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나눔과 섬김 불우청소년 위해 평생 바친 ‘넝마주이의 아버지’ 정재학

1925년생이니 우리나이로 87세. 하지만 아흔을 앞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정했다. 훤칠한 키에 곱게 빗어 넘긴 흰 머리, 미소는 소년처럼 맑았다. 불우한 청소년들을 위해 평생을 바친, ‘넝마주이의 아버지’ 김영환 타데오 신부의 이야기다.
천주교 사제직에서는 ‘은퇴’했지만 사회활동에는 정년도, 은퇴도 없다. 대전시 낭월동에 위치한 청소년 보호치료시설 ‘효광원’의 지도신부로 30년 넘게 왕성한 봉사활동을 해오고 있다. 사회복지법인 효광원은 우리나라의 최초, 최대 규모의 교호(敎護)시설로 김영환 신부가 사재와 정부의 지원금, 독일 가톨릭 기관의 원조금 등을 모아 설립한 곳이다.

‘사랑 결핍증’을 겪는 아이들
“아이들이 너무 착하고 예뻐요. 이 아이들에게는 하나도 잘못이 없습니다. 모두 부모들 때문이죠. 이곳에 온 아이들 가운데 70~80%는 부모가 이혼한 결손가정 아이들이에요.”
효광원은 사회에서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킨 청소년들을 수용해서 치료와 교육을 시키는 곳이다. 이곳에 온 아이들의 사연은 저마다 다르지만 원인은 단 한 가지, 바로 ‘사랑 결핍증’이다. 신부님은 아이들과 마주칠 때마다 꼭 안아주거나 등을 두드려주고, 안수기도를 하듯이 두 손으로 머리를 가볍게 감싸고 강복(降福) 기도를 해준다.
그럴 때면 축복을 받기 위해 아이들이 신부님 앞으로 달려와 머리를 내민다. 그런 사랑이 가끔 작은 기적이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엄마가 집을 나가는 바람에 부모가 이혼해 졸지에 고아 신세가 된 아이가 있었다. 신부님은 처지가 딱해 보이는 아이를 붙잡고 간곡하게 말했다.
 “아버지에게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려 보거라. 아버지, 어머니가 함께 살지 않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왜 저희들을 이렇게 내버려 두느냐고 간절히 물어 보아라. 아버지, 어머니가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고 우리를 위해 살아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하고 눈물로 기도를 해보거라.”
그 아이는 신부님의 말대로 3남매가 모여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 눈물로 애원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를 했다. 정말 기적이 일어난 걸까? 6개월간의 치료보호 기간이 지나고 드디어 찾아온 퇴소일. 이혼을 했다던 부부가 보호자의 자격으로 함께 아들을 만나러 왔다. 김 신부도 깜짝 놀랐다. 집을 나갔다던 엄마는 신부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흐느꼈다.
“아이들이 찾아와서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엄마로서 너무나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잘못을 뉘우쳤으니 서로 이해하고 잘 살겠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이들이 모두 울었고 김영환 신부도 함께 울었다. 눈물 많은 노신부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도 옛 기억이 떠오르는 듯 눈시울을 붉혔다.
효광원에서는 인성교육을 통해 상처받은 아이들의 마음을 치료해주는 일도 하지만 직업교육도 함께 시키고 있다. 직업교육은 이곳을 떠난 아이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해준다.
“이곳에서 나가서 카센터를 2개나 운영할 정도로 성공한 아이가 있어요. 가끔 찾아와서 아이들에게 강의를 해주기도 합니다.”
생수 대리점 사장이 돼 효광원에 물을 공급해주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용접 기술자로 대기업 관련 회사에 취직해 높은 연봉을 받는 ‘아이’도 있다. 그런 아이들을 볼 때마다 언제나 가슴이 뿌듯하다.
김영환 신부는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당진 합덕읍에서 소년시절 대부분을 보냈다. 부모님을 따라 어린 시절부터 합덕성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유년시절의 기억 대부분은 성당 그리고 신부님과 함께 한 것이었다. 성당 활동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본당 신부님으로부터 ‘꼬마신부’라는 별명으로 불린 소년은 실제로 신학교에 진학, 운명처럼 신부가 됐다.

