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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고통받는 사람은 누구나 치료받을 권리가 있다” 유인종

국내에서 처음 만들어진 국제의료구호기관 ‘글로벌케어’는 1994년 아프리카 콩고에 있는 작은 마을 촌도의 세 그루 나무 밑에서 시작되었다. 르완다에서 벌어진 내전으로 이웃 나라인 콩고로 넘어온 르완다 난민들을 치료하기 위하여 당시 광명내과의원 박용준(56) 원장과 전주예수병원 김민철 원장은 우리나라 의료팀을 이끌고 촌도에 도착했다.

르완다 사람들과 의사소통이 되지 않던 우리 의료팀은 가장 흔한 질병의 증상들을 르완다 말로 적어서 나무에 써 붙이기로 했다. 첫 번째 나무에는 ‘고열’이라는 팻말을 걸었다. 이 나무 밑에는 대부분 말라리아 환자들이 모여들었다. 두 번째 나무에는 ‘배앓이’라는 표지판을 붙였다. 여기에는 수인성 질환으로 설사를 하거나, 회충 등 기생충으로 배앓이를 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마지막 나무에는 ‘영양실조’라고 써 붙여서 못 먹어서 깡마른 아이들과 산모들이 모일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각 나무 밑에 환자들이 모이면 거기에 맞춰 진료를 했다. 특히 ‘영양실조’ 나무 밑에 모인 사람들에게는 우유와 특수 비스킷을 제공해 영양식을 공급했다. 영양이 부족한 상태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나무 밑에서 의료봉사를 하던 박용준 원장은 이런 활동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NGO(비정부기구)가 필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었고, 마침내 1997년 국제의료구호 NGO인 글로벌케어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그로 하여금 안락한 개인생활을 포기하게 만든 ‘영혼의 울림’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암 전문가로서 교수를 꿈꾸던 그를 지구촌 오지의 주치의로 변화시킨 힘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1994년 콩고에서 2개월간 난민 진료
1994년 4월, 르완다에서 종족간의 분규로 내전이 발생했다. 7월까지 이어진 내전으로 약 50만 명이 사망했고, 100만여 명의 난민이 생겼다. 인류 역사상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난민이 발생한 일대 사건이었다.

르완다 사태가 알려지자 한국기아대책기구와 한국누가회는 난민들을 구호하기 위해 1차 의료팀을 파견했다. 한국누가회는 1980년 의대와 치대, 한의대생들이 소외된 불우이웃에게 의료봉사를 하기 위해 설립한 의료선교단체로서 전주예수병원 김민철 원장이 회장을 맡고 있었다. 1차 의료팀을 이끌고 난민 진료를 하던 김 원장은 일손이 달리자 박용준 원장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1980년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박 원장은 연세대 암센터에서 연구강사로 근무하다가 1989년부터 1991년까지 미국 뉴욕주립대 암연구소(로스웰파크암센터)에서 선임연구원 겸 교환교수로 일했다. 레이저를 이용한 암 치료법을 공부한 박 원장은 대학에 남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바뀌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에게 기관병원에 남지 말고 병원을 개업해서 더욱 많은 이웃을 위해 일하라는 미션이 계시처럼 다가온 것이다.

경기도 광명에 내과를 개업한 그는 한국누가회 회원으로서 틈나는 대로 네팔 등에서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르완다 난민 진료소로 와달라는 연락을 받은 건 몽골의료팀 단장으로 의료봉사를 마치고 돌아온 직후였다.

박 원장은 1994년 10월 28일 외과 의사 1명, 간호사 3명, 간호조무사 2명 등 총 13명의 2차 의료팀을 이끌고 콩고로 갔다. 콩고의 고마 시에 도착한 건 10월 29일 토요일이었다. 콩고와 르완다, 우간다는 각각 평지와 호수를 끼고 접경하고 있는 중앙아프리카의 비교적 비옥한 나라들이다. 콩고는 평지와 키부라는 호수를 끼고 르완다와 국경을 나누고 있어서 약 80만명의 난민들이 식솔과 가축을 이끌고 고마로 피난을 왔다. 우리 의료팀이 르완다의 수도인 키갈리로 가지 않고 고마로 들어간 건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고마에는 7개의 공식 캠프가 있었다. 15만〜20만 명 정도를 수용하는 캠프가 4개였고, 나머지는 1만〜10만 명 정도를 수용했다. 캠프는 유엔난민기구(UNHCR)의 관할 아래 각국의 NGO가 자신들의 특성에 맞게 식량배급과 의료, 교육, 고아원 운영, 도로 개설, 운송 등의 역할을 나눠 맡고 있었다. 박 원장이 이끄는 의료팀도 2개월 일정의 진료에 들어갔다.

