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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편지 가난에게 보내는 화해 공선옥

2년간의 독일생활을 위하여 한국에서의 집과 살림을 정리한 것이 작년 여름입니다. 짐들을 정리하면서 많이 갈등했습니다. 다음에 한국에 돌아오면 모두 사야 할 것들인데 싶어 쉽게 버릴 마음을 먹지 못해 생긴 갈등입니다. 가장 먼저 버릴(남에게 주는) 마음을 먹기 쉬웠던 것은 가전제품과 가구입니다. 가전제품이라고 해봐야, 서너 가지를 넘지 않습니다. 냉장고, 세탁기(모두 10년 이상 된 것들), 텔레비전, 선풍기, 다리미 정도입니다. 가구는 이불과 옷이 들어가는 두 칸짜리 장롱, 책상, 텔레비전받침으로 쓰던 작은 문갑 그리고 책장입니다.

가전제품, 가구들을 빼려고 하니 거기에 담겼던 내용물도 처분해야 합니다. 냉장고 안의 음식들, 가구 안에 들어 있던 옷들, 잡동사니들 그리고 책들. 다른 것은 아깝지 않은데 책은 좀 아까웠습니다. 그리하여, 아무래도 못 버리겠다 싶은 것들 중에 옷가지는 친척집으로, 책은 친구 집으로 일단 보냈습니다. 그러고 나서 전화를 해지했습니다. 이제 한국에서 맺은 사람들과의 인연을 연결할 수 있는 수단은 메일주소 하나뿐입니다.

그리고 독일로 왔습니다. 독일에 오니, 내가 사는 집의 인터넷은 ‘슈틱’이라는 것을 꽂고 하는 인터넷입니다. 어차피 다른 집으로 곧 이사를 가야 하니, 집주인이 쓰는 슈틱을 얻어서 인터넷을 하려고 하면 툭 끊어지고, 속도도 느리고, 동영상이나 소리는 아예 기대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메일 열어보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인터넷이 되는 동네 찻집을 갑니다. 한국을 떠났는데도 한국에서의 소식에 안달하는 내가 참으로 딱했습니다. 습관이란 게 그렇게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혹은 낯선 이국이 좀 외로웠을 수도 있고요.

하여간, 인터넷을 하기 위해 동네 찻집에서 커피값 꽤나 날렸습니다. 나는 인터넷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커피값 아까워하면서 그 집에 오는데 독일 사람들 중에는 사람을 만나기 위함도 아니요, 단순히 커피 마시기 위해서, 혹은 커피를 마시면서 책이나 신문을 보기 위해서 그 집에 오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좀 의아했습니다. 무슨 목적이 있어서 온 게 아니고 단순히 혼자 앉아서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 혹은 신문이나 책을 보기 위해서 커피값을 쓰는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내 돈도 아닌데 그들이 마시는 커피값이 아까워지기까지 하더군요.

어쨌든 이윽고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이고, 그 얼마나 아까웠던 커피값입니까. 아,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인터넷회사에서 한 달을 기다리라 하더군요. 더구나 이사한 지역은 시 외곽이라 인터넷을 할 수 있는 찻집도 없습니다. 주위는 온통 숲입니다. 막막하더군요. 이사한 집에는 텔레비전도 없습니다. 세탁기도 없습니다. 답답했습니다. 한숨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너무나 간단한 일입니다. 인터넷은 안 하면 되고, 텔레비전은 안 보면 되고, 빨래는 그냥 손으로 빨면 됩니다. 예전에도 그렇게 살았는데 살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새집에 있는 문명이라고는 오직 전기와 가스. 아, 그것이면 됩니다. 그것이면 사는데 아무 문제없습니다. 예전에 전기도 가스도 없이 살아봤으니까요.

독일 사람들은 그나마 전깃불 켜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카페에서 그랬듯이 집안에서도 빛을 발하는 건 촛불입니다. 오후 서너 시만 돼도 벌써 한밤중 같은 긴긴 겨울밤, 숲으로 가득 찬 변두리 동네의 빨간 지붕 위로 연기가 피어오릅니다. 100년도 더 된 집들의 벽난로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입니다.

내 친구 라이너 씨는 긴긴 겨울밤에 그렇게 벽난로에 장작불을 때면서 촛불을 밝히고 오래된 책을 읽습니다. 오래된 그림 속 풍경을 현실에서 보니 좀 이상했습니다. 아직도 저렇게들 살고 있구나. 근데, 저렇게 사는 것이 재미있을까. 하루만 뉴스를 안 봐도 시대에 뒤처진 사람이 될 것 같은 시대에 저렇게 살아도 되나. 처음에는 적응이 안됐습니다. 오래된 집에서 오래된 소박한 살림들 속에서 간단한 음식을 해먹고 오래된 책을 보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직도 세상에는 있구나, 이렇게 살아도 되는구나, 하면서도 자꾸만 그 현실이 비현실인 것처럼 여겨졌던 이유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알았습니다. 내게도 긴긴 겨울밤에 화롯불 옆에서 호롱불 켜놓고 책 읽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빵과 스프 한 접시만으로 이루어진 간단한 독일인의 음식만큼이나 겸손하기 이를 데 없는 밥과 국 한 가지만을 먹고 살았던 시절이 있었음을. 그러나 나는 밥과 국만으로 이루어진 식사를 하고 화롯불 옆에서 호롱불 켜고 책을 읽었던 그 시절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기를 쓰고 살았다는 것을.

내가 ‘가난’이라고 여겼던 시절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커피값도 아까워하며 기를 쓰고 벌어서 사들였던 많은 것들을 버리고 온 곳에서 나의 옛 시절을 만났는데, 왜 이렇게 낯설어하는가를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알았습니다. 나는 사실은 ‘검소한 독일의 풍경’이 너무나 낯익어서 짐짓 낯설어하고 있다는 것을. 낯설어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야말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실은 내 옛 시절의 가난을 내가 그렇게까지 모질게 버리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을. 내게 다시 텔레비전이 생기고 세탁기가 생기는 날, 내가 그것들을 낯설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 손빨래를 합니다. 먼먼 독일에서 내 한국에서의 가난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밉니다.

※ 공선옥: 1963년 전남 곡성 출생. 1991년 <창작과비평> 통해 데뷔. <꽃같은 시절>, <내가 가장 예뻤을 때>, <피어라 수선화>,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살> 등 출간. 신동엽창작상, 만해문학상, 요산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작품 취재를 위해 2011년 8월부터 독일에 머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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