‘꼬마신부’라고 불린 소년
김영환 신부가 사목활동을 시작하던 시기는 한국전쟁 직후였다. 모두가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렸으며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충남경찰국과 BBS 충남도연맹에서 불러서 가보니 부탁을 하더라고요. 신부님이 사회활동을 좀 더 해주셔야겠다고.”
‘BBS’란 ‘Big Brothers and Sisters Movement’의 약자로 미국에서 문제 청소년 교화를 위해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다. 1대 1 결연을 통해 불우 청소년들을 이끌어주는 운동으로, 사목 활동만으로도 정신이 없는 상태였지만 김 신부는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1972년 3월 BBS 충남도연맹 부회장과 대전시 지부장으로 취임, BBS 활동에 뛰어들었다.
BBS 활동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이번에는 ‘재건대’를 맡아달라는 부탁이 왔다. 재건대란 넝마주이들을 위한 집단 수용시설이다. 한국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전쟁고아들은 갈 곳이 없어 거리를 헤매다가 폐휴지나 고철을 주워 파는 넝마주이가 됐다. 그리고 이들은 전후의 사회적 혼란, 극심한 빈곤과 맞물려 절도와 폭력사건을 일으키며 시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됐다. 이들을 지도계몽하기 위해 경찰에서 만든 것이 바로 재건대다. 하지만 물리적인 힘으로만 이들을 다스릴 수 없다고 판단, 정신적인 기둥이 될 만한 종교계의 저명인사를 물색한 끝에 김 신부에게 또 다시 어려운 부탁을 해온 것이다.
김 신부는 사재를 털고 지역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넝마 바구니를 손수레로 바꾸는 일부터 시작했다. 넝마주이들을 수용하고 가르치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들이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길을 고민한 끝에 넝마주이들에게 가정을 만들어주는 일에 적극 나섰다. 그렇게 해서 짝을 맺어준 커플이 50여 쌍에 달한다. 이들을 위해 합동결혼식을 열어주고 지역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혼수를 장만해주기도 했다. ‘넝마주이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하지만 체계적으로 자활을 위한 교육과 진로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 주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김 신부는 도지사와 검찰, 경찰, 방송국 관계자, 지역 유지들을 찾아다니면서 후원금을 모으고, 멀리 독일의 가톨릭 기관인 미세레올까지 찾아가 원조자금을 요청한 끝에 기숙사와 교육시설을 갖춘 현대적 교호시설인 엠마우스 성지원을 설립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개념조차 없었던 첫 교호시설의 등장이었고, 1978년 효광원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오늘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자왕평야를 만든 하느님의 대역사
김영환 신부의 사회봉사 활동은 아이들에게 국한된 것만은 아니었다. 2008년 8월 부여에서 귀한 손님이 두 명 찾아왔다. 1960년대 자왕제방 축조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이 지역 주민들 대표가 김영환 신부를 초대하러 온 것이다. ‘40년만의 보은’이라고 할 만한 초대의 사연은 이렇다.
부여군 자왕리와 저석 1, 2, 3리 그리고 신정리와 송간리의 6개 부락은 1960년대만 해도 마을 옆을 흐르는 백마강의 잦은 범람 때문에 여름마다 물난리를 겪어야 했다. 한 해 동안 기른 작물이 모두 쓸려 내려가는 것은 물론 집이 침수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길바닥에 나앉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김영환 신부가 팔을 걷어 붙였다. 대전교구장을 찾아가고 한국가톨릭구제회를 찾아가 필연성을 역설했다. 또 정부 관련기관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요청했다. 처음에는 주민들도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김 신부의 끈질긴 집념에 관계자들의 마음이 움직였고 결국 공사를 시작할 수 있게 됐다. 3년에 걸친 공사 끝에 자왕제방이 완공되자 더 이상 강이 범람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으며 ‘자왕뻘’로 불리던 제방 아래 땅들은 ‘자왕평야’로 불리게 됐다. 72만 평에 달하는 새로운 농경지를 얻게 된 것이다.
40년이 넘어 다시 찾아가 본 자왕리 일원은 세대당 억대 수익을 올리는 부유한 농촌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제방을 쌓은 지 40년이 넘었고, 당시 제방을 만들 때 참여했던 사람들 대부분이 세상에 없었지만 그 후손들은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었다. 마을 어귀에는 ‘김영환 신부 공적비’가 세워졌으며 요즘은 매년 그들이 수확한 농작물을 보내오고 있다.
이 땅의 소외되고 어려운 이들을 위해 몸 바친 한 평생. 모두가 힘들고 어렵다고 생각한 일을 그는 불도저 같은 추진력과 탁월한 리더십으로 이루어냈다. 하지만 그것이 어찌 추진력이나 리더십의 힘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낸 것은 사랑의 힘이 아니었을까. 아이들의 머리를 꼭 감싸주던 그 손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미지 하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