신생아에게 지어준 이름, ‘코리아나’
박 원장의 의료팀이 지낼 숙소는 고마에 있었고, 의료봉사활동을 할 곳은 4륜구동 자동차로 2시간 30분을 달리거나 배를 이용해 약 17km를 가야 하는 곳에 위치한 촌도 캠프였다. 이 캠프는 1차 의료팀이 개척한 곳인데, 난민 수는 8천〜9천 명 정도로 콩고의 7개 캠프 중 가장 작았다.

1차 의료팀의 피나는 수고로 한국 의료팀은 캠프에서 환영받고 있었다. 심한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영양식단 치료가 효과를 거두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현지에 도착한 내과와 외과 전문의들의 재빠른 진단과 처방, 수술 진행과 짜임새 있는 간호사들의 손길에 의해 환자들은 빠른 회복을 보였다. 우리나라에서 공수한 의약품들도 큰 효과를 거두었다. 우리 의료팀의 집중적인 진료로 촌도 캠프는 사망자 수가 가장 적고, 인구비례로 가장 많은 진료가 이루어진 캠프(하루 250〜300명 진료)로 유엔의 의료통계에 기록돼 있다.

박 원장은 촌도 캠프에서 잊기 어려운 일들을 많이 겪었다. 엄마들은 한결같이 자신은 물론 자기 아이의 나이를 몰랐다. 그래서 아이의 키와 체중을 재서 나이를 대충 짐작한 뒤 적정량의 우유를 제공했다. 또 임신 8개월의 52세 고령 산모가 텐트에서 분만한 아이의 이름을 ‘코리아나’로 지어준 일도 있었다. 몸 상태가 안 좋은 아이를 UN 산하 큰 병원으로 옮기기 위해 키부 호수를 배로 건너다가 폭도들에게 총으로 위협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박 원장이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건 각국에서 난민을 지원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달려온 사람들의 ‘헌신성’이었다. 당시 콩고에는 100여개의 NGO가 들어와 있었는데, 박 원장은 ‘이런 세계가 있구나’ 하며 새롭게 눈을 떴다. 특히 영국 NGO인 옥스팜(OXFAM)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옥스팜이 난민촌에 물을 공급하자 수인성 질환의 유병률이 급속히 떨어졌다. 1〜2주 사이에 수십 명의 의사가 치료한 것보다 환자가 줄어드는 것을 보고 남을 돕는 일에도 전문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외된 지구촌 이웃들의 ‘희망 주치의’
박 원장은 2개월 동안 의료봉사를 다녀온 후 우리나라에도 독자적인 의료NGO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것이 의사들에게 주어진 소명이란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당시 아시아에 국제적인 의료NGO는 많지 않았다. 일본에 암다(AMDA)가 있었지만 7개국이 함께 활동하고 있었다. 박 원장이 깊은 인상을 받은 건 르완다에서 함께 일했던 ‘국경없는 의사회’의 활동이었다.

1971년 조직된 국경없는 의사회는 당시 20여개국에 지부를 두고, 45개국에서 의사와 간호사, 자원봉사자 등 3천여 명이 구호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인재(人災)든 전쟁이든 고통 받는 인간은 치료받을 권리가 있다’는 신념 아래 목숨을 건 활동을 하고 있는 국경없는 의사회를 보면서 우리나라에도 그와 같은 의료NGO를 만들고 싶었다.

