들 이름이 노출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탁정식-강수숙 부부의 요청에 따라 웹진에서는 아이들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이미지 하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