1996년, 국경없는 의사회의 장 에르베 브라돌 회장이 서울평화상을 수상하기 위해 내한했을 때는 직접 만나서 많은 조언을 구했다. “조직을 만드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한 명의 의사가 필요하다”는 말을 가슴에 담은 박 원장은 그 이듬해에 박상은 샘안양병원 의료원장, 이명수 치과의원 원장, 이명호 이비인후과의원 원장 등과 함께 실행위원을 맡아 ‘소외된 지구촌 이웃들의 희망 주치의’라는 소망을 담은 글로벌케어를 출범시켰다. 발기인은 210명이었고, 김병수 연세대 총장이 이사장 겸 회장을 맡았다. 박 원장은 2008년부터 2대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1997년 2월에 창립된 글로벌케어는 가난과 질병, 재난으로 고통 받는 지구촌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설립된 국내 최초의 국제의료NGO이다. 현재 150여개의 회원병원이 있고, 의사를 포함해 간호사와 사회복지사 등 전문인력 500여명과 일반자원봉사자 500여명, 정기후원자 1천여 명 등 모두 3,000여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글로벌케어는 창립 이후 재난현장에서 이웃사랑과 봉사정신을 실천해왔다. 1999년 3월 코소보에서 ‘인종 청소’라는 잔혹한 사태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을 때는 11명의 의료진을 구성해 난민 진료에 참여했다. 당시 아시아 지역에서는 어떤 NGO도 코소보에 오지 않았다.

1999년 8월 터키 북서부를 강타한 강진이 발생했을 때는 의사와 간호사 등으로 구성된 긴급구호팀을 파견해 2,500여명의 부상자를 치료했다. 특히 아이를 출산하다 건물더미에 깔린 모자를 살리기 위해 글로벌케어는 필사적인 응급구호작업을 펼쳤다. 호흡이 끊어질 듯한 산모와 아이에게 응급처치를 시도해 극적으로 모자를 살려내자 지켜보던 터키인들과 각국의 의료NGO들이 안도의 탄성을 터뜨린 일도 있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
2005년에는 동티모르에서 한 달 동안 2만여 명을 진료했고, 금년 1월 아이티에서 지진이 발생했을 때는 2개 팀을 파견해 응급구호에 나섰다. 지금까지 글로벌케어가 해외에서 진료한 환자 수는 13만5천여 명에 달하고 있다.

글로벌케어는 현재 6개국에 지부를, 5개국에는 협력사무소를 두고 있다. 이집트와 예멘·부르키나파소·네팔·베트남·캄보디아에는 지부가, 탄자니아와 요르단・방글라데시・인도네시아・몽골에는 협력사무소가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한국인 등 55명이 질병 퇴치와 의료 인프라 구축, 건강검진 및 보건교육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글로벌케어는 해외난민 구호사업뿐 아니라 베트남 오지마을의 아동을 대상으로 해외아동 결연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우리나라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베트남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화해이며 사랑이라는 것이 글로벌케어의 생각이다.

또한 베트남에는 2만여 명의 선천성 기형 아동들이 있는데, 글로벌케어는 1997년부터 서울아산병원 등 국내 5개 대학병원의 성형외과 교수팀을 파견해 언청이 아동들에게 수술을 해주고 있다. 지금까지 300여명의 아동들을 수술했으며, 그밖에 의료기자재 지원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아울러 2005년부터는 이집트의 심장병 어린이 20명을 초청해 국내 병원에서 수술 받을 수 있게 하였고, 베트남 등 현지 의료인의 역량 강화를 위해 22명을 초청하여 서울아산병원과 세브란스병원 등에서 선진 의료기술을 습득하게 했다.

글로벌케어는 국내에서도 의료복지사업을 펼치고 있다. 2000년부터 진료팀을 구성하여 서울과 인천, 파주시 등의 취약지역에서 독거노인과 외국인 근로자, 저소득가정 아동 등 3만여 명을 무료 진료했다. 이외에도 퇴행성 및 만성골절 질환자의 의료비 지원, 서울 을지로 지하철역의 건강증진센터 운영, 의약품 지원, 모금 캠페인 등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글로벌케어는 해외와 국내의 비중이 7대 3일 정도로 해외사업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어서 아무래도 국내보다는 외국에서 이름이 더 알려진 편이다.

“일정한 회비 없이 회원들의 기부와 프로젝트 사업비, 약품 후원 등으로 꾸려가기 때문에 글로벌케어의 재정은 넉넉한 편이 아닙니다. 하지만 NGO는 경제적으로 약간 부족해야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웃음). 우리에게는 전문인력과 봉사정신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으므로, 앞으로도 첨단 의학기술을 통해 사랑을 실천해 나가겠습니다.”

편안한 생활을 제쳐두고 소외된 이웃의 희망 주치의를 자임한 박용준 회장은 “10년 후에는 50개국에 글로벌케어 지부를 만들고 싶다”는 소망을 갖고 있다. 세상을 바꾸는 데 힘을 보태고 있는 그의 바람이 이루어지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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